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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벨 《갈라》

리뷰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 안경모 연출가
  • 등록일 2021-01-27
  • 조회수585

리뷰

제롬 벨 <갈라>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안경모 연출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마음과 몸이 아플 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춤의 치료적 기능을 말하지만, 춤이 일상 속에 늘 함께 있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은 어떨까? 이미 춤은 저 너머에 있다. 가족의 박수 소리에 덩실덩실 굴신하던 꼬마 아이는 하루 8시간 이상 의자에 갇혀 춤을 잃었다. 고전 춤은 스포트라이트 비추는 무대에, 대중 춤은 칼군무와 함께 TV 화면과 스마트폰 안에 갇혔다. 일정한 해방구 역할을 하던 클럽과 교습소는 코로나로 인해 밀집 집합금지 시설이라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또한 이 질문에는 훈련된 전문가들의 소유가 되어버린 ‘춤의 소외’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춤을 잃은 시민에게 춤은 무엇일까? 화려한 춤 세계에서 신체적으로 밀려난 장애인 시민에게 춤은 무엇일까?

제롬 벨의 <갈라>에는 20명의 비전공자와 전공자들이 출연했다. 단지 숙련도에 따른 구분뿐만 아니라 다른 성별, 다른 나이, 다른 인종이 모였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또한 함께 했다. 그야말로 20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20개의 다양한 몸으로 20가지의 다양한 춤을 선보였다. 전문무용수에 의한 무용적 환영을 깨고 훈련된 테크닉을 거부한 ‘농-당스’(non-danse, 비(非)무용)의 거장답게 제롬 벨이 구성한 <갈라>에는 “나에게 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담겨있었다. 코로나로 직접 내한하지 못해 한국의 김윤진 안무가에 의해 실행된 이번 작품은 2015년의 초연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갈라>는 크게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누구나 ‘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이들이 재현하는 것이다. 발레 동작 중 ‘피루엣’(pirouette, 한쪽 발로 서서 빠르게 도는 것)과 ‘그랑 쥬떼’(grand jeté, 뛰어올라 다리를 뻗는 동작)를 재현하는데, 훈련되지 않은 비전문가들에게서는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마다의 피루엣과 그랑 쥬떼를 구성하기에 어느 순간부터 잘하고 못한다는 인식은 사라지고 ‘내가 발레를 한다’라는 수행적 의미만 남는다. 특히 발레 동작은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퍼포머에게는 더욱 아이러니한 재현인데, 모방할 수 없는 동작이기에 아예 모방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발레 동작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재현 불가능에 따른 자기해석은 비단 클래식뿐만 아니라 기교를 앞세운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의 재현과정에서도, 2인무를 구성하는 왈츠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앞을 걸어가듯 뒤로 걷는 문워크 동작은 뒤로 뛰거나 뒷걸음질로 대체되고, 키 높이가 다르고 신체적 거리감이 다른 왈츠는 그냥 ‘함께 춘다’로 전환된다. 그래서 완성된 춤을 향한 기교적 숙련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가 춘다’라는 춤의 주체적인 현상이 드러나게 된다.

발레―왈츠―마이클 잭슨으로 이어지며 ‘춤’하면 떠오르는 기존의 이미지들은 저마다의 춤을 드러내는 ‘침묵의 즉흥’에서 더욱 해체된다. 전체를 묶는 단일한 콘셉트도 없고 저마다의 안무를 구성하는 특별한 원리도 없다. 그저 ‘내가 춘다’라는 주체와 행위소만 남게 되는데, 이 모습은 다양성의 세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현존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했다. 간혹 눈에 띄는 퍼포머와 동작도 있지만 전문무용수의 모습이 아니었고, 이 또한 고정되지도 않았다. 그저 나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고, 이 또한 관객들 저마다 다른 선택을 가지리라 예상된다.

작품은 1부의 재현과 2부의 즉흥을 거치면서 마지막 3부로 향하는데, 3부는 한 사람이 솔로 동작을 하면 그 동작을 집단적으로 재현하는 형태이다. 언뜻 보면 1부의 발레나 마이클 잭슨 춤처럼 기존의 춤을 재현하는 듯하지만, 재현 대상이 완전히 전복된다. 시간상 10개의 대표 솔로로 압축되었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춤이 다양한 몸을 거쳐 제시되고 또 재현되었다. 앞서 보았던 발레를 포함하여 라틴댄스, 리듬체조, 현대무용 같은 전문무용수의 몸짓도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춤,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춤, 휠체어 댄스도 있고 발달장애인의 춤도 있다.

1부의 재현이 기존 춤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3부의 재현은 그 어떤 몸짓도 온전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모방 불가능성’이 강조되며 개개인 몸의 고유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춤을 집단이 재현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었는데, 그가 의도하는 몸짓의 설계와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몸 현상의 시간차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3부의 구성은 저마다 지닌 몸의 고유성이 집단에 의해 인정되고 승인되는 모습을 지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제롬 벨의 <갈라>는 저 너머에 있었던 춤이 우리 안으로 다가와 ‘만인에 의한 춤’ ‘만인의 춤(만인이 소유한 춤)’ ‘만인을 위한 춤’으로 자리매김하며 춤의 민주주의성까지 확보했다. 특히 이 ‘만인’은 보통 명사로서의 군중이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 명사인 이름처럼 ‘OOO의 춤’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이처럼 춤의 민주성이 강조되었기에 글쓴이의 바람이 생기기도 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에서 고령층의 출연진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았겠고,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동남아계 한국인의 몸과 춤이 더 보였으면 좋았겠다. 또한 장애의 대표유형을 지체장애와 발달장애로 제한하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겠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모두 수용하려면 결국 <갈라>는 20명의 출연진이 아니라, 51,841,786명(2020년 9월 통계 기준 대한민국 총인구수)의 출연진이 필요하게 된다. 이들 모두 고유의 존엄한 몸짓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위한 무대는 일상공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더불어 이런 구성이라면 궁극적으로 삶 속에 녹아든 춤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제롬 벨의 <갈라>는 늘 춤추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자각까지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갈라>

콘셉트·연출 제롬 벨 | 총감독 김윤진 | 2020.11.28.(토)~11.29.(일) 오후 4시 | 온라인상영

새로운 접근법을 제공하는 <갈라>는 전문무용수, 배우, 비전문가로 구성된 스무 명의 무용수들을 한 무대 위로 모은다. 춤을 추는 것에 대한 각 개인의 욕망이 투영되면서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한다.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선보인 <갈라>는 제롬 벨이 확립한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제롬 벨, 프랑스 현지 조안무가 앙리끄 네베스, 그리고 한국의 김윤진, 임소연 안무가의 협업으로 탄생하였으며, 스무 명의 한국 배역이 참여했다.

안경모

연극을 중심으로 뮤지컬, 무용, 가무악 등 다양한 공연을 구성하고 연출한다. 대학에서 연극제작과 연극교육방법을 지도했고, 현장에서 작품활동과 예술교육을 컨설팅한다. 주요작품으로 연극 스웨트, 해무(海霧), 진실x거짓,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 그리고 또 하루, 가극 금강(낭독), 뮤지컬 찰리찰리, 가무악 안숙선과 떠나는 민요여행, 무용극 행복동고물상, 무용 안녕, TWO, 산행 등이 있다. 2007년 한국연극베스트7, 2012년 서울연극제 대상을 수상했다.
thtrman@hanmail.net

사진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 사무국
(메인 사진 © Photographer Herman Sorgeloos, Kaaitheater, KunstenFestivaldesArts, Brussels (Belgium, May 2015))

2021년 1월 (17호)

상세내용

리뷰

제롬 벨 <갈라>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안경모 연출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마음과 몸이 아플 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춤의 치료적 기능을 말하지만, 춤이 일상 속에 늘 함께 있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은 어떨까? 이미 춤은 저 너머에 있다. 가족의 박수 소리에 덩실덩실 굴신하던 꼬마 아이는 하루 8시간 이상 의자에 갇혀 춤을 잃었다. 고전 춤은 스포트라이트 비추는 무대에, 대중 춤은 칼군무와 함께 TV 화면과 스마트폰 안에 갇혔다. 일정한 해방구 역할을 하던 클럽과 교습소는 코로나로 인해 밀집 집합금지 시설이라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또한 이 질문에는 훈련된 전문가들의 소유가 되어버린 ‘춤의 소외’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춤을 잃은 시민에게 춤은 무엇일까? 화려한 춤 세계에서 신체적으로 밀려난 장애인 시민에게 춤은 무엇일까?

제롬 벨의 <갈라>에는 20명의 비전공자와 전공자들이 출연했다. 단지 숙련도에 따른 구분뿐만 아니라 다른 성별, 다른 나이, 다른 인종이 모였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또한 함께 했다. 그야말로 20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20개의 다양한 몸으로 20가지의 다양한 춤을 선보였다. 전문무용수에 의한 무용적 환영을 깨고 훈련된 테크닉을 거부한 ‘농-당스’(non-danse, 비(非)무용)의 거장답게 제롬 벨이 구성한 <갈라>에는 “나에게 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담겨있었다. 코로나로 직접 내한하지 못해 한국의 김윤진 안무가에 의해 실행된 이번 작품은 2015년의 초연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갈라>는 크게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누구나 ‘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이들이 재현하는 것이다. 발레 동작 중 ‘피루엣’(pirouette, 한쪽 발로 서서 빠르게 도는 것)과 ‘그랑 쥬떼’(grand jeté, 뛰어올라 다리를 뻗는 동작)를 재현하는데, 훈련되지 않은 비전문가들에게서는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마다의 피루엣과 그랑 쥬떼를 구성하기에 어느 순간부터 잘하고 못한다는 인식은 사라지고 ‘내가 발레를 한다’라는 수행적 의미만 남는다. 특히 발레 동작은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퍼포머에게는 더욱 아이러니한 재현인데, 모방할 수 없는 동작이기에 아예 모방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발레 동작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재현 불가능에 따른 자기해석은 비단 클래식뿐만 아니라 기교를 앞세운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의 재현과정에서도, 2인무를 구성하는 왈츠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앞을 걸어가듯 뒤로 걷는 문워크 동작은 뒤로 뛰거나 뒷걸음질로 대체되고, 키 높이가 다르고 신체적 거리감이 다른 왈츠는 그냥 ‘함께 춘다’로 전환된다. 그래서 완성된 춤을 향한 기교적 숙련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가 춘다’라는 춤의 주체적인 현상이 드러나게 된다.

발레―왈츠―마이클 잭슨으로 이어지며 ‘춤’하면 떠오르는 기존의 이미지들은 저마다의 춤을 드러내는 ‘침묵의 즉흥’에서 더욱 해체된다. 전체를 묶는 단일한 콘셉트도 없고 저마다의 안무를 구성하는 특별한 원리도 없다. 그저 ‘내가 춘다’라는 주체와 행위소만 남게 되는데, 이 모습은 다양성의 세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현존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했다. 간혹 눈에 띄는 퍼포머와 동작도 있지만 전문무용수의 모습이 아니었고, 이 또한 고정되지도 않았다. 그저 나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고, 이 또한 관객들 저마다 다른 선택을 가지리라 예상된다.

작품은 1부의 재현과 2부의 즉흥을 거치면서 마지막 3부로 향하는데, 3부는 한 사람이 솔로 동작을 하면 그 동작을 집단적으로 재현하는 형태이다. 언뜻 보면 1부의 발레나 마이클 잭슨 춤처럼 기존의 춤을 재현하는 듯하지만, 재현 대상이 완전히 전복된다. 시간상 10개의 대표 솔로로 압축되었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춤이 다양한 몸을 거쳐 제시되고 또 재현되었다. 앞서 보았던 발레를 포함하여 라틴댄스, 리듬체조, 현대무용 같은 전문무용수의 몸짓도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춤,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춤, 휠체어 댄스도 있고 발달장애인의 춤도 있다.

1부의 재현이 기존 춤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3부의 재현은 그 어떤 몸짓도 온전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모방 불가능성’이 강조되며 개개인 몸의 고유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춤을 집단이 재현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었는데, 그가 의도하는 몸짓의 설계와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몸 현상의 시간차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3부의 구성은 저마다 지닌 몸의 고유성이 집단에 의해 인정되고 승인되는 모습을 지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제롬 벨의 <갈라>는 저 너머에 있었던 춤이 우리 안으로 다가와 ‘만인에 의한 춤’ ‘만인의 춤(만인이 소유한 춤)’ ‘만인을 위한 춤’으로 자리매김하며 춤의 민주주의성까지 확보했다. 특히 이 ‘만인’은 보통 명사로서의 군중이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 명사인 이름처럼 ‘OOO의 춤’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이처럼 춤의 민주성이 강조되었기에 글쓴이의 바람이 생기기도 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에서 고령층의 출연진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았겠고,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동남아계 한국인의 몸과 춤이 더 보였으면 좋았겠다. 또한 장애의 대표유형을 지체장애와 발달장애로 제한하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겠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모두 수용하려면 결국 <갈라>는 20명의 출연진이 아니라, 51,841,786명(2020년 9월 통계 기준 대한민국 총인구수)의 출연진이 필요하게 된다. 이들 모두 고유의 존엄한 몸짓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위한 무대는 일상공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더불어 이런 구성이라면 궁극적으로 삶 속에 녹아든 춤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제롬 벨의 <갈라>는 늘 춤추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자각까지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입니까?”

<갈라>

콘셉트·연출 제롬 벨 | 총감독 김윤진 | 2020.11.28.(토)~11.29.(일) 오후 4시 | 온라인상영

새로운 접근법을 제공하는 <갈라>는 전문무용수, 배우, 비전문가로 구성된 스무 명의 무용수들을 한 무대 위로 모은다. 춤을 추는 것에 대한 각 개인의 욕망이 투영되면서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한다.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선보인 <갈라>는 제롬 벨이 확립한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제롬 벨, 프랑스 현지 조안무가 앙리끄 네베스, 그리고 한국의 김윤진, 임소연 안무가의 협업으로 탄생하였으며, 스무 명의 한국 배역이 참여했다.

안경모

연극을 중심으로 뮤지컬, 무용, 가무악 등 다양한 공연을 구성하고 연출한다. 대학에서 연극제작과 연극교육방법을 지도했고, 현장에서 작품활동과 예술교육을 컨설팅한다. 주요작품으로 연극 스웨트, 해무(海霧), 진실x거짓,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 그리고 또 하루, 가극 금강(낭독), 뮤지컬 찰리찰리, 가무악 안숙선과 떠나는 민요여행, 무용극 행복동고물상, 무용 안녕, TWO, 산행 등이 있다. 2007년 한국연극베스트7, 2012년 서울연극제 대상을 수상했다.
thtrman@hanmail.net

사진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 사무국
(메인 사진 © Photographer Herman Sorgeloos, Kaaitheater, KunstenFestivaldesArts, Brussels (Belgium, May 2015))

2021년 1월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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