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웹진 이음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리뷰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만든 예술의 길

  •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 등록일 2021-07-28
  • 조회수2040

리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만든 예술의 길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 김현우, <픽셀 도큐멘타>, 2019-2021, 종이에 마카, 42x29.7cm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언젠가 내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이 있어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무지개 너머 하늘은 푸르고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당신이 감히 꾸는 꿈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이죠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이렇게 노래한다.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고. 이를 위해 도로시와 일행은 ‘노란 벽돌길’을 따라 흥미로운 여행을 떠난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모르도르로 절대반지를 버리기 위해 떠난 긴 여정에서 겪는 수많은 모험 또한 길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스토리는 길을 배경으로, 혹은 길을 모티프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만든 예술의 길이 있다. 물론 여기까지 도달하기에 길은 너무나 길고 구불구불하다. 이 길이 뻗은 세상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그러나 묵묵히, 힘차게 걷고 있는 일군의 작가들 전시가 열렸다.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에서 6월 29일부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Shrunken Paper, Expanded World)》를 열었다. 이번 전시는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상정한 기관 의제인 ‘배움’을 반영해서 기획한 전시로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발달장애 작가 16명과 정신장애 작가 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미술 제도권에서 교육받은 작가들은 아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배움’ 또한 제도미술 속에서의 배움이 아닌, ‘미술관에서, 미술관을 통해서 배우며 나누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이번 전시와 조응한다. 22명의 참여작가는 내면에 몰입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에 집중해 드로잉, 회화, 모자이크, 콜라주, 텍스트, 도예 등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이용한 737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실 1의 큰 공간을 밀도 있게 메우고 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라는 전시 제목에 기획자의 기획의도가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구불구불하고 긴 길을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자폐로, 작은 종이를 장애인의 세계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획자는 오히려 길을 외부와 단절된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해 열려 있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은유로 본다. 그리고 한정된 종이는 무엇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집요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는 작가들의 작업이 등장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동현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번 전시 제목에 대한 영감을 제시한 작업이기도 하다. 필기를 위한 일반 노트에는 작가가 펜과 색연필로 그린 색색깔의 길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한정된 종이 공간은 기차가 돌아다니는 거대한 지도가 된다. 세밀한 선으로 표현된 오래된 지도 같은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데려다 놓는다.

유머러스하지만 쌉싸름한, 이른바 ‘비터스위트’한 작업을 선보이는 김치형, 같은 장소를 여러 색으로 변주하면서 표현한 풍경화를 그리는 고주형, 만화적 감성으로 일상과 상상의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한대훈, 색에 관한 탐구에 천착하는 이찬영, 텍스트 중심의 작업을 보여주는 정진호와 박범 등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세밀한 선과 다양한 색의 탐험을 주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은 김경두의 작업이었다. 앙코르와트 조각 속 정교한 문양을 보는 듯, 가로 71cm, 세로 49cm의 작은 종이에 샤프펜슬로 거대한 세계를 구축해낸다. 그가 그린 이른바 ‘조이드’ 같은 변신 로봇이나 기계 동물의 형상 속 세밀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트윈츠딜라츠(twintz dilats)> 시리즈나 <켈츠케이커츠(keltzkakers)> 같은 제목의 형상들은 작가가 구축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작가의 작업 영상에 등장하는 작업용 샤프펜슬 위에 커스텀으로 붙여넣은 레고 블록이 그의 상상 속 세계와 작품 구축방식을 대변하는 듯하다.

작품 전시 외에 작가들의 작업방식이나 환경 등을 보여주는 영상 자료가 흥미롭다. 작품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겠으나, 작품을 비평하는 방식에는 작가를 연구하는 방식도 있으니, 이 또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작품과 영상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결국 예술가, 창작자의 삶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업실에서 작업에 집중하거나 주변을 산책하며 작업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에서 결국 정상/비정상, 장애/비장애의 구분은 아무 의미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기획자의 서문에도 쓰여있는 “본 전시에서 궁극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삶”을 작품과 함께 목도할 수 있다.

좁은 현실 세계 속에 펼쳐진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22명의 작가는 역설적으로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예술의 길을 우리에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에 있는 길의 끝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예술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열린다.

  • 김경두, <제트마스터>, 2012, 종이에 샤프, 45X65cm

  • 김치형, <깊은 산 속>, 2018, 종이에 아크릴, 48X65cm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 | 2021.6.29. ~ 9.22.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1

가능한 제도권 교육이나 사회적 개입 없이 오직 자신의 내부에 몰입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을 지속해온 발달장애 창작자 16인, 정신장애 창작자 6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전시는 회화와 입체, 도자 작품이 포함되며, 삶과 작품 세계가 일치하는 창작자들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말과 이야기가 담긴 노트, 공책,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순수한 자기 몰두의 행위와 자기 창작의 보편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미술전문지 『아트』와 『월간미술』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현재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미술 저널리스트,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한다.
fedorapress@naver.com

사진 제공.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1년 8월 (22호)

상세내용

리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만든 예술의 길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 김현우, <픽셀 도큐멘타>, 2019-2021, 종이에 마카, 42x29.7cm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언젠가 내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이 있어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무지개 너머 하늘은 푸르고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당신이 감히 꾸는 꿈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이죠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이렇게 노래한다.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고. 이를 위해 도로시와 일행은 ‘노란 벽돌길’을 따라 흥미로운 여행을 떠난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모르도르로 절대반지를 버리기 위해 떠난 긴 여정에서 겪는 수많은 모험 또한 길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스토리는 길을 배경으로, 혹은 길을 모티프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만든 예술의 길이 있다. 물론 여기까지 도달하기에 길은 너무나 길고 구불구불하다. 이 길이 뻗은 세상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그러나 묵묵히, 힘차게 걷고 있는 일군의 작가들 전시가 열렸다.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에서 6월 29일부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Shrunken Paper, Expanded World)》를 열었다. 이번 전시는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상정한 기관 의제인 ‘배움’을 반영해서 기획한 전시로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발달장애 작가 16명과 정신장애 작가 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미술 제도권에서 교육받은 작가들은 아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배움’ 또한 제도미술 속에서의 배움이 아닌, ‘미술관에서, 미술관을 통해서 배우며 나누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이번 전시와 조응한다. 22명의 참여작가는 내면에 몰입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에 집중해 드로잉, 회화, 모자이크, 콜라주, 텍스트, 도예 등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이용한 737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실 1의 큰 공간을 밀도 있게 메우고 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라는 전시 제목에 기획자의 기획의도가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구불구불하고 긴 길을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자폐로, 작은 종이를 장애인의 세계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획자는 오히려 길을 외부와 단절된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해 열려 있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은유로 본다. 그리고 한정된 종이는 무엇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집요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는 작가들의 작업이 등장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동현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번 전시 제목에 대한 영감을 제시한 작업이기도 하다. 필기를 위한 일반 노트에는 작가가 펜과 색연필로 그린 색색깔의 길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한정된 종이 공간은 기차가 돌아다니는 거대한 지도가 된다. 세밀한 선으로 표현된 오래된 지도 같은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데려다 놓는다.

유머러스하지만 쌉싸름한, 이른바 ‘비터스위트’한 작업을 선보이는 김치형, 같은 장소를 여러 색으로 변주하면서 표현한 풍경화를 그리는 고주형, 만화적 감성으로 일상과 상상의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한대훈, 색에 관한 탐구에 천착하는 이찬영, 텍스트 중심의 작업을 보여주는 정진호와 박범 등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세밀한 선과 다양한 색의 탐험을 주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은 김경두의 작업이었다. 앙코르와트 조각 속 정교한 문양을 보는 듯, 가로 71cm, 세로 49cm의 작은 종이에 샤프펜슬로 거대한 세계를 구축해낸다. 그가 그린 이른바 ‘조이드’ 같은 변신 로봇이나 기계 동물의 형상 속 세밀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트윈츠딜라츠(twintz dilats)> 시리즈나 <켈츠케이커츠(keltzkakers)> 같은 제목의 형상들은 작가가 구축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작가의 작업 영상에 등장하는 작업용 샤프펜슬 위에 커스텀으로 붙여넣은 레고 블록이 그의 상상 속 세계와 작품 구축방식을 대변하는 듯하다.

작품 전시 외에 작가들의 작업방식이나 환경 등을 보여주는 영상 자료가 흥미롭다. 작품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겠으나, 작품을 비평하는 방식에는 작가를 연구하는 방식도 있으니, 이 또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작품과 영상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결국 예술가, 창작자의 삶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업실에서 작업에 집중하거나 주변을 산책하며 작업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에서 결국 정상/비정상, 장애/비장애의 구분은 아무 의미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기획자의 서문에도 쓰여있는 “본 전시에서 궁극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삶”을 작품과 함께 목도할 수 있다.

좁은 현실 세계 속에 펼쳐진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22명의 작가는 역설적으로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예술의 길을 우리에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에 있는 길의 끝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예술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열린다.

  • 김경두, <제트마스터>, 2012, 종이에 샤프, 45X65cm

  • 김치형, <깊은 산 속>, 2018, 종이에 아크릴, 48X65cm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 | 2021.6.29. ~ 9.22.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1

가능한 제도권 교육이나 사회적 개입 없이 오직 자신의 내부에 몰입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을 지속해온 발달장애 창작자 16인, 정신장애 창작자 6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전시는 회화와 입체, 도자 작품이 포함되며, 삶과 작품 세계가 일치하는 창작자들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말과 이야기가 담긴 노트, 공책,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순수한 자기 몰두의 행위와 자기 창작의 보편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미술전문지 『아트』와 『월간미술』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현재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미술 저널리스트,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한다.
fedorapress@naver.com

사진 제공.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1년 8월 (22호)

댓글 남기기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