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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애-아트엘 <21° 11′>

리뷰 하나의 안무, 여럿의 몸

  •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 등록일 2020-11-25
  • 조회수689

리뷰

노경애-아트엘 <21° 11′>

하나의 안무, 여럿의 몸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그 추상성으로 ‘악명’이 높은 현대무용 작품을 관객은 어떻게 감상할까. 물론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을 관람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크게 나누어보면,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움직임과 결합시켜 자기만의 서사로 구성하는 방식과, 어떤 연상의 힌트도 주지 않는 매우 중립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의 경우, 오로지 무대 위에 놓인 신체에 집중하며 서사보다는 감각을 작동시키고 결국은 몸 자체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공연이 끝난 뒤에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공연 <21° 11′>(21도 11분)의 경우, 완벽하게 후자의 방식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윽고 공연이 끝난 후 소위 ‘정상성’을 가진 몸은 무엇인가, 안무란 무엇일까, 라는 묵직한 질문을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게 떠안게 된다.

무대 위에는 여섯 명의 무용수가 있다. 키, 체격, 팔과 다리의 길이 등 몸의 조건은, 당연하게 저마다 다르다. 세 명의 무용수는 우리가 ‘장애’라고 부르는 몸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장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알지 못한다 해도 객석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세 무용수의 몸을 ‘장애’로 인식한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때로는 둘씩, 때로는 셋, 홀로, 그리고 어떤 장면에서는 여섯 명이 모두 함께, 안무 동작을 한다. 앉고, 서고, 눕고, 걷고, 뛰는 정도의 단순한 동작을 하지만, 몸의 조건이 모두 다르듯 누구든 할 줄 아는 그 기본적인 움직임의 양태나 질감은 모두 다르다. 어떤 무용수는 서고 앉을 때 쉽게 균형감을 잃기도 하고 불안정한 채 의도치 않은 리듬에 발을 내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안무의 잘못된 소화가 아니다. 안무가는 각자의 몸이 가진 특성,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을 안무로 삼았다. 흔들림 없이 기울어짐 없이 깨끗한 동작을 염두에 두고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무용수가 가진 몸의 특징을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재현할 수 없음’을 재현하는 장면들이다. 장애를 가진 무용수와 장애를 갖지 않은 무용수 두 명이 짝을 지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때로 장애가 없는 무용수는 장애가 있는 무용수의 발바닥, 평평하게 바닥을 딛지 못하는 발바닥을 흉내 내보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은 다리의 흔들림, 꼿꼿하게 서지 않는 기울어진 몸을 따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전혀 다르다. 몸들이 가진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누가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방이 되기도, 때로는 마치 전혀 다른 디렉션을 받은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극대화된 장면이 여섯 무용수가 무대 위 대각선에 열을 지어 늘어선 장면이다. 앞사람의 움직임이 뒷사람에게 전달되고, 또 그 뒷사람에게 전달하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앞사람의 움직임은 뒷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서로 다른 몸을 통해 작동하며 전혀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흔히 게임에서는 제일 앞사람과 제일 뒷사람의 전혀 다른 동작이나 말이 웃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만 <21° 11′>에서 보이는 하나의 시작에서 비롯한 전혀 다른 움직임의 연쇄는 그 자체로 사유적이고 시적이다. 안무라는 것이, 무용이라는 것이 단순히 디렉션에 의한 정확한 몸동작을 모방하고 복사하는 것이 아님을, 살아있는 몸과 무용수에 의해 해석되고 변형된다는 당연하고도 본질적인 명제를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몸이 그 자체로 서고 움직이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도.

오랜 시간 다양한 장애를 가진 예술가들과 몸, 언어 등 여러 매체를 경유하는 작업을 시도해온 노경애 작가는 이제 하나의 작은 결론에 이른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할 수 있고 누군가는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느 쪽이 옳고 아름다우며, 다른 한쪽이 그르고 보기 좋지 않다고 할 수 없다는 섭리를, 그간의 긴 여정이 이른 지점에서 증명해 보인다.

덧1. 이번 무대에 선 무용수들이 가진 장애는 뇌병변 장애이다.
덧2.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번 작품의 제목은 ‘기울어진 각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21° 11′

노경애-아트엘 | 2020.10.9.(금) ~ 10.10.(토) |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옵/신 페스티벌 2020(OB/SCENE Festival 2020)’ 참여작품. 뇌성마비 장애인은 비장애인과는 다른 움직임의 질감과 균형점을 가지고 있다. 근육의 경직이 독특한 움직임을 발생, 중심축이 휘어진 몸은 복잡한 균형점을 생성한다. <21° 11′>은 움직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에 집중한다. 단순한 동작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몸에 담겨 무한한 선의 움직임의 조합으로 확장될 때, 견고했던 몸과 움직임의 기준은 흔들린다.

고주영

[연극연습 프로젝트] [플랜Q] 등의 기획·제작을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바깥, 극장과 극장 바깥, 예술과 예술 바깥의 경계에 있고자 한다.
www.facebook.com/jooyoung.koh

사진. 박해욱
사진제공. 노경애-아트엘

2020년 11월 (15호)

상세내용

리뷰

노경애-아트엘 <21° 11′>

하나의 안무, 여럿의 몸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그 추상성으로 ‘악명’이 높은 현대무용 작품을 관객은 어떻게 감상할까. 물론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을 관람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크게 나누어보면,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움직임과 결합시켜 자기만의 서사로 구성하는 방식과, 어떤 연상의 힌트도 주지 않는 매우 중립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의 경우, 오로지 무대 위에 놓인 신체에 집중하며 서사보다는 감각을 작동시키고 결국은 몸 자체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공연이 끝난 뒤에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공연 <21° 11′>(21도 11분)의 경우, 완벽하게 후자의 방식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윽고 공연이 끝난 후 소위 ‘정상성’을 가진 몸은 무엇인가, 안무란 무엇일까, 라는 묵직한 질문을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게 떠안게 된다.

무대 위에는 여섯 명의 무용수가 있다. 키, 체격, 팔과 다리의 길이 등 몸의 조건은, 당연하게 저마다 다르다. 세 명의 무용수는 우리가 ‘장애’라고 부르는 몸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장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알지 못한다 해도 객석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세 무용수의 몸을 ‘장애’로 인식한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때로는 둘씩, 때로는 셋, 홀로, 그리고 어떤 장면에서는 여섯 명이 모두 함께, 안무 동작을 한다. 앉고, 서고, 눕고, 걷고, 뛰는 정도의 단순한 동작을 하지만, 몸의 조건이 모두 다르듯 누구든 할 줄 아는 그 기본적인 움직임의 양태나 질감은 모두 다르다. 어떤 무용수는 서고 앉을 때 쉽게 균형감을 잃기도 하고 불안정한 채 의도치 않은 리듬에 발을 내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안무의 잘못된 소화가 아니다. 안무가는 각자의 몸이 가진 특성,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을 안무로 삼았다. 흔들림 없이 기울어짐 없이 깨끗한 동작을 염두에 두고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무용수가 가진 몸의 특징을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재현할 수 없음’을 재현하는 장면들이다. 장애를 가진 무용수와 장애를 갖지 않은 무용수 두 명이 짝을 지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때로 장애가 없는 무용수는 장애가 있는 무용수의 발바닥, 평평하게 바닥을 딛지 못하는 발바닥을 흉내 내보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은 다리의 흔들림, 꼿꼿하게 서지 않는 기울어진 몸을 따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전혀 다르다. 몸들이 가진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누가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방이 되기도, 때로는 마치 전혀 다른 디렉션을 받은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극대화된 장면이 여섯 무용수가 무대 위 대각선에 열을 지어 늘어선 장면이다. 앞사람의 움직임이 뒷사람에게 전달되고, 또 그 뒷사람에게 전달하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앞사람의 움직임은 뒷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서로 다른 몸을 통해 작동하며 전혀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흔히 게임에서는 제일 앞사람과 제일 뒷사람의 전혀 다른 동작이나 말이 웃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만 <21° 11′>에서 보이는 하나의 시작에서 비롯한 전혀 다른 움직임의 연쇄는 그 자체로 사유적이고 시적이다. 안무라는 것이, 무용이라는 것이 단순히 디렉션에 의한 정확한 몸동작을 모방하고 복사하는 것이 아님을, 살아있는 몸과 무용수에 의해 해석되고 변형된다는 당연하고도 본질적인 명제를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몸이 그 자체로 서고 움직이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도.

오랜 시간 다양한 장애를 가진 예술가들과 몸, 언어 등 여러 매체를 경유하는 작업을 시도해온 노경애 작가는 이제 하나의 작은 결론에 이른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할 수 있고 누군가는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느 쪽이 옳고 아름다우며, 다른 한쪽이 그르고 보기 좋지 않다고 할 수 없다는 섭리를, 그간의 긴 여정이 이른 지점에서 증명해 보인다.

덧1. 이번 무대에 선 무용수들이 가진 장애는 뇌병변 장애이다.
덧2.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번 작품의 제목은 ‘기울어진 각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21° 11′

노경애-아트엘 | 2020.10.9.(금) ~ 10.10.(토) |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옵/신 페스티벌 2020(OB/SCENE Festival 2020)’ 참여작품. 뇌성마비 장애인은 비장애인과는 다른 움직임의 질감과 균형점을 가지고 있다. 근육의 경직이 독특한 움직임을 발생, 중심축이 휘어진 몸은 복잡한 균형점을 생성한다. <21° 11′>은 움직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에 집중한다. 단순한 동작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몸에 담겨 무한한 선의 움직임의 조합으로 확장될 때, 견고했던 몸과 움직임의 기준은 흔들린다.

고주영

[연극연습 프로젝트] [플랜Q] 등의 기획·제작을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바깥, 극장과 극장 바깥, 예술과 예술 바깥의 경계에 있고자 한다.
www.facebook.com/jooyoung.koh

사진. 박해욱
사진제공. 노경애-아트엘

2020년 11월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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