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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지리산 편지

이음광장 꼼지락 지리산 산골살이

  • 최은주 작가
  • 등록일 2020-11-21
  • 조회수614

가을이 가득 찬 산마을 풍경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벼가 수확을 기다리는 다랑이논에서는 느긋한 포만감이 차오르고, 수확을 마친 과일나무는 총천연색으로 물들며 스치는 바람에도 바스락바스락 잎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는 울긋불긋한 붉은 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요란했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립니다. 마당을 점령했던 풀은 자라는 속도가 확연히 줄었습니다. 끝자락에 서늘한 기운을 담은 바람을 타고 가을이 조금씩 깊어지는 중입니다.

저는 지리산 자락에서 휠체어 타고 도자기를 빚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민박집 주인장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 많은 호명이 제가 살아온 시간이고 저의 역사인 셈이지요. 스물셋에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삶이 되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의 시간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궁금했던 도자기 만드는 법을 짧게나마 배워서 동네 친구와 꼬맹이들을 대상으로 선생님 노릇도 하고, 도자기를 빚으면서 생긴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지금 나무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을 느끼고 싶고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한 끼 밥과 쉼이 필요한 분들에겐 하루 묵어갈 수 있는 방 한 칸 내어주는 민박집 주인 노릇도 합니다.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산 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네요. 수도권 언저리에 살다가 어디든 자연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저질렀는데 돌아보면 잘했구나 싶습니다. 저에게 지리산 자락에 사는 건, 봄엔 매화와 벚꽃을 기다리며 산골 꽃피는 길을 찾아 돌아다니고, 여름엔 계곡 근처를 배회하며, 가을엔 온천지가 알록달록해지는 산자락을 돌아다니고, 겨울 눈 오는 날엔 창가에 앉아 휘몰아치는 눈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렇게 하루씩 사는 삶입니다.

너무 낭만적인 것만 말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요. 휠체어가 갈 수 없는 오르막 산길과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 태반이고, 병원도 멀리 있고, 마트도 멀리 있고,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기가 힘들죠. 불편한 걸 꼽자면 손가락을 다 접어도 모자라겠지만, 좋은 것을 찾자면 그 또한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전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누리고 감사하며, 불편한 것은 감수하거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헤쳐나가기도 합니다.

휠체어가 다니기엔 기반시설이 부족한 산골살이는 아주 많은 부분을 동네 지인과 친구들의 기꺼운 도움에 기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맑은 날 끝없이 짙푸른 하늘 보기,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보기, 계곡 물소리 듣기, 밤하늘 별 보기, 승용차가 갈 수 있는 산길 찾아다니기, 맛난 음식 만들어 좋은 동네 친구들이랑 나눠 먹기입니다. 요즘의 하루는 눈뜨면 밥해서 한술 뜨고, 흙을 주물럭거리며 이것저것을 만들다, 가을이 어디까지 왔나 동네 인근 단풍든 나무를 찾아다니며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아직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인 삶이라 생각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도 참 많았지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그 시간을 채우며 살아온 것 같아요.

  • 맑은 날 짙푸른 하늘바라기

  • 빈자리를 채우는 이와 나누는 시골밥상

휠체어를 타고도 도자 공예를 배울 곳이 있다는 동네 친구의 말을 듣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덤볐습니다. 너무 해보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도자 공예를 배울 때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만든 그릇에 담아서 예쁘게 차려놓고 먹고 싶다! 휠체어를 타고 도자 공예를 배우는 2년여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도움과 배려, 저의 욕심 많은 열정이 더해져 가능했습니다. 기를 쓰고 악착같이 배워서 지금은 소량이지만 판매도 하고, 전시회도 열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생님 역할도 하며 잘 써먹고 있지요. 물론 제일 좋은 건 제가 쓸 그릇을 양껏 만들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간혹 이게 그릇인가 무기인가 싶게 무겁기도 했지만, 지금은 제가 만든 도자기에 찬을 담아 밥상을 차리면 제법 그럴듯해 보입니다. 좀더 그럴듯한 도자기를 고민하다 그림을 도자기에 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 지 25여 년,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산 지 10여 년, 도자 공예를 시작한 지 8년, 작정하고 그림을 그린 지 1년. 25년 전 처음 휠체어를 탈 당시에는 제 삶이 이렇게 될 거라곤 1도 상상하지 못했었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찾아서 하루씩 살아온 시간이 저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았네요. 미련과 후회보다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에 눈길을 더 주려 애썼던 시간인데, 지금 여기에 있는 제가 스스로는 꽤 만족스럽습니다.

처음 만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제 삶을 보여드리는 게 좋을 듯해서 구구절절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다음에는 저의 나무 그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의 삶이 안온하기를 바라며, 금새 사라질 찬란한 가을 하늘과 햇살을 누리는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지리산 무검산방과 꼼지락공방 주인장 최은주 드림.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상세내용

가을이 가득 찬 산마을 풍경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벼가 수확을 기다리는 다랑이논에서는 느긋한 포만감이 차오르고, 수확을 마친 과일나무는 총천연색으로 물들며 스치는 바람에도 바스락바스락 잎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는 울긋불긋한 붉은 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요란했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립니다. 마당을 점령했던 풀은 자라는 속도가 확연히 줄었습니다. 끝자락에 서늘한 기운을 담은 바람을 타고 가을이 조금씩 깊어지는 중입니다.

저는 지리산 자락에서 휠체어 타고 도자기를 빚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민박집 주인장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 많은 호명이 제가 살아온 시간이고 저의 역사인 셈이지요. 스물셋에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삶이 되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의 시간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궁금했던 도자기 만드는 법을 짧게나마 배워서 동네 친구와 꼬맹이들을 대상으로 선생님 노릇도 하고, 도자기를 빚으면서 생긴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지금 나무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을 느끼고 싶고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한 끼 밥과 쉼이 필요한 분들에겐 하루 묵어갈 수 있는 방 한 칸 내어주는 민박집 주인 노릇도 합니다.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산 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네요. 수도권 언저리에 살다가 어디든 자연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저질렀는데 돌아보면 잘했구나 싶습니다. 저에게 지리산 자락에 사는 건, 봄엔 매화와 벚꽃을 기다리며 산골 꽃피는 길을 찾아 돌아다니고, 여름엔 계곡 근처를 배회하며, 가을엔 온천지가 알록달록해지는 산자락을 돌아다니고, 겨울 눈 오는 날엔 창가에 앉아 휘몰아치는 눈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렇게 하루씩 사는 삶입니다.

너무 낭만적인 것만 말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요. 휠체어가 갈 수 없는 오르막 산길과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 태반이고, 병원도 멀리 있고, 마트도 멀리 있고,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기가 힘들죠. 불편한 걸 꼽자면 손가락을 다 접어도 모자라겠지만, 좋은 것을 찾자면 그 또한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전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누리고 감사하며, 불편한 것은 감수하거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헤쳐나가기도 합니다.

휠체어가 다니기엔 기반시설이 부족한 산골살이는 아주 많은 부분을 동네 지인과 친구들의 기꺼운 도움에 기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맑은 날 끝없이 짙푸른 하늘 보기,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보기, 계곡 물소리 듣기, 밤하늘 별 보기, 승용차가 갈 수 있는 산길 찾아다니기, 맛난 음식 만들어 좋은 동네 친구들이랑 나눠 먹기입니다. 요즘의 하루는 눈뜨면 밥해서 한술 뜨고, 흙을 주물럭거리며 이것저것을 만들다, 가을이 어디까지 왔나 동네 인근 단풍든 나무를 찾아다니며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아직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인 삶이라 생각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도 참 많았지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그 시간을 채우며 살아온 것 같아요.

  • 맑은 날 짙푸른 하늘바라기

  • 빈자리를 채우는 이와 나누는 시골밥상

휠체어를 타고도 도자 공예를 배울 곳이 있다는 동네 친구의 말을 듣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덤볐습니다. 너무 해보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도자 공예를 배울 때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만든 그릇에 담아서 예쁘게 차려놓고 먹고 싶다! 휠체어를 타고 도자 공예를 배우는 2년여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도움과 배려, 저의 욕심 많은 열정이 더해져 가능했습니다. 기를 쓰고 악착같이 배워서 지금은 소량이지만 판매도 하고, 전시회도 열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생님 역할도 하며 잘 써먹고 있지요. 물론 제일 좋은 건 제가 쓸 그릇을 양껏 만들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간혹 이게 그릇인가 무기인가 싶게 무겁기도 했지만, 지금은 제가 만든 도자기에 찬을 담아 밥상을 차리면 제법 그럴듯해 보입니다. 좀더 그럴듯한 도자기를 고민하다 그림을 도자기에 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 지 25여 년,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산 지 10여 년, 도자 공예를 시작한 지 8년, 작정하고 그림을 그린 지 1년. 25년 전 처음 휠체어를 탈 당시에는 제 삶이 이렇게 될 거라곤 1도 상상하지 못했었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찾아서 하루씩 살아온 시간이 저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았네요. 미련과 후회보다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에 눈길을 더 주려 애썼던 시간인데, 지금 여기에 있는 제가 스스로는 꽤 만족스럽습니다.

처음 만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제 삶을 보여드리는 게 좋을 듯해서 구구절절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다음에는 저의 나무 그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의 삶이 안온하기를 바라며, 금새 사라질 찬란한 가을 하늘과 햇살을 누리는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지리산 무검산방과 꼼지락공방 주인장 최은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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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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