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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코드로 미디어 읽기

이음광장 불쌍하거나 불편하거나

  • 차미경 작가
  • 등록일 2020-11-23
  • 조회수615

장애 있는 사람치고 지하철이나 사람 많은 장소에서 행인들에게 동전 몇 푼 못 받아본 사람 별로 없고 사탕 한 개쯤 얻어먹어 보지 못한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불쌍해서 주는 일명 적선인 셈인데, 종종 휠체어에 가만 앉아 있다 보면 누군가 와서 동전을 주고 가더라는 경험담을 요즘도 종종 듣곤 한다. 그뿐인가. 한없이 측은한 눈빛들, 쯧쯧쯧 혀 차는 소리 등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겪는 일상 중 하나다.

이렇게 장애인을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우리나라 상황만은 아닌가 보다. 외국 학자 보그단과 비클렌(Bogdan & Biklen)이 문학, 영화, TV 매체 등에 나타난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분류해 모두 열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그중 첫 번째 유형이 ‘동정과 자선 대상’으로의 이미지다. 장애인을, 불쌍하고 딱한 처지의 사람으로 비장애인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 초등학생이 장애인을 인식하는 특징을 그림 검사를 통해 분류한 한 연구에서는, 장애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돌봄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 이웃이나 친구로서 직접 접촉한 경험이 있는 아이일수록 장애인을 독립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로 그렸으며 상호작용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볼 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직접적인 접촉이나 상호작용보다는 간접적인 경험이나 이미지를 통해 형성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고 형성하는 것은 주로 미디어의 영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TV 드라마나 영화, 광고 등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이미지들을 보아 왔는지 언뜻 떠올려 보더라도, 아이들이 왜 장애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떠올리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대부분의 모금방송에서 그려지는 불쌍하고 가난한 장애인의 모습이라든지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 어김없이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것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때로는 밀어줄 필요가 없는 전동휠체어를 타고서도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주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언젠가 한 지상파 방송의 대표적인 장애인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다가 화가 난 적이 있다. 지역사회 이웃을 위해 장애인들이 꾸민 연극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이는 실직을 하고 어떤 이는 성적을 비관하고 또 어떤 이는 실연을 슬퍼하는 등 다양한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다가가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위로라는 것이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너는 그런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 아니냐’는 것이 이 연극의 요점. 울먹이던 사람들이 그런 위로를 듣고는 갑자기 함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끝이 나는데, 정말이지 이게 무슨 장애에 대한 인식개선이며 위로인가 싶었다.

나는 저들보다 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값싼 위로의 기준이 왜 하필 장애인인가. 왜 행복이 ‘나보다 못한’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손쉽게 처방되는가. 내 행복에 대한 확신을 왜 늘 누군가를 넘어선 우월감을 확인한 후에야 갖게 되는가. 그리고 대부분 그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은 장애인이거나 소위 ‘가난한 이웃의 불행’인 경우가 많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 대부분의 비장애인 참여자가 발표한 소감을 들으며 속으로 무척 놀랐던 경험이 있다. 장애인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더라, 저 사람들은 장애를 가지고도 그렇게 사는데 나는 뭔가 싶어서 부끄럽더라,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생각하니 감사하더라…. 거의 이런 내용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같은 인간을 보고 새삼스런 깨달음인 양 장애인도 사람이구나 느끼는 것도 놀라운데, 장애인과의 비교를 통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느끼고 감사한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 소감을 들으면서 장애인인 나는 속으로 무척 불편한데 다른 비장애인 참가자들은 몹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미디어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현실을 쉽게 저편으로 금그어 밀어놓고 대상화하면서, 이편에 속한 사람들의 자기 위안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방식의 방송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류의 방송에서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이 그러하고, 장애인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방송들이 일반적으로 장애를 그리는 방식 역시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장애를 특별하게 다루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장애를 담는 방식도 대부분 그렇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2020, 감독 정연경)
[출처] 네이버 영화

최근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 〈나를 구하지 마세요〉의 한 장면이 보여준 다른 방식, 즉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꽤 인상 깊었다. 이 영화는 경제적 파탄으로 무너져내린 가정의 아이 선유와 선유네 반 아이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잘 조명한다. 이 아이들이 보여주는 선유를 향한 마음은 보는 내내 눈물겨웠다.

친구들은 어려운 형편에 사랑하는 아버지까지 안타깝게 잃은 선유를 잘 챙겨주고 싶었다. 선유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뭐든 나눠주고 싶지만 상처와 자격지심으로 꽁꽁 닫힌 선유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표현도 배려도 서툰 친구들이 곧 그 마음을 함께 나눌 방법을 찾아내는 지혜로움을 보면 정말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이란 바로, “이 초콜릿 너 먹어!”가 아니라 “우리 다 같이 나눠 먹을까?”로 주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초콜릿을 나눠주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먹는 친구가 되는 것. 그렇게 하면 선유는 불쌍한 아이로 다른 친구들과 동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그저 초콜릿을 함께 나눠 먹는 또래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누구도 불쌍하지 않다. 도와줘야 하는 대상은 아무도 없다. 그저 친구일 뿐.

미디어가 장애를 그릴 때도 그동안 그려온 방식과는 다른, 이런 멋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더는 불쌍하거나 불편한 저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함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상세내용

장애 있는 사람치고 지하철이나 사람 많은 장소에서 행인들에게 동전 몇 푼 못 받아본 사람 별로 없고 사탕 한 개쯤 얻어먹어 보지 못한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불쌍해서 주는 일명 적선인 셈인데, 종종 휠체어에 가만 앉아 있다 보면 누군가 와서 동전을 주고 가더라는 경험담을 요즘도 종종 듣곤 한다. 그뿐인가. 한없이 측은한 눈빛들, 쯧쯧쯧 혀 차는 소리 등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겪는 일상 중 하나다.

이렇게 장애인을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우리나라 상황만은 아닌가 보다. 외국 학자 보그단과 비클렌(Bogdan & Biklen)이 문학, 영화, TV 매체 등에 나타난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분류해 모두 열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그중 첫 번째 유형이 ‘동정과 자선 대상’으로의 이미지다. 장애인을, 불쌍하고 딱한 처지의 사람으로 비장애인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 초등학생이 장애인을 인식하는 특징을 그림 검사를 통해 분류한 한 연구에서는, 장애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돌봄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 이웃이나 친구로서 직접 접촉한 경험이 있는 아이일수록 장애인을 독립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로 그렸으며 상호작용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볼 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직접적인 접촉이나 상호작용보다는 간접적인 경험이나 이미지를 통해 형성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고 형성하는 것은 주로 미디어의 영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TV 드라마나 영화, 광고 등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이미지들을 보아 왔는지 언뜻 떠올려 보더라도, 아이들이 왜 장애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떠올리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대부분의 모금방송에서 그려지는 불쌍하고 가난한 장애인의 모습이라든지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 어김없이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것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때로는 밀어줄 필요가 없는 전동휠체어를 타고서도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주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언젠가 한 지상파 방송의 대표적인 장애인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다가 화가 난 적이 있다. 지역사회 이웃을 위해 장애인들이 꾸민 연극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이는 실직을 하고 어떤 이는 성적을 비관하고 또 어떤 이는 실연을 슬퍼하는 등 다양한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다가가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위로라는 것이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너는 그런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 아니냐’는 것이 이 연극의 요점. 울먹이던 사람들이 그런 위로를 듣고는 갑자기 함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끝이 나는데, 정말이지 이게 무슨 장애에 대한 인식개선이며 위로인가 싶었다.

나는 저들보다 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값싼 위로의 기준이 왜 하필 장애인인가. 왜 행복이 ‘나보다 못한’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손쉽게 처방되는가. 내 행복에 대한 확신을 왜 늘 누군가를 넘어선 우월감을 확인한 후에야 갖게 되는가. 그리고 대부분 그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은 장애인이거나 소위 ‘가난한 이웃의 불행’인 경우가 많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 대부분의 비장애인 참여자가 발표한 소감을 들으며 속으로 무척 놀랐던 경험이 있다. 장애인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더라, 저 사람들은 장애를 가지고도 그렇게 사는데 나는 뭔가 싶어서 부끄럽더라,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생각하니 감사하더라…. 거의 이런 내용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같은 인간을 보고 새삼스런 깨달음인 양 장애인도 사람이구나 느끼는 것도 놀라운데, 장애인과의 비교를 통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느끼고 감사한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 소감을 들으면서 장애인인 나는 속으로 무척 불편한데 다른 비장애인 참가자들은 몹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미디어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현실을 쉽게 저편으로 금그어 밀어놓고 대상화하면서, 이편에 속한 사람들의 자기 위안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방식의 방송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류의 방송에서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이 그러하고, 장애인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방송들이 일반적으로 장애를 그리는 방식 역시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장애를 특별하게 다루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장애를 담는 방식도 대부분 그렇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2020, 감독 정연경)
[출처] 네이버 영화

최근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 〈나를 구하지 마세요〉의 한 장면이 보여준 다른 방식, 즉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꽤 인상 깊었다. 이 영화는 경제적 파탄으로 무너져내린 가정의 아이 선유와 선유네 반 아이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잘 조명한다. 이 아이들이 보여주는 선유를 향한 마음은 보는 내내 눈물겨웠다.

친구들은 어려운 형편에 사랑하는 아버지까지 안타깝게 잃은 선유를 잘 챙겨주고 싶었다. 선유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뭐든 나눠주고 싶지만 상처와 자격지심으로 꽁꽁 닫힌 선유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표현도 배려도 서툰 친구들이 곧 그 마음을 함께 나눌 방법을 찾아내는 지혜로움을 보면 정말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이란 바로, “이 초콜릿 너 먹어!”가 아니라 “우리 다 같이 나눠 먹을까?”로 주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초콜릿을 나눠주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먹는 친구가 되는 것. 그렇게 하면 선유는 불쌍한 아이로 다른 친구들과 동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그저 초콜릿을 함께 나눠 먹는 또래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누구도 불쌍하지 않다. 도와줘야 하는 대상은 아무도 없다. 그저 친구일 뿐.

미디어가 장애를 그릴 때도 그동안 그려온 방식과는 다른, 이런 멋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더는 불쌍하거나 불편한 저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함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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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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