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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문화 정체성과 예술①

이음광장 수어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

  • 노선영 작가
  • 등록일 2022-09-28
  • 조회수960

1900년대 초, 사람들은 무성영화 속에서 보디랭귀지로 하나의 예술을 보여준 영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에게 열광했다. 커다란 중절모, 짧은 바지와 해진 구두에 지팡이를 들고 우스꽝스럽게 걸어가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당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전했다. 대중도 채플린의 연기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사일런트 필름(Silent Film)이라고도 불리는 흑백의 무성영화는 1920년대가 절정기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내놓은 활동사진의 신기술이 아직 소리와는 결합되지 못했던 시절, 무성영화는 음성언어의 지원 없이도 모든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창조한 매체 중 하나였다. 무성영화의 큰 매력은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사의 소리가 없어도 표정, 몸짓, 제스처를 통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무성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바로 무성 세계 속에서 시각 중심의 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며 사는 농인이다. 만일 채플린 작품 속에 수어가 나왔다면, 아마도 수어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열리지 않았을까? 복잡한 언어체계를 갖고 있지만, 변화무쌍한 표현력으로 분명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이다.

2022년 현재 무성영화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필자는 수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한국수화언어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을 통해 한국어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얻었고, 한국어의 보조수단이 아닌 독립된 고유 언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자 수어가 발전하고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바로 ‘수어 예술’이다. 수어도 언어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수어 시나 수어 문학, 수어 구연, 미디어아트, 뮤지컬, 연극, 연기부터 노래, 랩, 때로는 춤까지.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농문화나 수어 예술에 관한 연구 기반이 부족한 상황이다. 최근에야 수어 예술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논문이나 연구 자료에 ‘수어 예술’이라는 단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한편 수어 예술이 발전된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국립농인극단(National Theatre of the Deaf)’(링크)은 1967년 창단 이래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공연을 창작하고 있는 전문 극단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농인 극단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30여 개 나라에서 6,0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는 예술적 실험을 통한 수어 예술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다. 국립농인극단은 청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공연을 향유할 수 있도록 수어와 음성언어를 혼용하는 이중언어극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극단에게 비판이 제기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무대공연용 수어가 미학을 이유로 농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었고, 그 때문에 수어가 음성언어와 다른, ‘고유한 언어’라는 개념과 역할을 상실했다는 이유였다. 마치 외국 영화의 한국어 더빙 버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외국 작품을 자국어로 더빙할 경우 언어의 차이로 인해 배우의 입 모양과 대사가 어긋나고 자칫하면 의역을 넘어 오역될 수 있다. 이에 자막을 통해 번역을 제공하면 다수의 청인 관객이 불편하더라도 수어의 고유성이 보다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겠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현재도 국립농인극단은 딜레마 속에서 수어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계속 모색하는 중이다.

프랑스는 문화부의 지원으로 세계농예술축제 ‘클랑 더이 페스티벌(Festival Clin d'Oeil)’(링크)을 2003년부터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전 세계 농인이 제한 없이 예술을 마음껏 공유하고 퍼뜨릴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축제는 라이브 퍼포먼스, 스트리트아트, 영화 상영, 연극, 음악, 전시뿐만 아니라 강연과 청소년 워크숍까지 다채롭게 구성되어 농예술의 특색을 모두 누릴 수 있다.

향후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수어 예술이 중심이 되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농예술가의 자존감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수어 예술의 확대를 통해 대중의 인식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어 예술이 음성언어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나 새로운 생경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진정한 예술적 성공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 수어 예술이 또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 채플린이 헬렌 켈러와 직접 수어로 대화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을 펼쳤듯이 한국 농인 중 수어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진 또 하나의 멋진 수어 예술가가 탄생하기를 소망해본다.

  • 데프 웨스트 시어터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한 장면. 7명의 여성 배우가 같은 손동작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농인 극단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의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
사진 출처. 국립예술기금위원회 홈페이지(링크)

노선영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으로 글을 쓰고 미디어아트 작가로 활동한다. 저서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고요 속의 대화』 등을 썼고, 《고요 속의 대화(Whisper in Silence)》(2019), 《같은 사람, 다른 감각》(2020), 《고요 속의 대화(Dialogue in Silence)》(2021) 등 미디어아트 체험형 전시를 총괄 진행했다. ‘페스티벌 나다 2021 : 숨겨진 감각의 축제’(2021), 《헬로미디어아트展》(2020)에 미디어아트 작가로 참여했다.
souldeaf@naver.com

 
노선영

노선영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으로 글을 쓰고 미디어아트 작가로 활동한다. 저서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고요 속의 대화』 등을 썼고, 《고요 속의 대화(Whisper in Silence)》(2019), 《같은 사람, 다른 감각》(2020), 《고요 속의 대화(Dialogue in Silence)》(2021) 등 미디어아트 체험형 전시를 총괄 진행했다. ‘Festival NADA 2021 : 숨겨진 감각의 축제’(2021), 《헬로미디어아트전 프로젝션 맵핑》(2021)에 미디어아트 작가로 참여했다.
souldeaf@naver.com

상세내용

1900년대 초, 사람들은 무성영화 속에서 보디랭귀지로 하나의 예술을 보여준 영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에게 열광했다. 커다란 중절모, 짧은 바지와 해진 구두에 지팡이를 들고 우스꽝스럽게 걸어가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당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전했다. 대중도 채플린의 연기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사일런트 필름(Silent Film)이라고도 불리는 흑백의 무성영화는 1920년대가 절정기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내놓은 활동사진의 신기술이 아직 소리와는 결합되지 못했던 시절, 무성영화는 음성언어의 지원 없이도 모든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창조한 매체 중 하나였다. 무성영화의 큰 매력은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사의 소리가 없어도 표정, 몸짓, 제스처를 통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무성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바로 무성 세계 속에서 시각 중심의 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며 사는 농인이다. 만일 채플린 작품 속에 수어가 나왔다면, 아마도 수어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열리지 않았을까? 복잡한 언어체계를 갖고 있지만, 변화무쌍한 표현력으로 분명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이다.

2022년 현재 무성영화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필자는 수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한국수화언어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을 통해 한국어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얻었고, 한국어의 보조수단이 아닌 독립된 고유 언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자 수어가 발전하고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바로 ‘수어 예술’이다. 수어도 언어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수어 시나 수어 문학, 수어 구연, 미디어아트, 뮤지컬, 연극, 연기부터 노래, 랩, 때로는 춤까지.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농문화나 수어 예술에 관한 연구 기반이 부족한 상황이다. 최근에야 수어 예술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논문이나 연구 자료에 ‘수어 예술’이라는 단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한편 수어 예술이 발전된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국립농인극단(National Theatre of the Deaf)’(링크)은 1967년 창단 이래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공연을 창작하고 있는 전문 극단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농인 극단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30여 개 나라에서 6,0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는 예술적 실험을 통한 수어 예술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다. 국립농인극단은 청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공연을 향유할 수 있도록 수어와 음성언어를 혼용하는 이중언어극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극단에게 비판이 제기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무대공연용 수어가 미학을 이유로 농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었고, 그 때문에 수어가 음성언어와 다른, ‘고유한 언어’라는 개념과 역할을 상실했다는 이유였다. 마치 외국 영화의 한국어 더빙 버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외국 작품을 자국어로 더빙할 경우 언어의 차이로 인해 배우의 입 모양과 대사가 어긋나고 자칫하면 의역을 넘어 오역될 수 있다. 이에 자막을 통해 번역을 제공하면 다수의 청인 관객이 불편하더라도 수어의 고유성이 보다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겠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현재도 국립농인극단은 딜레마 속에서 수어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계속 모색하는 중이다.

프랑스는 문화부의 지원으로 세계농예술축제 ‘클랑 더이 페스티벌(Festival Clin d'Oeil)’(링크)을 2003년부터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전 세계 농인이 제한 없이 예술을 마음껏 공유하고 퍼뜨릴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축제는 라이브 퍼포먼스, 스트리트아트, 영화 상영, 연극, 음악, 전시뿐만 아니라 강연과 청소년 워크숍까지 다채롭게 구성되어 농예술의 특색을 모두 누릴 수 있다.

향후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수어 예술이 중심이 되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농예술가의 자존감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수어 예술의 확대를 통해 대중의 인식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어 예술이 음성언어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나 새로운 생경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진정한 예술적 성공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 수어 예술이 또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 채플린이 헬렌 켈러와 직접 수어로 대화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을 펼쳤듯이 한국 농인 중 수어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진 또 하나의 멋진 수어 예술가가 탄생하기를 소망해본다.

  • 데프 웨스트 시어터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한 장면. 7명의 여성 배우가 같은 손동작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농인 극단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의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
사진 출처. 국립예술기금위원회 홈페이지(링크)

노선영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으로 글을 쓰고 미디어아트 작가로 활동한다. 저서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고요 속의 대화』 등을 썼고, 《고요 속의 대화(Whisper in Silence)》(2019), 《같은 사람, 다른 감각》(2020), 《고요 속의 대화(Dialogue in Silence)》(2021) 등 미디어아트 체험형 전시를 총괄 진행했다. ‘페스티벌 나다 2021 : 숨겨진 감각의 축제’(2021), 《헬로미디어아트展》(2020)에 미디어아트 작가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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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14: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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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 발전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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