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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박재현 영화감독

인터뷰 소리 없는 영화로 세상에 말을 걸다

  • 허경 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등록일 2022-11-23
  • 조회수1577

인터뷰

영화를 통해 농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는 농인 영화감독 박재현을 만났다. 친구들과 재미 삼아 시작한 영화 제작과 상영회 일이 점점 커져 결국 운명이 된 것 같다는 그는, 수많은 농인 동료와 함께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고 싶은 영화가 많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 안에는 농인으로서 농문화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넘쳐난다. 그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 게 아니라) 보자.

영화를 만들고 데프미디어를 시작하기 이전의 삶이 궁금하다.

한국재활복지대학교 수화통역과 재학 시절에 우연히 교회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만들어보게 됐다. 독실한 신자인 친구와 약간 곁길로 빠지는 친구가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우리끼리 각본을 짜서 교회에서 하루 동안 촬영했고 내가 편집해서 영상을 완성했다. 그리고는 교회 예배가 끝난 후 다 같이 모여서 영상을 봤는데 다들 엄청 재미있어 했다. 친구들이 미소 지으며 영화를 보는 표정이 마음에 와닿았고, 그때부터 영화 만들기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 이후 농아인선교방송에서 VJ를 하게 되었고 이어서 한국농아방송(DBN)에서도 VJ로 활동했다. 촬영 보조나 행사 촬영, 편집 등을 하면서 일을 배웠고 이후 자립하고 독립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활동이 수화사랑카페 상영회로 연결되고 이후 데프미디어의 출발로 이어진 건가?

맞다. 그 후 뭔가 더 하고 싶던 중에 친구를 통해 수화사랑카페를 알게 되었고, 카페를 운영하시던 김현호 선교사님도 흔쾌히 받아주셔서 공간을 빌려 상영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10명 정도 모여서 영화를 봤는데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차츰 관객이 늘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잘 만들어서 일반 상업영화처럼 선보이고 싶은 욕심도 났다. 그래서 <그림의 떡>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하게 됐다. 입상은 못 했지만 나도 당당하게 다른 영화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느낀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고 더 잘 준비해서 전국을 다니며 작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그림의 떡>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다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면이 있었다. 상당히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자막이 있는 외국영화는 봐도 정작 한국영화들은 자막이 없어 볼 수가 없다는 것에 불만이 컸다. 그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홍대에서 촬영했는데, 벽화 속 인물들이 주인공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대화하는 느낌으로 만들었다. 농인으로서 수많은 차별을 받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구 하나 내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일이 없었다. 그 답답한 마음을 벽화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림의 떡> 이전의 영화들은 사실 습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인 감독들의 영화와 당당하게 경쟁하려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정말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서 만든 영화다. 이전 영화들은 다시 보면 부끄러운 것들도 많다. 영화를 누가 가르쳐주고 배운 게 아니라, 고맙게도 상영회에서 영화를 본 친구들이 부족한 점을 알려주면 고치려고 더 열심히 하면서 차츰 성장한 것 같다.

초기 영화들이 농인이 직면하는 상황이나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분노 같은 감정을 표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 작품들은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예전에는 주로 차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언젠가 일본의 한 농인영화제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많은 농인 감독을 만났고, 차별을 다룬 영화뿐만 아니라 기발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괴짜 같은 영화도 많이 만났다. 그때 시야가 확 넓어진 것 같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의 농인 영화 제작자들을 만나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시아농영화제를 기획해서 여러 농인 영화감독을 초대했다. 일본의 경우 원로 농인 영화감독도 있고 예전부터 선후배 영화인들이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문화가 있더라. 그 외 다른 나라에도 거장이 된 원로 선배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없지 않나. 혼자 배우고 혼자 걸어가는 상황이 힘들 때가 많았는데, 다른 나라,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면서 많은 힘이 됐다. 나도 우리나라 농인 영화계를 멋지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점점 커져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맞다.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일인데 <소리 없는 절규>를 수화사랑카페에서 꾸준히 상영하니까 갑자기 방송국에서 인터뷰하자고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거 잘 만들어야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 잘 만들고 있냐고 계속 물어보고…. 그러다 보니 이제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를 못 한다. 약간 ‘운명’같이 됐다.

영화 제작할 때 모든 스태프와 배우를 농인으로 구성하는데, 그렇게 작업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영화를 혼자 만들지는 않지 않나. 조직이 필요한데, 수화사랑카페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농인들이 모였고, “너 시간 있냐, 뭐 잘하냐” “나 좀 도와줘” 하면서 하나둘씩 모인 거다. 사회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모두가 공감하는 터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보자고 하면 또 모여서 도움 받고 하면서 만들었다. 배우를 찾을 때도 누군가 잘생긴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면 찾아가 만나보고 같이 하자고 그랬다.

배우들 연기 지도는 어떤 식으로 했나?

미리미리 가르쳤다. 촬영을 시작하면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 장소 대관 시간도 제한이 있고. 그래서 대본도 미리 암기하게 하고 다른 장소에서 연습을 다 마친 후에 촬영 장소로 가곤 했다. 호흡이 모두 다 맞아야 촬영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는 편이다.

이야기의 소재나 모티브는 본인과 주변의 경험에서 가져오는 건가?

대부분 내 경험에서 시작됐고, 농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단초를 얻기도 했다. <소리 없는 절규>의 경우 내가 한 방송국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지원했다가 겪은 일이다. 당시 제작진이 엑스트라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아서 별문제 없이 촬영을 마쳤다. 나는 촬영은 어떻게 하는지, 조명과 구도는 어떻게 잡고 동선은 어떻게 짜는지 등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어서 엑스트라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다음 촬영 때는 왠일인지 접수할 때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더라. 그러다 내가 농인인 걸 알게 되자 무조건 안 된다면서 결국 나를 쫓아냈다. 그때 화가 엄청 났다. <꿈의 레스토랑>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할 때 느낀 것을 바탕으로 했다. 농인에게는 무조건 청소 아니면 설거지만 시킨다. 우리도 메뉴판을 보여주며 주문받고 서빙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담았다. <어느 애비의 삶>은 힘들게 돈벌이하며 살다가 어떤 일로 벌금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결국 자살을 택한 한 농인에 대한 언론 기사를 보고 만들었다.

<꿈의 레스토랑> 쿠키 영상에 담긴 농인 직원들이 일하는 인도의 한 레스토랑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인도 여행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를 만들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무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목표가 굉장히 분명했을 것 같다.

원래 촬영 목적이 아니고 진짜 그냥 편하게 여행 가려던 거였다. 사실 농인이 해외여행을 가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인도에 간다고 하자 너도나도 나선 거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그러다 출발 날짜가 가까워지니 하나씩 둘씩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다. 결국 나를 포함 세 명이 인도에 가게 됐는데, 여행만 갔다 오기가 아깝더라. 그 나라의 농문화, 농인의 삶, 수어, 이런 환경이 너무 궁금해서 일단 카메라를 가져갔다. 같이 간 친구들도 찍고 농인들도 만나고, 소개를 통해 그곳 협회도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농인 문화가 막 연결되었다. 여행에서 찍어온 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주니 다들 신기해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들의 농문화는 더더욱 몰랐는데, 영상으로 보여주니 꿈이 생기고, 그 이후로 주변의 농인들이 여행을 많이 가게 됐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서 한국 농문화와 한국 수어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부심도 커졌다. 농인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영화의 방향도 좀 바뀌었다.

일본에서의 경험과 인도 여행을 통해 보고 느낀 것들이 전환의 큰 계기가 된 것 같다.

우리는 다들 자신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나. 그게 자연스러운 질문이고. 나는 한국인이고 농인이니, 그 시작이 궁금해지더라. 수어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한국 농인들은 어떻게 모여서 이 조직과 사회를 만들어 왔는지.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고 농아인협회에도 자료가 없고 찾기가 너무 어렵더라. 어렵게 구한 것들은 다 일본 자료들이었다. (오영준 박사님 정보와 번역의 공이 컸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국의 농역사를 영상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자료를 찾고 수집하다가 발견한 게 조선의 농역사였다. 정창권 교수님이 쓴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담긴 농인 이야기가 지금 농인의 삶과 딱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의 농문화와 지금의 농문화가 사실 아주 비슷하다. 차이라면,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농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다르다는 거다. 그래서 <조선농역사>를 먼저 작업하게 됐다.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한국농역사>는 어떤 작품인가.

<조선농역사>를 작업하면서 원래 작업 중이던 <한국농역사>를 조금 미루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료도 더 모으고 인터뷰도 더 많이 했다. 총 네 편으로 완성했는데, 1부에는 가장 중요한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농인에 대한 교육이 잘 돼야 청인 사회와 맞설 힘도 생겨나는 거니까. 2부는 농인 모임의 시작과 농아인협회 조직의 시작을 다룬다. 3부는 사회, 4부는 인권을 다루고 있다. 네 편을 모두 DVD로 만들어서 전국 농아인협회와 농학교에 무료 배포했다. 남은 DVD들은 팔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데프미디어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제작한 영화를 배급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데프미디어는 그때그때 가능한 사람이 와서 도와주다가 사정이 있으면 떠나고, 또 새로운 사람이 와서 도와주다가 떠나고, 그렇다. 나만 고정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감독이고 책임자이니 망하게 둘 수는 없지 않나. 후원을 받거나 사업에 선정되어 영화도 만들고, 그러다 부족하면 내가 다른 데서 번 돈으로 충당하거나 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배급은 진짜 잘 모르겠다. 정말 예산만 있으면 만들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디어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다. 장애인 예술가에 대한 공적 지원이 너무 없다. 그나마 지원제도가 있어도 신청서류 쓰는 게 너무 어렵고 익숙지 않다 보니 지원서를 내도 떨어지고, 의욕도 떨어진다. 그래도 코로나 이후 수어통역사가 여러 공식 석상에서 발표자 옆자리에 함께하게 되면서 수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수어의 위상이 높아진 것 같다. 얼마 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농인 배우가 출연한 것도 좋았고. 이런 걸 계기로 대중의 관심이 커지니 농인으로서 자부심도 커졌다. 영화계에서도 농인 역할에 농인 당사자를 섭외하는 움직임이 많아져서 훌륭한 농인 배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창작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이 절실한 것 같다. 끝으로 웹진[이음]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농인이지만 다른 장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음]의 콘텐츠를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고, 정말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 수어라는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수어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분명히 농인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청인과 농인이 함께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 자료. 왼편에는 구름 뒤 해가 숨어있는 하늘 이미지가 있는 포스터, 오른편에는 인도 현지의 모습을 담은 다큐 속 장면들.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2009)

  • 다큐멘터리 <조선농역사> 자료. 왼편에는 관복을 입은 조선시대 관료의 이미지가 그려진 포스터, 오른편에는 민화 속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다큐멘터리 <조선농역사>(2014)

박재현

영화감독, 데프미디어 단장, 미디어활동가. 장애인방송아카데미와 한겨레영화연출학교를 수료하고, 기독교농아방송과 한국농아방송 VJ로 활동했다. 2006년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를 출범시켰고, 2008년 아시아농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20여 편이 넘는 영화 제작을 통해 농인의 인권보장과 장애인 인식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림의 떡>(2007), <데프 A.I>(2008), 데프인디아(2009), <조선농역사>(2014), <한국농역사> 4부작(2019)이 있다.
deafmedia@naver.com

허경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gomako1983@gmail.com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수어통역. 김주희
자료 제공. 박재현

2022년 12월 (37호)

상세내용

인터뷰

영화를 통해 농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는 농인 영화감독 박재현을 만났다. 친구들과 재미 삼아 시작한 영화 제작과 상영회 일이 점점 커져 결국 운명이 된 것 같다는 그는, 수많은 농인 동료와 함께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고 싶은 영화가 많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 안에는 농인으로서 농문화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넘쳐난다. 그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 게 아니라) 보자.

영화를 만들고 데프미디어를 시작하기 이전의 삶이 궁금하다.

한국재활복지대학교 수화통역과 재학 시절에 우연히 교회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만들어보게 됐다. 독실한 신자인 친구와 약간 곁길로 빠지는 친구가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우리끼리 각본을 짜서 교회에서 하루 동안 촬영했고 내가 편집해서 영상을 완성했다. 그리고는 교회 예배가 끝난 후 다 같이 모여서 영상을 봤는데 다들 엄청 재미있어 했다. 친구들이 미소 지으며 영화를 보는 표정이 마음에 와닿았고, 그때부터 영화 만들기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 이후 농아인선교방송에서 VJ를 하게 되었고 이어서 한국농아방송(DBN)에서도 VJ로 활동했다. 촬영 보조나 행사 촬영, 편집 등을 하면서 일을 배웠고 이후 자립하고 독립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활동이 수화사랑카페 상영회로 연결되고 이후 데프미디어의 출발로 이어진 건가?

맞다. 그 후 뭔가 더 하고 싶던 중에 친구를 통해 수화사랑카페를 알게 되었고, 카페를 운영하시던 김현호 선교사님도 흔쾌히 받아주셔서 공간을 빌려 상영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10명 정도 모여서 영화를 봤는데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차츰 관객이 늘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잘 만들어서 일반 상업영화처럼 선보이고 싶은 욕심도 났다. 그래서 <그림의 떡>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하게 됐다. 입상은 못 했지만 나도 당당하게 다른 영화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느낀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고 더 잘 준비해서 전국을 다니며 작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그림의 떡>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다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면이 있었다. 상당히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자막이 있는 외국영화는 봐도 정작 한국영화들은 자막이 없어 볼 수가 없다는 것에 불만이 컸다. 그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홍대에서 촬영했는데, 벽화 속 인물들이 주인공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대화하는 느낌으로 만들었다. 농인으로서 수많은 차별을 받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구 하나 내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일이 없었다. 그 답답한 마음을 벽화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림의 떡> 이전의 영화들은 사실 습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인 감독들의 영화와 당당하게 경쟁하려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정말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서 만든 영화다. 이전 영화들은 다시 보면 부끄러운 것들도 많다. 영화를 누가 가르쳐주고 배운 게 아니라, 고맙게도 상영회에서 영화를 본 친구들이 부족한 점을 알려주면 고치려고 더 열심히 하면서 차츰 성장한 것 같다.

초기 영화들이 농인이 직면하는 상황이나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분노 같은 감정을 표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 작품들은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예전에는 주로 차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언젠가 일본의 한 농인영화제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많은 농인 감독을 만났고, 차별을 다룬 영화뿐만 아니라 기발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괴짜 같은 영화도 많이 만났다. 그때 시야가 확 넓어진 것 같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의 농인 영화 제작자들을 만나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시아농영화제를 기획해서 여러 농인 영화감독을 초대했다. 일본의 경우 원로 농인 영화감독도 있고 예전부터 선후배 영화인들이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문화가 있더라. 그 외 다른 나라에도 거장이 된 원로 선배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없지 않나. 혼자 배우고 혼자 걸어가는 상황이 힘들 때가 많았는데, 다른 나라,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면서 많은 힘이 됐다. 나도 우리나라 농인 영화계를 멋지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점점 커져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맞다.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일인데 <소리 없는 절규>를 수화사랑카페에서 꾸준히 상영하니까 갑자기 방송국에서 인터뷰하자고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거 잘 만들어야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 잘 만들고 있냐고 계속 물어보고…. 그러다 보니 이제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를 못 한다. 약간 ‘운명’같이 됐다.

영화 제작할 때 모든 스태프와 배우를 농인으로 구성하는데, 그렇게 작업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영화를 혼자 만들지는 않지 않나. 조직이 필요한데, 수화사랑카페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농인들이 모였고, “너 시간 있냐, 뭐 잘하냐” “나 좀 도와줘” 하면서 하나둘씩 모인 거다. 사회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모두가 공감하는 터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보자고 하면 또 모여서 도움 받고 하면서 만들었다. 배우를 찾을 때도 누군가 잘생긴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면 찾아가 만나보고 같이 하자고 그랬다.

배우들 연기 지도는 어떤 식으로 했나?

미리미리 가르쳤다. 촬영을 시작하면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 장소 대관 시간도 제한이 있고. 그래서 대본도 미리 암기하게 하고 다른 장소에서 연습을 다 마친 후에 촬영 장소로 가곤 했다. 호흡이 모두 다 맞아야 촬영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는 편이다.

이야기의 소재나 모티브는 본인과 주변의 경험에서 가져오는 건가?

대부분 내 경험에서 시작됐고, 농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단초를 얻기도 했다. <소리 없는 절규>의 경우 내가 한 방송국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지원했다가 겪은 일이다. 당시 제작진이 엑스트라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아서 별문제 없이 촬영을 마쳤다. 나는 촬영은 어떻게 하는지, 조명과 구도는 어떻게 잡고 동선은 어떻게 짜는지 등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어서 엑스트라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다음 촬영 때는 왠일인지 접수할 때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더라. 그러다 내가 농인인 걸 알게 되자 무조건 안 된다면서 결국 나를 쫓아냈다. 그때 화가 엄청 났다. <꿈의 레스토랑>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할 때 느낀 것을 바탕으로 했다. 농인에게는 무조건 청소 아니면 설거지만 시킨다. 우리도 메뉴판을 보여주며 주문받고 서빙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담았다. <어느 애비의 삶>은 힘들게 돈벌이하며 살다가 어떤 일로 벌금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결국 자살을 택한 한 농인에 대한 언론 기사를 보고 만들었다.

<꿈의 레스토랑> 쿠키 영상에 담긴 농인 직원들이 일하는 인도의 한 레스토랑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인도 여행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를 만들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무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목표가 굉장히 분명했을 것 같다.

원래 촬영 목적이 아니고 진짜 그냥 편하게 여행 가려던 거였다. 사실 농인이 해외여행을 가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인도에 간다고 하자 너도나도 나선 거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그러다 출발 날짜가 가까워지니 하나씩 둘씩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다. 결국 나를 포함 세 명이 인도에 가게 됐는데, 여행만 갔다 오기가 아깝더라. 그 나라의 농문화, 농인의 삶, 수어, 이런 환경이 너무 궁금해서 일단 카메라를 가져갔다. 같이 간 친구들도 찍고 농인들도 만나고, 소개를 통해 그곳 협회도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농인 문화가 막 연결되었다. 여행에서 찍어온 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주니 다들 신기해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들의 농문화는 더더욱 몰랐는데, 영상으로 보여주니 꿈이 생기고, 그 이후로 주변의 농인들이 여행을 많이 가게 됐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서 한국 농문화와 한국 수어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부심도 커졌다. 농인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영화의 방향도 좀 바뀌었다.

일본에서의 경험과 인도 여행을 통해 보고 느낀 것들이 전환의 큰 계기가 된 것 같다.

우리는 다들 자신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나. 그게 자연스러운 질문이고. 나는 한국인이고 농인이니, 그 시작이 궁금해지더라. 수어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한국 농인들은 어떻게 모여서 이 조직과 사회를 만들어 왔는지.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고 농아인협회에도 자료가 없고 찾기가 너무 어렵더라. 어렵게 구한 것들은 다 일본 자료들이었다. (오영준 박사님 정보와 번역의 공이 컸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국의 농역사를 영상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자료를 찾고 수집하다가 발견한 게 조선의 농역사였다. 정창권 교수님이 쓴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담긴 농인 이야기가 지금 농인의 삶과 딱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의 농문화와 지금의 농문화가 사실 아주 비슷하다. 차이라면,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농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다르다는 거다. 그래서 <조선농역사>를 먼저 작업하게 됐다.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 수어를 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재현

<한국농역사>는 어떤 작품인가.

<조선농역사>를 작업하면서 원래 작업 중이던 <한국농역사>를 조금 미루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료도 더 모으고 인터뷰도 더 많이 했다. 총 네 편으로 완성했는데, 1부에는 가장 중요한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농인에 대한 교육이 잘 돼야 청인 사회와 맞설 힘도 생겨나는 거니까. 2부는 농인 모임의 시작과 농아인협회 조직의 시작을 다룬다. 3부는 사회, 4부는 인권을 다루고 있다. 네 편을 모두 DVD로 만들어서 전국 농아인협회와 농학교에 무료 배포했다. 남은 DVD들은 팔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데프미디어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제작한 영화를 배급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데프미디어는 그때그때 가능한 사람이 와서 도와주다가 사정이 있으면 떠나고, 또 새로운 사람이 와서 도와주다가 떠나고, 그렇다. 나만 고정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감독이고 책임자이니 망하게 둘 수는 없지 않나. 후원을 받거나 사업에 선정되어 영화도 만들고, 그러다 부족하면 내가 다른 데서 번 돈으로 충당하거나 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배급은 진짜 잘 모르겠다. 정말 예산만 있으면 만들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디어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다. 장애인 예술가에 대한 공적 지원이 너무 없다. 그나마 지원제도가 있어도 신청서류 쓰는 게 너무 어렵고 익숙지 않다 보니 지원서를 내도 떨어지고, 의욕도 떨어진다. 그래도 코로나 이후 수어통역사가 여러 공식 석상에서 발표자 옆자리에 함께하게 되면서 수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수어의 위상이 높아진 것 같다. 얼마 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농인 배우가 출연한 것도 좋았고. 이런 걸 계기로 대중의 관심이 커지니 농인으로서 자부심도 커졌다. 영화계에서도 농인 역할에 농인 당사자를 섭외하는 움직임이 많아져서 훌륭한 농인 배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창작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이 절실한 것 같다. 끝으로 웹진[이음]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농인이지만 다른 장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음]의 콘텐츠를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고, 정말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 수어라는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수어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분명히 농인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청인과 농인이 함께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 자료. 왼편에는 구름 뒤 해가 숨어있는 하늘 이미지가 있는 포스터, 오른편에는 인도 현지의 모습을 담은 다큐 속 장면들.

    다큐멘터리 <데프인디아>(2009)

  • 다큐멘터리 <조선농역사> 자료. 왼편에는 관복을 입은 조선시대 관료의 이미지가 그려진 포스터, 오른편에는 민화 속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다큐멘터리 <조선농역사>(2014)

박재현

영화감독, 데프미디어 단장, 미디어활동가. 장애인방송아카데미와 한겨레영화연출학교를 수료하고, 기독교농아방송과 한국농아방송 VJ로 활동했다. 2006년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를 출범시켰고, 2008년 아시아농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20여 편이 넘는 영화 제작을 통해 농인의 인권보장과 장애인 인식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림의 떡>(2007), <데프 A.I>(2008), 데프인디아(2009), <조선농역사>(2014), <한국농역사> 4부작(2019)이 있다.
deafmedia@naver.com

허경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gomako1983@gmail.com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수어통역. 김주희
자료 제공. 박재현

2022년 12월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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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4 10: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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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미있게 읽었어요. 조선농역사와 한국농역사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나요? 링크를 걸어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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