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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미츠 베를린’ 참관기

트렌드 한계 없는 예술가의 존재로 빛나는

  • 김유경, 이채현, 심예송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 등록일 2022-12-28
  • 조회수751

트렌트리포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지난 9월에 개최한 ‘2022 노리미츠인서울’ 탭톡 세션을 통해 해외 장애예술 동향을 소개하면서 국내에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공연예술 축제 ‘노리미츠 베를린(NO LIMITS-Disability & Performing Arts Festival Berlin)’(링크)을 포함한 독일의 장애예술을 들여다보았다.(주1) 한 기관에서만 매년 5~6개의 장애예술 축제를 개최하고, 또 30~40여 명의 장애예술인이 소속되어 30년 넘게 활동해온 여러 극단이 있다는 설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를린의 장애예술인은 어떤 토대에서 어떤 창작 활동을 하고 있을까?

노리미츠 베를린은 2005년 이후 격년으로 개최되는 독일의 대표적인 장애예술 축제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돌아와 10회를 맞이한 올해는 11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간 헤벨 암 우퍼, 람바참바 극장, 티크바 극장, 볼하우스 오스트, 펠드 극장에서 약 25편의 작품과 프로젝트로 50여 회의 공연을 선보였다. 우리는 11월 14일부터 19일까지 베를린을 방문해 공연과 포럼, 전시를 관람하고, 베를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활동해온 장애예술단체를 만나 독일 장애예술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장애예술의 토양을 가꿔온 레벤스힐페

노리미츠 베를린은 비영리기관인 레벤스힐페 쿤스트 운트 쿨투어 (Lebenshilfe Kunst und Kultur, 이하 레벤스힐페)(링크)에서 주최·주관한다. “장애예술가들이 무대 위와 무대 바깥에서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1996년 독일 마인츠에서 설립된 레벤스힐페는 1997년 독일 최초의 장애예술 축제 ‘그레첸로스 쿨투어(Grenzenlos Kultur)’를 개최했다. 이 축제는 일회성 행사로 출발했지만 큰 호응을 얻으며 지속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해나갔다. 이외에도 브레멘 지역의 ‘미텐망(Mitten Mang)’(링크), 거리예술 축제인 ‘부레바트(boulevART)’(링크)‘알레스 무스 라우스(ALLESS MUSS RAUS)’(링크)등 다수의 포용적인 공연예술 축제를 만들며 독일 전역에서 장애예술을 즐길 수 있는 토양을 다졌다.

축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악치온 멘쉬(Aktion Mensch)’라는 독일 복권기금의 지원으로 운영되며, 노리미츠 베를린의 경우 베를린 상원의회와 연방정부 문화·미디어부에서도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이러한 기금 모두 다년간의 지속적인 지원이 아니라 매번 심사를 통해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25년 넘게 축제를 만들어온 기관 또한 예산 확보 문제는 쉽지 않은 듯했다.

경계 없는 예술가들

세르비아에서 작가, 퍼포머, 안무가로 활동하는 나탈리야 블라디사블예비치(Natalija Vladisavljević)는 유럽 비욘드 액세스(Europe Beyond Access)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21세기의 춤(Dance in the 21st Century)>을 선보였다. “춤과 음악, 즉흥 연주가 있습니다. 음악 없는 현대무용도 있고, 춤 없는 현대무용도 있을 것입니다.” 공연은 어두운 무대에 오른 나탈리야의 낭독으로 시작됐다. 열 명 남짓한 무용수들은 형광등 조명이나 피아노줄 등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특정한 동작을 반복하거나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21세기의 춤’을 완성하는 것은 춤 자체보다도 춤에 관한 안무가의 관점이었다. “즉흥 연주는 우리에 관한 것, 무용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탈리야는 무대 한편에 앉아 공연 중간중간 춤과 움직임에 관한 문장을 낭독했다.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나탈리야는 본인과 같은 다운증후군 무용수에게 한 번 더 박수를 보내주길 요청하며, 무대 중앙에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를 쓰고 안무를 하는 것이 서로 영감을 준다는 나탈리야가 다음 작품에서 선보일 이야기와 움직임도 궁금해졌다.

2019년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에서 <조건>(리뷰 바로가기(링크))을 선보였던 댄 도우(Dan Daw)의 신작 <댄 도우 쇼(The Dan Daw Show)>도 만났다. 그는 동성 파트너와 함께 은밀한 지배와 복종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끄러움과 자부심의 양가감정을 표현했다. 가까이 올 것. 무릎을 꿇을 것. 수술대에 누워 움직이지 말 것.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지를 벗을 것. 파트너의 자못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명령에 따르는 댄 도우는 ‘신체 건강한 비장애인’에 복종하는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장애인’인 동시에 파트너와 롤플레이를 즐기는 성적 유희의 주체였다. 무대 위 댄 도우가 여러 겹의 레이어를 오가며 공연을 이끌 때, 관객들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숨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허를 찌르는 대화에 폭소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댄 도우는 공기를 넣어 부풀린 유니콘의 뿔, 혹은 거대한 갑옷 같기도 한 풍선 구조물을 입은 채 무대 중앙 핀 조명 아래 서서 관객의 갈채를 받으며 극을 마무리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목의 공연으로 축제의 폐막을 장식할만한,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2019년 ‘노리미츠 베를린’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오스트리아의 안무가이자 댄서, 연기자, 이론가로 활동하는 마이클 투린스키(Michael Turinsky) 또한
<때 묻은(Soiled)>으로 이번 축제를 찾았다. 완전한 암전 상태에서 20분가량 음악과 음성으로만 진행되던 무대 위 어둠이 걷히자 상의를 탈의한 무용수 3명이 누워있었다. 끊임없이 똑똑 떨어지는 어두운 색의 액체(호박씨 기름)를 맞으며 서로 몸을 맞대고 기어 다니며 미끄러지는 무용수의 몸은 의지와 관계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작품에 관한 단초는 포럼 ‘크립 애니멀을 위한 안무 정치학(Choreo-politics for the crip animal)’에서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마이클 투린스키는 ‘에이블리즘(Ableism)’을 기반으로 한 이분법적인 사회를 바꾸고자 하며, 지배적이고 절대적인 기존의 움직임을
탈조직화(de-organizing)하고 재편성(re-organizing)하여 새로운 의미의 생산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이미 구성된 현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움직임의 생태학적 관점을 제안하는 투린스키의 철학은, 공연 속 호박씨 기름으로 범벅이 된 무용수들의 비정형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난 듯했다. 느리게 발화하는 투린스키의 진행으로 포럼이 운영되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수어통역은 제공되었지만, 별도의 문자통역은 없었고, 관객은 자연스레 다른 속도로 귀 기울이며 투린스키의 발제를 들었다. 물론 사무국은 별다른 의도 없이 문자통역을 제공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영어로 진행되는 발제 내용에 때로는 독일 관객을 포함한 비영어권 관객이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자통역사라는 매개자가 아닌 발화자에 집중하는 당연한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오며, 서로 다른 감각을 지닌 개인 간 소통에 관한 고민을 남긴 자리였다.

나탈리야 블라디사블예비치, 댄 도우, 마이클 투린스키 모두 무대 위 퍼포머로서뿐만 아닌 작가, 안무가, 연출가로서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 속에서 장애인으로서의 감각은 중요하기도, 중요하지 않기도 했다. ‘노리미츠 베를린’의 특별함은 프로그램 그 자체보다도 프로그램의 중심에서 작업을 선보이는 장애예술인의 존재를 통해 느껴졌다. 덧붙여 평일을 포함한 6일간 8회의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객석이 매번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는 점도 놀라웠다. 특히 댄 도우, 마이클 투린스키의 공연은 티켓오픈 후 금세 매진을 기록했다. 장애예술인이 작업을 발표하고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토대에는 무엇보다 장애예술에 관한 두터운 관심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두운 무대 위, 네 명의 무용수가 뒤로 돌아선 채 각각 다른 높이와 방향으로 두 팔을 뻗었다. 왼편에는 악보가 놓인 피아노가 있다.

    <21세기의 춤>
    촬영. Marija Erdelj

  • 어두운 무대 위 마이크를 든 두 사람. 한 사람이 바닥에 왼손과 양 무릎을 대고 엎드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엎드린 사람 등 위로 양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댄 도우 쇼>
    촬영. Hugo Glendinning

  • 밝은 색이지만 거뭇거뭇하게 물감이 묻은 무대 바닥에, 검정색 타이즈 하의만 입은 세 사람의 몸이 마구 엉켜 있다.

    <때 묻은>
    촬영. Loizen Bauer

직업으로서의 예술창작 활동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노리미츠 베를린 협력 극장 중에는 장애인과 함께 오랜 기간 작업해온 곳이 있다. 티크바(Theater Thikwa)(링크)람바참바(RambaZamba Theater)(링크)는 주로 지적장애인 소속 예술가 30~40명과 30년 넘게 극단을 운영해왔다. 특히 티크바는 창작공간과 극장이 모두 베를린 시내에 위치해 있어서 예술감독 게르트 하트만의 안내로 공간을 둘러보며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장애·비장애 예술가가 함께 창작하는 독일 내 가장 유명한 극단 중 하나인 티크바는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분야에서 워크숍, 전시, 프로젝트 등의 활동을 한다. 티크바가 운영하는 극장은 2008년 개관한 독일 최초의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접근 가능한 배리어프리 공간으로, 매년 6여 편의 신작을 포함해 약 80회의 공연을 올린다. 티크바는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제작하는데, 2018년 마틴 린츠 연극상(Martin-Linzer-Theaterpreis ausgezeichnet)에 이어 2019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상 중 하나인 연방연극상(Theaterpreis des Bundes)을 수상하며 전문극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97년부터 북베를린 직장공동체 nbw(Nordberliner Werkgemeinschaft gGmbH)(주2)와 협력하여 운영되고 있는 티크바에는 현재 42명의 예술가와 7명의 직원, 그리고 nbw에서 파견된 직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소속 예술가는 정해진 시간에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주 35시간 활동한다. nbw에서 소속 예술가에게 급여를 제공하고 예술가는 그에 대한 노동으로서의 예술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후 만난 람바참바 또한 정부가 예술가에게 급여를 제공하고 직업 예술가로서 작업을 하는 구조라고 한다. 직업으로서의 예술 활동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은 민간 극단이 오랜 기간 많은 장애예술인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기반인 듯했다. 다만 급여는 낮은 수준(월 약 200유로, 한화 약 28만 원)이었는데, 게르트 하트만 예술감독은 장애인의 경우 주거 및 돌봄 등 정부에서 받는 지원이 커서 운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람바참바 대표는 이러한 급여 수준의 명백한 한계를 지적하며, 장애예술인이 보다 정당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

커다란 창고형 건물 2층에 위치한 티크바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회화, 조각, 텍스타일 등 여러 시각예술 작업에 사용되는 재료가 다양하고 풍성하게 갖춰져 있었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스타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게르트 하트만 예술감독은 장르부터 소재, 어디서 작업할지까지 모든 것은 예술가가 결정한다고 했다.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묻자 “티크바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모두 전문 예술가이기에 별도의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예술가 스스로 잠재된 재능을 찾아 작업할 수 있도록 움직임, 발성법, 요가, 연기법, 음악 등의 워크숍이 매일 진행되며, 예술가도 공연 같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수로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스튜디오 게시판엔 일주일간 진행되는 워크숍 스케줄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한창이었다. 티크바의 예술가들과 객원 비장애예술가가 협력하여 장애예술가 개개인의 성 경험을 주제로 애니메이션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 1년 반이 흘렀지만, 실제 그림을 그린 것은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데 꼬박 1년여를 보냈는데, 민감하거나 은밀할 수 있는 성 이야기를 공유하기까지 필요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작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의 경험을 모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상영회도 하고 영화제에도 출품할 예정이라면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만든 영상을 보여주었다. 성 경험이라는 주제, 그 주제에서 작업의 씨앗을 틔우기까지 서로 다른 모두의 속도를 존중하는 창작방식,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스튜디오의 시스템까지, 티크바가 오랜 기간 창작공간으로 지속해올 수 있는 일면을 포착한 순간이었다.

  • 벽과 기둥에 각종 조형물과 그림,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는 수공예 작업장. 길게 놓인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 각자 천과 실을 가지고 수공예를 하고 있다.

    티크바 스튜디오의 수공예 작업 모습

  • 연습실 안, 한쪽 벽에 설치된 높은 선반에는 각종 타악기 등이 채워져 있다. 넓은 공간에 여덟 명이 간격을 두고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티크바의 연습실 전경

주1. ‘2022 노리미츠인서울’ 탭톡 세션2 <통합을 넘어 융합을 꿈꾸는 독일 장애예술의 현주소: 독일 노리미츠 베를린> (바로가기(링크))

주2. nbw(Nordberliner Werkgemeinschaft gGmbH)는 독일 고용청의 승인을 받은 장애인을 위한 공인 작업장으로, 주로 북동 베를린에 위치한다. 최신 장비를 갖춘 다양한 작업장에서 여러 직업 훈련과 장소를 제공하며 장애인이 직장 생활과 지역사회에 참여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티크바도 nbw의 작업장(스튜디오) 중 하나이며, nbw 직원이 상주하며 극단 운영을 지원한다.
웹진이음ieum

김유경 전략기획부

이채현 전략기획부

심예송 예술지원부

사진 제공. 필자

2023년 1월 (38호)

상세내용

트렌트리포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지난 9월에 개최한 ‘2022 노리미츠인서울’ 탭톡 세션을 통해 해외 장애예술 동향을 소개하면서 국내에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공연예술 축제 ‘노리미츠 베를린(NO LIMITS-Disability & Performing Arts Festival Berlin)’(링크)을 포함한 독일의 장애예술을 들여다보았다.(주1) 한 기관에서만 매년 5~6개의 장애예술 축제를 개최하고, 또 30~40여 명의 장애예술인이 소속되어 30년 넘게 활동해온 여러 극단이 있다는 설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를린의 장애예술인은 어떤 토대에서 어떤 창작 활동을 하고 있을까?

노리미츠 베를린은 2005년 이후 격년으로 개최되는 독일의 대표적인 장애예술 축제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돌아와 10회를 맞이한 올해는 11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간 헤벨 암 우퍼, 람바참바 극장, 티크바 극장, 볼하우스 오스트, 펠드 극장에서 약 25편의 작품과 프로젝트로 50여 회의 공연을 선보였다. 우리는 11월 14일부터 19일까지 베를린을 방문해 공연과 포럼, 전시를 관람하고, 베를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활동해온 장애예술단체를 만나 독일 장애예술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장애예술의 토양을 가꿔온 레벤스힐페

노리미츠 베를린은 비영리기관인 레벤스힐페 쿤스트 운트 쿨투어 (Lebenshilfe Kunst und Kultur, 이하 레벤스힐페)(링크)에서 주최·주관한다. “장애예술가들이 무대 위와 무대 바깥에서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1996년 독일 마인츠에서 설립된 레벤스힐페는 1997년 독일 최초의 장애예술 축제 ‘그레첸로스 쿨투어(Grenzenlos Kultur)’를 개최했다. 이 축제는 일회성 행사로 출발했지만 큰 호응을 얻으며 지속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해나갔다. 이외에도 브레멘 지역의 ‘미텐망(Mitten Mang)’(링크), 거리예술 축제인 ‘부레바트(boulevART)’(링크)‘알레스 무스 라우스(ALLESS MUSS RAUS)’(링크)등 다수의 포용적인 공연예술 축제를 만들며 독일 전역에서 장애예술을 즐길 수 있는 토양을 다졌다.

축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악치온 멘쉬(Aktion Mensch)’라는 독일 복권기금의 지원으로 운영되며, 노리미츠 베를린의 경우 베를린 상원의회와 연방정부 문화·미디어부에서도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이러한 기금 모두 다년간의 지속적인 지원이 아니라 매번 심사를 통해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25년 넘게 축제를 만들어온 기관 또한 예산 확보 문제는 쉽지 않은 듯했다.

경계 없는 예술가들

세르비아에서 작가, 퍼포머, 안무가로 활동하는 나탈리야 블라디사블예비치(Natalija Vladisavljević)는 유럽 비욘드 액세스(Europe Beyond Access)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21세기의 춤(Dance in the 21st Century)>을 선보였다. “춤과 음악, 즉흥 연주가 있습니다. 음악 없는 현대무용도 있고, 춤 없는 현대무용도 있을 것입니다.” 공연은 어두운 무대에 오른 나탈리야의 낭독으로 시작됐다. 열 명 남짓한 무용수들은 형광등 조명이나 피아노줄 등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특정한 동작을 반복하거나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21세기의 춤’을 완성하는 것은 춤 자체보다도 춤에 관한 안무가의 관점이었다. “즉흥 연주는 우리에 관한 것, 무용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탈리야는 무대 한편에 앉아 공연 중간중간 춤과 움직임에 관한 문장을 낭독했다.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나탈리야는 본인과 같은 다운증후군 무용수에게 한 번 더 박수를 보내주길 요청하며, 무대 중앙에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를 쓰고 안무를 하는 것이 서로 영감을 준다는 나탈리야가 다음 작품에서 선보일 이야기와 움직임도 궁금해졌다.

2019년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에서 <조건>(리뷰 바로가기(링크))을 선보였던 댄 도우(Dan Daw)의 신작 <댄 도우 쇼(The Dan Daw Show)>도 만났다. 그는 동성 파트너와 함께 은밀한 지배와 복종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끄러움과 자부심의 양가감정을 표현했다. 가까이 올 것. 무릎을 꿇을 것. 수술대에 누워 움직이지 말 것.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지를 벗을 것. 파트너의 자못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명령에 따르는 댄 도우는 ‘신체 건강한 비장애인’에 복종하는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장애인’인 동시에 파트너와 롤플레이를 즐기는 성적 유희의 주체였다. 무대 위 댄 도우가 여러 겹의 레이어를 오가며 공연을 이끌 때, 관객들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숨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허를 찌르는 대화에 폭소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댄 도우는 공기를 넣어 부풀린 유니콘의 뿔, 혹은 거대한 갑옷 같기도 한 풍선 구조물을 입은 채 무대 중앙 핀 조명 아래 서서 관객의 갈채를 받으며 극을 마무리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목의 공연으로 축제의 폐막을 장식할만한,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2019년 ‘노리미츠 베를린’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오스트리아의 안무가이자 댄서, 연기자, 이론가로 활동하는 마이클 투린스키(Michael Turinsky) 또한
<때 묻은(Soiled)>으로 이번 축제를 찾았다. 완전한 암전 상태에서 20분가량 음악과 음성으로만 진행되던 무대 위 어둠이 걷히자 상의를 탈의한 무용수 3명이 누워있었다. 끊임없이 똑똑 떨어지는 어두운 색의 액체(호박씨 기름)를 맞으며 서로 몸을 맞대고 기어 다니며 미끄러지는 무용수의 몸은 의지와 관계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작품에 관한 단초는 포럼 ‘크립 애니멀을 위한 안무 정치학(Choreo-politics for the crip animal)’에서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마이클 투린스키는 ‘에이블리즘(Ableism)’을 기반으로 한 이분법적인 사회를 바꾸고자 하며, 지배적이고 절대적인 기존의 움직임을
탈조직화(de-organizing)하고 재편성(re-organizing)하여 새로운 의미의 생산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이미 구성된 현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움직임의 생태학적 관점을 제안하는 투린스키의 철학은, 공연 속 호박씨 기름으로 범벅이 된 무용수들의 비정형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난 듯했다. 느리게 발화하는 투린스키의 진행으로 포럼이 운영되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수어통역은 제공되었지만, 별도의 문자통역은 없었고, 관객은 자연스레 다른 속도로 귀 기울이며 투린스키의 발제를 들었다. 물론 사무국은 별다른 의도 없이 문자통역을 제공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영어로 진행되는 발제 내용에 때로는 독일 관객을 포함한 비영어권 관객이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자통역사라는 매개자가 아닌 발화자에 집중하는 당연한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오며, 서로 다른 감각을 지닌 개인 간 소통에 관한 고민을 남긴 자리였다.

나탈리야 블라디사블예비치, 댄 도우, 마이클 투린스키 모두 무대 위 퍼포머로서뿐만 아닌 작가, 안무가, 연출가로서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 속에서 장애인으로서의 감각은 중요하기도, 중요하지 않기도 했다. ‘노리미츠 베를린’의 특별함은 프로그램 그 자체보다도 프로그램의 중심에서 작업을 선보이는 장애예술인의 존재를 통해 느껴졌다. 덧붙여 평일을 포함한 6일간 8회의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객석이 매번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는 점도 놀라웠다. 특히 댄 도우, 마이클 투린스키의 공연은 티켓오픈 후 금세 매진을 기록했다. 장애예술인이 작업을 발표하고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토대에는 무엇보다 장애예술에 관한 두터운 관심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두운 무대 위, 네 명의 무용수가 뒤로 돌아선 채 각각 다른 높이와 방향으로 두 팔을 뻗었다. 왼편에는 악보가 놓인 피아노가 있다.

    <21세기의 춤>
    촬영. Marija Erdelj

  • 어두운 무대 위 마이크를 든 두 사람. 한 사람이 바닥에 왼손과 양 무릎을 대고 엎드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엎드린 사람 등 위로 양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댄 도우 쇼>
    촬영. Hugo Glendinning

  • 밝은 색이지만 거뭇거뭇하게 물감이 묻은 무대 바닥에, 검정색 타이즈 하의만 입은 세 사람의 몸이 마구 엉켜 있다.

    <때 묻은>
    촬영. Loizen Bauer

직업으로서의 예술창작 활동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노리미츠 베를린 협력 극장 중에는 장애인과 함께 오랜 기간 작업해온 곳이 있다. 티크바(Theater Thikwa)(링크)람바참바(RambaZamba Theater)(링크)는 주로 지적장애인 소속 예술가 30~40명과 30년 넘게 극단을 운영해왔다. 특히 티크바는 창작공간과 극장이 모두 베를린 시내에 위치해 있어서 예술감독 게르트 하트만의 안내로 공간을 둘러보며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장애·비장애 예술가가 함께 창작하는 독일 내 가장 유명한 극단 중 하나인 티크바는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분야에서 워크숍, 전시, 프로젝트 등의 활동을 한다. 티크바가 운영하는 극장은 2008년 개관한 독일 최초의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접근 가능한 배리어프리 공간으로, 매년 6여 편의 신작을 포함해 약 80회의 공연을 올린다. 티크바는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제작하는데, 2018년 마틴 린츠 연극상(Martin-Linzer-Theaterpreis ausgezeichnet)에 이어 2019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상 중 하나인 연방연극상(Theaterpreis des Bundes)을 수상하며 전문극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97년부터 북베를린 직장공동체 nbw(Nordberliner Werkgemeinschaft gGmbH)(주2)와 협력하여 운영되고 있는 티크바에는 현재 42명의 예술가와 7명의 직원, 그리고 nbw에서 파견된 직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소속 예술가는 정해진 시간에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주 35시간 활동한다. nbw에서 소속 예술가에게 급여를 제공하고 예술가는 그에 대한 노동으로서의 예술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후 만난 람바참바 또한 정부가 예술가에게 급여를 제공하고 직업 예술가로서 작업을 하는 구조라고 한다. 직업으로서의 예술 활동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은 민간 극단이 오랜 기간 많은 장애예술인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기반인 듯했다. 다만 급여는 낮은 수준(월 약 200유로, 한화 약 28만 원)이었는데, 게르트 하트만 예술감독은 장애인의 경우 주거 및 돌봄 등 정부에서 받는 지원이 커서 운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람바참바 대표는 이러한 급여 수준의 명백한 한계를 지적하며, 장애예술인이 보다 정당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

커다란 창고형 건물 2층에 위치한 티크바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회화, 조각, 텍스타일 등 여러 시각예술 작업에 사용되는 재료가 다양하고 풍성하게 갖춰져 있었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스타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게르트 하트만 예술감독은 장르부터 소재, 어디서 작업할지까지 모든 것은 예술가가 결정한다고 했다.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묻자 “티크바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모두 전문 예술가이기에 별도의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예술가 스스로 잠재된 재능을 찾아 작업할 수 있도록 움직임, 발성법, 요가, 연기법, 음악 등의 워크숍이 매일 진행되며, 예술가도 공연 같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수로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스튜디오 게시판엔 일주일간 진행되는 워크숍 스케줄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한창이었다. 티크바의 예술가들과 객원 비장애예술가가 협력하여 장애예술가 개개인의 성 경험을 주제로 애니메이션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 1년 반이 흘렀지만, 실제 그림을 그린 것은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데 꼬박 1년여를 보냈는데, 민감하거나 은밀할 수 있는 성 이야기를 공유하기까지 필요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작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의 경험을 모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상영회도 하고 영화제에도 출품할 예정이라면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만든 영상을 보여주었다. 성 경험이라는 주제, 그 주제에서 작업의 씨앗을 틔우기까지 서로 다른 모두의 속도를 존중하는 창작방식,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스튜디오의 시스템까지, 티크바가 오랜 기간 창작공간으로 지속해올 수 있는 일면을 포착한 순간이었다.

  • 벽과 기둥에 각종 조형물과 그림,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는 수공예 작업장. 길게 놓인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 각자 천과 실을 가지고 수공예를 하고 있다.

    티크바 스튜디오의 수공예 작업 모습

  • 연습실 안, 한쪽 벽에 설치된 높은 선반에는 각종 타악기 등이 채워져 있다. 넓은 공간에 여덟 명이 간격을 두고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티크바의 연습실 전경

주1. ‘2022 노리미츠인서울’ 탭톡 세션2 <통합을 넘어 융합을 꿈꾸는 독일 장애예술의 현주소: 독일 노리미츠 베를린> (바로가기(링크))

주2. nbw(Nordberliner Werkgemeinschaft gGmbH)는 독일 고용청의 승인을 받은 장애인을 위한 공인 작업장으로, 주로 북동 베를린에 위치한다. 최신 장비를 갖춘 다양한 작업장에서 여러 직업 훈련과 장소를 제공하며 장애인이 직장 생활과 지역사회에 참여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티크바도 nbw의 작업장(스튜디오) 중 하나이며, nbw 직원이 상주하며 극단 운영을 지원한다.
웹진이음ieum

김유경 전략기획부

이채현 전략기획부

심예송 예술지원부

사진 제공. 필자

2023년 1월 (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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