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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코드로 미디어 읽기

이음광장 장애인, 그냥 친구, 그냥 이웃, 그냥 사람

  • 차미경 작가
  • 등록일 2020-12-18
  • 조회수607

전시장에서 본 닥종이 공예가 서경숙 작가의 작품에서 떠올린 어린시절(이음갤러리, 2017) [사진출처] 필자 제공

초등학생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는 그림 조사(『그림검사를 활용한 초등학생의 장애인식 특징 분석』, 김수연·이대식, 2011)에서 아이들은 불특정 장애인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을 그릴 때 장애인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렸다는 의미 있는 결과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불특정한 장애인의 이미지를 그릴 때는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거나 심지어 괴물 같은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공부하는, 혹은 옆집에 사는 장애인일 때는 친구이고 이웃으로 그려진 것이다. 아서 샤피로(Arthur Shapiro)는 그의 저서를 통해 ‘흑인, 인디언 등 소수집단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들이 나와 같은 지역사회 일원으로 실재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Everybody belongs』, 1999). 편견을 없애는 데 직접 만나서 접촉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영화, 책,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미디어에 장애인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엄마가 살인죄로 감옥 가고 저를 동네 사람들이 키워줬어요. 동네 지나가면 밥 먹고 가라,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자고 가라, 심심할 텐데 놀다 가라…. 동네 사람들은 뭐 좋은 일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꼬맹이 하나를 그렇게 키웠어요. 당신 아들 영준이가 케이크 한 숟갈 푹 떠서 나한테 내밀었던 것처럼….”

최근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을 보다가 귀를 뚫고 마음으로 들어온 대사 중 하나다. 살인누명을 쓰고도 죄인처럼 숨어 사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가해자인 대한민국 초엘리트 집단과 맞서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살인누명 피해자 김두식이 자신의 재심을 위해 전심으로 애쓰는 박삼수 기자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묻자 박삼수가 하는 대답이었다.

박삼수는 어린 시절 애인이라는 사람의 폭력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간 엄마 때문에 살인자의 아들로 살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그 자신 역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피해자 김두식의 재심은 박삼수에게 특별한 의미다. 어린 시절 박삼수의 이웃 사람들이 그를 그저 무서운 살인자의 아들로 대했다면 그는 어쩌면 사람들에 대해 꽁꽁 언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그를 ‘살인자의 아들’로 대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아이’ ‘내 아들’처럼 아이의 끼니를 챙기고 잠자리를 챙기며 다 같이 키웠다. 그런 따뜻한 이웃의 돌봄 덕분에 박삼수는 사람의 따뜻함을 먼저 보고 정의에 눈 감지 않는 열혈 기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어린 시절 내 이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이웃들에게 ‘장애가 있는 아이’로 특별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걷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집 센 아이였던 나는 엄마가 두꺼운 천을 잘라 만들어준 검은 바지를 입고 온 동네를 기어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두 발로 걷고 나는 네 발로 걷는 게 다를 뿐, 기어 다니는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전혀 이상하거나 별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온 동네 흙바닥을 내 집처럼 기어 다니며 놀다가 친구들 따라 아무 집이나 들어가면 어떤 집에서는 마침 밥 먹을 참이었다며 밥상머리를 내주고 또 어떤 집에서는 씻고 있던 과일을 맛있는 간식으로 내주기도 했다. 기어다니면 어떻고 그러다 흙이 좀 묻으면 어떠랴,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이 대하듯 자연스럽게 나를 대해 주었다.

또 내 친구들은 어떤가 하면, 나를 언제나 일명 ‘깍두기’로 모든 놀이에 끼워주었다. 구슬치기 고무줄 술래잡기 이런 모든 놀이에서, 구슬치기를 좀 못해도 날렵하지 못해서 고무줄을 맨날 밟아도, 친구들이 나를 깍두기로 받아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기 위해서 하는 놀이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 나와 함께 노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나랑 놀았고, 내가 기어서 가지 못하는 곳은 친구들도 알아서 피해가며 그렇게 마을을 누비고 놀았다.

그런 친구들에게 이웃에게 나는 도와줘야 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내 장애 유형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도움을 미리 배우고 익혀야 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나를 그저 친구로, 우리 아이로 여겼던 그들은 결코 나를 못 걷던 애, 기어 다녔던 애, 장애가 있던 애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미경이’란 내 이름과 나와의 추억을 먼저 떠올려줄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는 말은 비단 일반적인 양육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데에도 역시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오랜 시설 생활 끝에 탈시설하여 지역에서 멋지게 자립을 이뤄내고 싶어 한 장애인들이 마을의 관심과 돌봄이 없어 다시 시설로 돌아가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편견으로 외면당하고 더불어 손 내밀어줄 ‘온 마을’이 없어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장애인도 있다. 경쟁이 아니라 함께 즐겁게 일궈가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깍두기’의 자리를 내어주는 ‘온 마을’이 없어 장애인이 함께 일하지 못한다.

내가 기어 다녔던 동네의 어른들은 아마도 길가에 뾰족하게 박힌 큰 돌멩이를 보면 ‘에구, 우리 미경이 기어가다 무릎 다칠라~’ 하고 치우지 않았을까. ‘장애인 배려’ ‘장애인 이해’ 같은 거창한 명목을 달지 않아도 아이가 기어 다니다 행여 다칠세라 염려했을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일일이 ‘장애’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시절’을 살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살인자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로 부모 없는 아이를 돌봤던 박삼수의 동네, ‘장애아’가 그냥 기어 다녀서라도 놀고 싶었던 활기찬 아이로 나를 대해주던 내 어린 시절 동네. 장애인에게도 그렇게 온 마을이 필요하다.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상세내용

전시장에서 본 닥종이 공예가 서경숙 작가의 작품에서 떠올린 어린시절(이음갤러리, 2017) [사진출처] 필자 제공

초등학생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는 그림 조사(『그림검사를 활용한 초등학생의 장애인식 특징 분석』, 김수연·이대식, 2011)에서 아이들은 불특정 장애인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을 그릴 때 장애인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렸다는 의미 있는 결과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불특정한 장애인의 이미지를 그릴 때는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거나 심지어 괴물 같은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공부하는, 혹은 옆집에 사는 장애인일 때는 친구이고 이웃으로 그려진 것이다. 아서 샤피로(Arthur Shapiro)는 그의 저서를 통해 ‘흑인, 인디언 등 소수집단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들이 나와 같은 지역사회 일원으로 실재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Everybody belongs』, 1999). 편견을 없애는 데 직접 만나서 접촉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영화, 책,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미디어에 장애인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엄마가 살인죄로 감옥 가고 저를 동네 사람들이 키워줬어요. 동네 지나가면 밥 먹고 가라,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자고 가라, 심심할 텐데 놀다 가라…. 동네 사람들은 뭐 좋은 일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꼬맹이 하나를 그렇게 키웠어요. 당신 아들 영준이가 케이크 한 숟갈 푹 떠서 나한테 내밀었던 것처럼….”

최근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을 보다가 귀를 뚫고 마음으로 들어온 대사 중 하나다. 살인누명을 쓰고도 죄인처럼 숨어 사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가해자인 대한민국 초엘리트 집단과 맞서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살인누명 피해자 김두식이 자신의 재심을 위해 전심으로 애쓰는 박삼수 기자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묻자 박삼수가 하는 대답이었다.

박삼수는 어린 시절 애인이라는 사람의 폭력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간 엄마 때문에 살인자의 아들로 살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그 자신 역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피해자 김두식의 재심은 박삼수에게 특별한 의미다. 어린 시절 박삼수의 이웃 사람들이 그를 그저 무서운 살인자의 아들로 대했다면 그는 어쩌면 사람들에 대해 꽁꽁 언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그를 ‘살인자의 아들’로 대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아이’ ‘내 아들’처럼 아이의 끼니를 챙기고 잠자리를 챙기며 다 같이 키웠다. 그런 따뜻한 이웃의 돌봄 덕분에 박삼수는 사람의 따뜻함을 먼저 보고 정의에 눈 감지 않는 열혈 기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어린 시절 내 이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이웃들에게 ‘장애가 있는 아이’로 특별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걷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집 센 아이였던 나는 엄마가 두꺼운 천을 잘라 만들어준 검은 바지를 입고 온 동네를 기어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두 발로 걷고 나는 네 발로 걷는 게 다를 뿐, 기어 다니는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전혀 이상하거나 별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온 동네 흙바닥을 내 집처럼 기어 다니며 놀다가 친구들 따라 아무 집이나 들어가면 어떤 집에서는 마침 밥 먹을 참이었다며 밥상머리를 내주고 또 어떤 집에서는 씻고 있던 과일을 맛있는 간식으로 내주기도 했다. 기어다니면 어떻고 그러다 흙이 좀 묻으면 어떠랴,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이 대하듯 자연스럽게 나를 대해 주었다.

또 내 친구들은 어떤가 하면, 나를 언제나 일명 ‘깍두기’로 모든 놀이에 끼워주었다. 구슬치기 고무줄 술래잡기 이런 모든 놀이에서, 구슬치기를 좀 못해도 날렵하지 못해서 고무줄을 맨날 밟아도, 친구들이 나를 깍두기로 받아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기 위해서 하는 놀이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 나와 함께 노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나랑 놀았고, 내가 기어서 가지 못하는 곳은 친구들도 알아서 피해가며 그렇게 마을을 누비고 놀았다.

그런 친구들에게 이웃에게 나는 도와줘야 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내 장애 유형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도움을 미리 배우고 익혀야 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나를 그저 친구로, 우리 아이로 여겼던 그들은 결코 나를 못 걷던 애, 기어 다녔던 애, 장애가 있던 애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미경이’란 내 이름과 나와의 추억을 먼저 떠올려줄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는 말은 비단 일반적인 양육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데에도 역시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오랜 시설 생활 끝에 탈시설하여 지역에서 멋지게 자립을 이뤄내고 싶어 한 장애인들이 마을의 관심과 돌봄이 없어 다시 시설로 돌아가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편견으로 외면당하고 더불어 손 내밀어줄 ‘온 마을’이 없어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장애인도 있다. 경쟁이 아니라 함께 즐겁게 일궈가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깍두기’의 자리를 내어주는 ‘온 마을’이 없어 장애인이 함께 일하지 못한다.

내가 기어 다녔던 동네의 어른들은 아마도 길가에 뾰족하게 박힌 큰 돌멩이를 보면 ‘에구, 우리 미경이 기어가다 무릎 다칠라~’ 하고 치우지 않았을까. ‘장애인 배려’ ‘장애인 이해’ 같은 거창한 명목을 달지 않아도 아이가 기어 다니다 행여 다칠세라 염려했을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일일이 ‘장애’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시절’을 살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살인자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로 부모 없는 아이를 돌봤던 박삼수의 동네, ‘장애아’가 그냥 기어 다녀서라도 놀고 싶었던 활기찬 아이로 나를 대해주던 내 어린 시절 동네. 장애인에게도 그렇게 온 마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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