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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지리산 편지

이음광장 다정함과 생명력에 기대어

  • 최은주 작가
  • 등록일 2021-02-09
  • 조회수770

창밖에는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토독토독 톡톡톡. 이제 봄이야, 얘들아! 이제 나와도 돼!’ 하는 듯 비가 내립니다. 집 가까이에 논밭이 있는 산골 동네는 경운기 소리와 거름 냄새로 봄이 옵니다. 마당에 심어둔 온갖 나무도 가지 끝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습니다. 붉은빛이 짙어지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꽃이 피어납니다. 꽃이 필 때까지 가지는 얼마나 빨개지던지, 꽃이 피기 전 나뭇가지가 붉어지는 게 아프고 예쁘고 저립니다. 명치끝이 체한 듯 아플 때면 할머니는 내 온몸을 주물러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려서 실로 묶고는 바늘로 툭 찌르면,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며 일순간 숨이 터지고 체증이 내려갑니다. 그렇듯 나무들도 겨울 동안 묵혀둔 기운을 가지 끝으로 몰아가며 붉어지다 툭 하고 꽃을 터트리는 것만 같습니다. 땅속 뿌리서부터 하늘에 닿을 저 가지 끝까지 기운을 모아 올리려 갖은 애를 쓰기에 숨을 참는 사람의 얼굴처럼 붉어지다 절명할 듯한 순간에 퍽 하고 꽃을 터트리며 환하게 흐드러집니다. 어제보다 짙어진 나뭇가지를 보며 하루씩 더 설레며 응원합니다.

햇살 투명한 날엔 동네 어귀 마을회관 앞에 고령의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앉아계십니다. 유독 춥고 많이 고립되었던 겨울이었기에 따뜻함이 반가워, 마스크를 쓰고 떨어져 앉아 있지만 다정함을 나눌만한 거리에서 서로에게 온기를 주고받고 계십니다. 코로나로 문을 열지 않은 마을회관을 앞에 두고 양지바른 마을길 언저리에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도 쳐다보다, 한해 농사는 또 어떻게 할지 얘기도 하고, 도회지 사는 자식들 길상사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길을 지나다 할머니들을 만나면 괜히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리기도 하고 왈칵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내게 한없이 다정한 눈길과 손길을 주셨던 내 할머니 생각도 납니다. 이 세상 떠나실 때의 모습도 너무도 순했던 할머니, 언젠가 맞을 나의 생의 끝 모습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싶게 할머니는 평화로이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뒷짐 진 손에 호미를 들고 길을 나섭니다.
“날도 쌀쌀한데 어디 가세요?”
“머이가 추워! 벌써 고사리밭에 풀이 천지삐까리로 올라왔어. 사부작 가볼라고. 애기엄마는 별일 없제?”
“네에. 조금만 일하다 들어가세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직 애기엄마라 불러주시는 동네 할머니.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인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라고 부를 땐 다정하고 곱고 부드러운 사랑이 묻어나오고, ‘할매’라고 부를 땐 아무도 말릴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생명력이 뿜어져 나옵니다. 심고 가꾸고 먹이고 키우고 살리고,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안하는 일이 없고, 뭐든 다 끌어안고 싸 짊어지고 거두고야 마는 어마어마한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우리의 현생은 할매의 창조적 생명력에, 할머니의 세상 다정한 자비심에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긴 세월 동안 휘고 꺾이고 부러지고 군데군데 생채기 투성이지만 너르게 펼쳐져 창창한 잎을 흔드는 마을 당산나무, 그 나무가 동네 할머니를 닮은 건지, 동네 할머니가 그 나무를 닮은 건지. 제겐 그 둘이 주는 느낌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할머니의 다정하고 너른 품과 할매의 씩씩하고 당당한 생명력을 제 나무 그림에 담고 싶은 게 요즘 저의 소망입니다. 오래 마음에 두고 살다 보면 손가락 끝에 묻어나려나요?

Respect for life, 45X38cm, 아크릴 (2021)

Dancing life, 45X33cm, 아크릴 (2021)

창밖에 보이는 산은 비구름에 지워졌다 나타나기를 열두 번도 더하다가 이제 시야가 선명해졌네요. 앞산이 가릴 정도로 비가 오면 집은 고립무원의 외딴집이 되었다가, 비구름이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동네 친구들 집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들의 풍경 같은 평온을 기원해봅니다.

다섯 번의 원고청탁을 받고 별다른 것 없이 그날이 그날인 양 살아가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벌써 마지막 글을 쓰게 되었네요. 남쪽 어느 동네에선 벌써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얘기가 들리고, 저는 금방이라도 그 동네를 찾아가야 할 듯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1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고 길어도 20년이면 스무 번밖에 못할 일인데 그렇다면 가야지, 하며 차의 시동을 겁니다. 내 사는 일에 이보다 더 중하고 지금 안 하면 안 될 일이 뭐가 있어 꽃 보러 안 갈 텐가 하면서 말이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도 사는 일이 너무 고되지 않고 잠깐씩은 아름다움을 쌓아가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리산자락에서 꼼지락 최은주 올림.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사진제공.필자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상세내용

창밖에는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토독토독 톡톡톡. 이제 봄이야, 얘들아! 이제 나와도 돼!’ 하는 듯 비가 내립니다. 집 가까이에 논밭이 있는 산골 동네는 경운기 소리와 거름 냄새로 봄이 옵니다. 마당에 심어둔 온갖 나무도 가지 끝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습니다. 붉은빛이 짙어지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꽃이 피어납니다. 꽃이 필 때까지 가지는 얼마나 빨개지던지, 꽃이 피기 전 나뭇가지가 붉어지는 게 아프고 예쁘고 저립니다. 명치끝이 체한 듯 아플 때면 할머니는 내 온몸을 주물러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려서 실로 묶고는 바늘로 툭 찌르면,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며 일순간 숨이 터지고 체증이 내려갑니다. 그렇듯 나무들도 겨울 동안 묵혀둔 기운을 가지 끝으로 몰아가며 붉어지다 툭 하고 꽃을 터트리는 것만 같습니다. 땅속 뿌리서부터 하늘에 닿을 저 가지 끝까지 기운을 모아 올리려 갖은 애를 쓰기에 숨을 참는 사람의 얼굴처럼 붉어지다 절명할 듯한 순간에 퍽 하고 꽃을 터트리며 환하게 흐드러집니다. 어제보다 짙어진 나뭇가지를 보며 하루씩 더 설레며 응원합니다.

햇살 투명한 날엔 동네 어귀 마을회관 앞에 고령의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앉아계십니다. 유독 춥고 많이 고립되었던 겨울이었기에 따뜻함이 반가워, 마스크를 쓰고 떨어져 앉아 있지만 다정함을 나눌만한 거리에서 서로에게 온기를 주고받고 계십니다. 코로나로 문을 열지 않은 마을회관을 앞에 두고 양지바른 마을길 언저리에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도 쳐다보다, 한해 농사는 또 어떻게 할지 얘기도 하고, 도회지 사는 자식들 길상사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길을 지나다 할머니들을 만나면 괜히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리기도 하고 왈칵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내게 한없이 다정한 눈길과 손길을 주셨던 내 할머니 생각도 납니다. 이 세상 떠나실 때의 모습도 너무도 순했던 할머니, 언젠가 맞을 나의 생의 끝 모습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싶게 할머니는 평화로이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뒷짐 진 손에 호미를 들고 길을 나섭니다.
“날도 쌀쌀한데 어디 가세요?”
“머이가 추워! 벌써 고사리밭에 풀이 천지삐까리로 올라왔어. 사부작 가볼라고. 애기엄마는 별일 없제?”
“네에. 조금만 일하다 들어가세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직 애기엄마라 불러주시는 동네 할머니.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인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라고 부를 땐 다정하고 곱고 부드러운 사랑이 묻어나오고, ‘할매’라고 부를 땐 아무도 말릴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생명력이 뿜어져 나옵니다. 심고 가꾸고 먹이고 키우고 살리고,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안하는 일이 없고, 뭐든 다 끌어안고 싸 짊어지고 거두고야 마는 어마어마한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우리의 현생은 할매의 창조적 생명력에, 할머니의 세상 다정한 자비심에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긴 세월 동안 휘고 꺾이고 부러지고 군데군데 생채기 투성이지만 너르게 펼쳐져 창창한 잎을 흔드는 마을 당산나무, 그 나무가 동네 할머니를 닮은 건지, 동네 할머니가 그 나무를 닮은 건지. 제겐 그 둘이 주는 느낌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할머니의 다정하고 너른 품과 할매의 씩씩하고 당당한 생명력을 제 나무 그림에 담고 싶은 게 요즘 저의 소망입니다. 오래 마음에 두고 살다 보면 손가락 끝에 묻어나려나요?

Respect for life, 45X38cm, 아크릴 (2021)

Dancing life, 45X33cm, 아크릴 (2021)

창밖에 보이는 산은 비구름에 지워졌다 나타나기를 열두 번도 더하다가 이제 시야가 선명해졌네요. 앞산이 가릴 정도로 비가 오면 집은 고립무원의 외딴집이 되었다가, 비구름이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동네 친구들 집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들의 풍경 같은 평온을 기원해봅니다.

다섯 번의 원고청탁을 받고 별다른 것 없이 그날이 그날인 양 살아가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벌써 마지막 글을 쓰게 되었네요. 남쪽 어느 동네에선 벌써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얘기가 들리고, 저는 금방이라도 그 동네를 찾아가야 할 듯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1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고 길어도 20년이면 스무 번밖에 못할 일인데 그렇다면 가야지, 하며 차의 시동을 겁니다. 내 사는 일에 이보다 더 중하고 지금 안 하면 안 될 일이 뭐가 있어 꽃 보러 안 갈 텐가 하면서 말이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도 사는 일이 너무 고되지 않고 잠깐씩은 아름다움을 쌓아가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리산자락에서 꼼지락 최은주 올림.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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