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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들

이슈 학습과 예술 사이, 목적 없는 지대

  • 김지영 미술작가
  • 등록일 2021-01-28
  • 조회수617

이슈

학습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들

학습과 예술 사이, 목적 없는 지대

김지영 미술작가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원활하게 할 수 없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거부한다.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2~3시간씩 정기적으로 만나 미술 재료로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한다. 이 모습이 겉보기엔 예술을 배우고 익히는 활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배우고 익히기 위해 혹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 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학습의 탈을 쓰고 있지만 학습하지 않고 예술가를 꿈꾸지 않는 우리는 그렇다면 매주 만나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1.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A는 잡지와 풀, 가위를 양손 가득 안고 와 책상에 내던지듯 펼쳐놓는다. A는 언어장애가 있어 우리가 평소 나눌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잡지를 넘기다가 A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면 내가 가위로 자르고 A는 풀칠한다. A가 풀칠한 곳에 나는 사진을 붙인다. A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수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고 싶은 공간을 가상으로 꾸미는 것 같기도 하다. 겹겹이 겹쳐지는 사람과 물건과 공간이 A의 세상을 채운다. 나는 A의 세상을 엿보고 있다.

2. 우리는 사귀고 있다 :

B는 얼마 전에 이사했다. 사람들에게 새로 이사한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하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우리는 B의 집으로 집들이를 가기로 했다. 저마다 36롤 화장지와 먹을거리, 직접 쓴 편지 등을 들고 B의 집으로 향했다. B의 집에 도착하니 B가 사람들을 위해 배달시킨 음식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음식을 나눠 먹고 B의 방을 구경하고 B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는다.

3. 우리는 놀고 있다 :

C는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 “짜증 나” “짜증 내지 마”를 혼잣말로 주고받으며 누군지 모를 환청과 싸우고 있다. 이럴 땐 C가 좋아하는 알앤비(R&B) 노래를 튼다. C는 환청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좋아하는 알앤비 노래를 들으며 열창한다. C보다 내가 더 흥이 올라 C의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거린다. C가 쏘아 올린 흥은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다들 한 소절씩 따라 불러 합창이 된다.

4. 우리는 서로의 둘레가 되어가고 있다 :

매시간 평범한 여자아이가 잘생긴 왕자님을 만나 어딘가로 떠나는 이야기를 쓰는 D에게 “왜 왕자님은 잘 생겨야 하죠?” “왕자님 없이 혼자서 떠날 수는 없나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페미니스트를 만나고,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고생대·중생대 공룡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는 E를 매주 만나러 가는 일상. 만난 적도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매주 만나 서로의 일상이 되고 둘레가 되어가고 있다.

학습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고 하거나 예술가가 되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학습과 예술 그 사이에 다양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성인 발달장애인이다. 20대 초반부터 50대를 훌쩍 넘긴 사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경계성, 경증, 중증까지 장애정도도 다양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갈 곳을 잃었거나, 직업훈련에 적응하지 못해 사회참여의 기회를 박탈당했거나, 10년 넘게 시설에 거주하고 있거나, 자립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사회에 의해서 이미 너무 많이 제한되고 결정되어버린 환경 안에서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원치 않게 과도한 학습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당연한 권리에서 제외당하기도 했다. 자기의 색연필을 가져본 적이 없고 마음껏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으며 자신의 표현에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그들에게 학습이나 예술이라는 틀을 먼저 꺼내 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선 존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당연한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둘레가 필요하다. 학습과 예술의 사이를 장애 당사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 속에서 스스로 학습과 예술의 사이를 넓히고 좁히며 자기주도적으로 학습 영역으로 갔다가 예술 영역으로 가기도 한다. 혹은 학습과 예술의 영역 어디에도 가지 않고 모든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의 표현도 자기결정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라고 묶어두지 않는 지대, 그 목적 없는 지대에 다양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장애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지영(백구)

사람들이 ‘백구’라고 부른다. 미술작업을 한다. 그림을 그리기보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중심보다 주변부를 좋아하고 미끄러짐으로써 넓어지려고 한다. 노들장애인야학과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발달장애인과 수업도 한다. 요즘은 다이애나랩이라는 콜렉티브에서 ‘차별없는가게’ ‘퍼레이드 진진진’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whitenightkim@gmail.com

2021년 2월 (18호)

상세내용

이슈

학습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들

학습과 예술 사이, 목적 없는 지대

김지영 미술작가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원활하게 할 수 없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거부한다.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2~3시간씩 정기적으로 만나 미술 재료로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한다. 이 모습이 겉보기엔 예술을 배우고 익히는 활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배우고 익히기 위해 혹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 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학습의 탈을 쓰고 있지만 학습하지 않고 예술가를 꿈꾸지 않는 우리는 그렇다면 매주 만나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1.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A는 잡지와 풀, 가위를 양손 가득 안고 와 책상에 내던지듯 펼쳐놓는다. A는 언어장애가 있어 우리가 평소 나눌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잡지를 넘기다가 A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면 내가 가위로 자르고 A는 풀칠한다. A가 풀칠한 곳에 나는 사진을 붙인다. A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수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고 싶은 공간을 가상으로 꾸미는 것 같기도 하다. 겹겹이 겹쳐지는 사람과 물건과 공간이 A의 세상을 채운다. 나는 A의 세상을 엿보고 있다.

2. 우리는 사귀고 있다 :

B는 얼마 전에 이사했다. 사람들에게 새로 이사한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하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우리는 B의 집으로 집들이를 가기로 했다. 저마다 36롤 화장지와 먹을거리, 직접 쓴 편지 등을 들고 B의 집으로 향했다. B의 집에 도착하니 B가 사람들을 위해 배달시킨 음식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음식을 나눠 먹고 B의 방을 구경하고 B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는다.

3. 우리는 놀고 있다 :

C는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 “짜증 나” “짜증 내지 마”를 혼잣말로 주고받으며 누군지 모를 환청과 싸우고 있다. 이럴 땐 C가 좋아하는 알앤비(R&B) 노래를 튼다. C는 환청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좋아하는 알앤비 노래를 들으며 열창한다. C보다 내가 더 흥이 올라 C의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거린다. C가 쏘아 올린 흥은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다들 한 소절씩 따라 불러 합창이 된다.

4. 우리는 서로의 둘레가 되어가고 있다 :

매시간 평범한 여자아이가 잘생긴 왕자님을 만나 어딘가로 떠나는 이야기를 쓰는 D에게 “왜 왕자님은 잘 생겨야 하죠?” “왕자님 없이 혼자서 떠날 수는 없나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페미니스트를 만나고,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고생대·중생대 공룡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는 E를 매주 만나러 가는 일상. 만난 적도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매주 만나 서로의 일상이 되고 둘레가 되어가고 있다.

학습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고 하거나 예술가가 되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학습과 예술 그 사이에 다양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매주 만나는 사람들은 성인 발달장애인이다. 20대 초반부터 50대를 훌쩍 넘긴 사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경계성, 경증, 중증까지 장애정도도 다양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갈 곳을 잃었거나, 직업훈련에 적응하지 못해 사회참여의 기회를 박탈당했거나, 10년 넘게 시설에 거주하고 있거나, 자립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사회에 의해서 이미 너무 많이 제한되고 결정되어버린 환경 안에서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원치 않게 과도한 학습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당연한 권리에서 제외당하기도 했다. 자기의 색연필을 가져본 적이 없고 마음껏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으며 자신의 표현에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그들에게 학습이나 예술이라는 틀을 먼저 꺼내 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선 존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당연한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둘레가 필요하다. 학습과 예술의 사이를 장애 당사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 속에서 스스로 학습과 예술의 사이를 넓히고 좁히며 자기주도적으로 학습 영역으로 갔다가 예술 영역으로 가기도 한다. 혹은 학습과 예술의 영역 어디에도 가지 않고 모든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의 표현도 자기결정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라고 묶어두지 않는 지대, 그 목적 없는 지대에 다양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장애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지영(백구)

사람들이 ‘백구’라고 부른다. 미술작업을 한다. 그림을 그리기보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중심보다 주변부를 좋아하고 미끄러짐으로써 넓어지려고 한다. 노들장애인야학과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발달장애인과 수업도 한다. 요즘은 다이애나랩이라는 콜렉티브에서 ‘차별없는가게’ ‘퍼레이드 진진진’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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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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