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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맺기와 동료성

이슈 불화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 등록일 2021-07-28
  • 조회수2227

이슈

관계 맺기와 동료성

불화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장애 예술 현장에서 매개의 기능과 매개자의 역할이 늘어난다는 것은 불평등한 장애인의 문화권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확대된다는 증거다. 제도가 장애와 예술의 매개자를 호명한다는 것은 장애와 예술의 접촉과 변화의 공간이 생성되는 것이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장애와 예술에 깊숙이 연루된 예술인의 고민과 이전과 다른 삶과 예술을 실천하는 장애 예술인의 경험을 담기에 관점의 해석은 충분하지 않다. 장애(운동)와 예술에는 쓸모와 가치의 증명을 거부하며 자격과 능력을 판단하려는 권력에 맞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힘으로 매개자가 장애와 예술에 연루된 관계를 맺을 때, 한정된 복지 서비스로 예술과 장애가 구획되는 것을 함께 막아낼 수 있다. 제도화된 공간에서 만났지만, 비제도화된 관계와 자원을 쌓음으로써 장애와 예술에 대한 다른 전략이 가능해진다.

시작은 거창했다. 이 거창함은 사소하고 단순한 과정의 반복으로 실현되며, 사소한 일로 미끄러지고 실패하기도 한다.

장애와 예술에 연루된 관계, 매개자

장애인과 작업하며 ‘기획자인지, 조력자인지, 활동지원사인지, 복지사인지, 보호자인지 혼란스럽다’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 장애인 동료와의 작업은 신체적·정신적으로 부딪히며 소통하고 지원해야 하는 ‘활동지원’이라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활동지원사와 동석하는 장애인이 다수지만, 매 순간 지원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순 없다. 한 장애 여성 배우는 “활동지원제도가 내 생존을 위해서는 필요한데, 다른 관계가 다 막혀버린 느낌”이라며 답답해했다. 사생활이 보장되기 어려운 장애인은 예술 활동 공간에서는 온전히 자유로운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장애가 있는 몸과 관계를 맺을 때 비장애인 매개자는 자신의 역할이 생각보다 광범위해지거나 장애인을 둘러싼 지원자, 보조자, 교사 등 주변인의 개입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장애인과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점과 방식의 필요성을 도전받게 될 수밖에 없다. 장애가 있는 매개자의 경우엔 오히려 역할을 의심받거나 축소되기도 할 것이다.

필자가 만난 장애인 동료들의 몸은 일생의 대부분을 지원받았던 경험으로 불편함을 티 안 내고 버티는 것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존엄함이 위협받는 순간을 참지 않는 분노도 동시에 있었다. 이 불편함과 인내, 분노를 표현하는 몸의 언어는 천차만별이라 알아차리기 힘들 때가 많다. 역할의 혼선과 과중함이 느껴질 땐 당사자와 이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갈등에 직면해야 한다. 당사자가 더 많이 참여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 발언이 공식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장애인 당사자가 의외로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걸 찾게 되면 예산과 지원 확대 싸움도 정당성도 커진다.)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지체장애 여성 활동가 진은선은 책 『시설사회』(공저)에서 발달장애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비발달장애인 중심의 현장에서 ‘동료성’에 대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발달장애인은 자기표현의 기회를 보장받고 지지받기보다는 안전을 위한 보호주의가 우세하여 통제적 관계와 한정된 네트워크에 놓인다. 시설에 감금되지 않아도 시설화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국가가 발달장애인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하는 한, 복지제도가 늘어나도 동료 시민으로 관계 맺고 살아갈 공간은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자율적 표현이나 주체적 소통과 협상의 경험이 제한적이고, 누군가 이를 전문성이나 보호로 대리하는 경우도 많다. 동료 시민으로 발달장애인을 만난 경험이 적고 일상에서 관계가 쌓이기 어려웠던 매개자는 발달장애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익혀야 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시설화와도 싸워야 한다. 발달장애인과 관계적 역량을 쌓는 동료이면서, 언제든 친밀한 통제자가 될 수 있는 긴장 구조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개자는 역량이 부족한 사람을 돕는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작과정에서 돌봄을 서로 배우고 지원하는 과정이 충분히 얘기되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창작과정에서 비장애 중심성을 해체하는 과정이 동료 되기를 가능하게 한다. 독립적 신체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해야 움직일 수 있는 협업으로 ‘관계적 역량’을 쌓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한낱이 말한 것처럼 “‘이 정도면 동등하다’는 섣부른 착각을 경계할 때, 오히려 예민하게 현장을 살필 수” 있다. “평등을 향해 끊임없이 수렴해갈 수는 있어도 끝내 도달할 수는 없다는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매개의 불확실성이 여는 세계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특권과 역사 해독을 문제시할 권리를 뜻한다. 나는 주장한다. 우리 자신을 상자 ― 극장의 ‘블랙박스’이건, 박물관의 순백의 냉방이 잘 되는 먼지 없는 박스이건 ― 안에 가둘 것이 아니라 일견 파괴적으로 보이는 ‘상자 너머’의 힘들에 우리를 개방하고 공과 사, 시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Bharucha, 2000: Mörsch and Chrusciel, 2012: 심보선, 2019 재인용)

심보선은 문화매개를 “확장과 환원, 성찰성과 전문성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유동하는 불확실한 실천이자 직무”라며 “문화매개의 불확실성이야말로 문화매개의 전문성을 다른 전문성과 구별하는 요건이 아닐까” 질문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정책이나 예술기관의 운영방식으로 구체화할 때 문화매개자는 정책이념과 운영지침을 수행하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다. 매개자가 제도 내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 고민을 심보선의 답으로 이어가 보자. 그는 이 불확실성으로 “예술계 바깥의 ‘다른 사회적 영역들, 개인들, 단체들과의 파트너십’ 강화”와 “필연적 혼란을 자유로운 탐색의 기회로 전유”하자고 한다. 이 불확실성이 초래하는 갈등과 긴장은 장애여성운동의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와 유사하다. 장애 예술이 정책 안에서 순수한 열정이나 선량한 시민 되기로 포섭되지 않기 위해선 이 불화가 필연적이다.

불화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제도를 활용하고 개입한다는 것은 예술과 운동이 가야 하는 본래적 의미를 실현하기 어렵게 하는 조건과 동거하는 것과 같다. 매개의 속성이 가지는 이 불확실성으로 장애예술 현장의 제도를 불화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매개와 매개자의 역할이 제도 안에서 명확하게 구조화될수록 반듯한 길을 얻는 대신 방향을 잃을지 모른다. 매개자를 위한 매뉴얼이 안내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함께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진 못한다. 긍정적인 예술교육과 프로그램의 성과를 증명해 내는 방식이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지 못했던 시간을 되짚는 크고 작은 실패가 쌓이는 공간이 되어 본다면 어떨까. 매개자를 위한 길 안내서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장애인의 특성과 매끄러운 프로그램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되지 않길 바란다. 이미 충분히, 장애인은 전문가 시장에서 대상화되고 있다.

[참고자료]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7기 위원,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이다. 장애여성 동료들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술과 운동에 참여한다.
rpvl72@gmail.com

2021년 8월 (22호)

상세내용

이슈

관계 맺기와 동료성

불화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장애 예술 현장에서 매개의 기능과 매개자의 역할이 늘어난다는 것은 불평등한 장애인의 문화권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확대된다는 증거다. 제도가 장애와 예술의 매개자를 호명한다는 것은 장애와 예술의 접촉과 변화의 공간이 생성되는 것이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장애와 예술에 깊숙이 연루된 예술인의 고민과 이전과 다른 삶과 예술을 실천하는 장애 예술인의 경험을 담기에 관점의 해석은 충분하지 않다. 장애(운동)와 예술에는 쓸모와 가치의 증명을 거부하며 자격과 능력을 판단하려는 권력에 맞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힘으로 매개자가 장애와 예술에 연루된 관계를 맺을 때, 한정된 복지 서비스로 예술과 장애가 구획되는 것을 함께 막아낼 수 있다. 제도화된 공간에서 만났지만, 비제도화된 관계와 자원을 쌓음으로써 장애와 예술에 대한 다른 전략이 가능해진다.

시작은 거창했다. 이 거창함은 사소하고 단순한 과정의 반복으로 실현되며, 사소한 일로 미끄러지고 실패하기도 한다.

장애와 예술에 연루된 관계, 매개자

장애인과 작업하며 ‘기획자인지, 조력자인지, 활동지원사인지, 복지사인지, 보호자인지 혼란스럽다’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 장애인 동료와의 작업은 신체적·정신적으로 부딪히며 소통하고 지원해야 하는 ‘활동지원’이라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활동지원사와 동석하는 장애인이 다수지만, 매 순간 지원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순 없다. 한 장애 여성 배우는 “활동지원제도가 내 생존을 위해서는 필요한데, 다른 관계가 다 막혀버린 느낌”이라며 답답해했다. 사생활이 보장되기 어려운 장애인은 예술 활동 공간에서는 온전히 자유로운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장애가 있는 몸과 관계를 맺을 때 비장애인 매개자는 자신의 역할이 생각보다 광범위해지거나 장애인을 둘러싼 지원자, 보조자, 교사 등 주변인의 개입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장애인과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점과 방식의 필요성을 도전받게 될 수밖에 없다. 장애가 있는 매개자의 경우엔 오히려 역할을 의심받거나 축소되기도 할 것이다.

필자가 만난 장애인 동료들의 몸은 일생의 대부분을 지원받았던 경험으로 불편함을 티 안 내고 버티는 것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존엄함이 위협받는 순간을 참지 않는 분노도 동시에 있었다. 이 불편함과 인내, 분노를 표현하는 몸의 언어는 천차만별이라 알아차리기 힘들 때가 많다. 역할의 혼선과 과중함이 느껴질 땐 당사자와 이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갈등에 직면해야 한다. 당사자가 더 많이 참여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 발언이 공식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장애인 당사자가 의외로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걸 찾게 되면 예산과 지원 확대 싸움도 정당성도 커진다.)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지체장애 여성 활동가 진은선은 책 『시설사회』(공저)에서 발달장애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비발달장애인 중심의 현장에서 ‘동료성’에 대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발달장애인은 자기표현의 기회를 보장받고 지지받기보다는 안전을 위한 보호주의가 우세하여 통제적 관계와 한정된 네트워크에 놓인다. 시설에 감금되지 않아도 시설화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국가가 발달장애인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하는 한, 복지제도가 늘어나도 동료 시민으로 관계 맺고 살아갈 공간은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자율적 표현이나 주체적 소통과 협상의 경험이 제한적이고, 누군가 이를 전문성이나 보호로 대리하는 경우도 많다. 동료 시민으로 발달장애인을 만난 경험이 적고 일상에서 관계가 쌓이기 어려웠던 매개자는 발달장애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익혀야 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시설화와도 싸워야 한다. 발달장애인과 관계적 역량을 쌓는 동료이면서, 언제든 친밀한 통제자가 될 수 있는 긴장 구조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개자는 역량이 부족한 사람을 돕는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작과정에서 돌봄을 서로 배우고 지원하는 과정이 충분히 얘기되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창작과정에서 비장애 중심성을 해체하는 과정이 동료 되기를 가능하게 한다. 독립적 신체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해야 움직일 수 있는 협업으로 ‘관계적 역량’을 쌓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한낱이 말한 것처럼 “‘이 정도면 동등하다’는 섣부른 착각을 경계할 때, 오히려 예민하게 현장을 살필 수” 있다. “평등을 향해 끊임없이 수렴해갈 수는 있어도 끝내 도달할 수는 없다는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매개의 불확실성이 여는 세계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특권과 역사 해독을 문제시할 권리를 뜻한다. 나는 주장한다. 우리 자신을 상자 ― 극장의 ‘블랙박스’이건, 박물관의 순백의 냉방이 잘 되는 먼지 없는 박스이건 ― 안에 가둘 것이 아니라 일견 파괴적으로 보이는 ‘상자 너머’의 힘들에 우리를 개방하고 공과 사, 시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Bharucha, 2000: Mörsch and Chrusciel, 2012: 심보선, 2019 재인용)

심보선은 문화매개를 “확장과 환원, 성찰성과 전문성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유동하는 불확실한 실천이자 직무”라며 “문화매개의 불확실성이야말로 문화매개의 전문성을 다른 전문성과 구별하는 요건이 아닐까” 질문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정책이나 예술기관의 운영방식으로 구체화할 때 문화매개자는 정책이념과 운영지침을 수행하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다. 매개자가 제도 내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 고민을 심보선의 답으로 이어가 보자. 그는 이 불확실성으로 “예술계 바깥의 ‘다른 사회적 영역들, 개인들, 단체들과의 파트너십’ 강화”와 “필연적 혼란을 자유로운 탐색의 기회로 전유”하자고 한다. 이 불확실성이 초래하는 갈등과 긴장은 장애여성운동의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와 유사하다. 장애 예술이 정책 안에서 순수한 열정이나 선량한 시민 되기로 포섭되지 않기 위해선 이 불화가 필연적이다.

불화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제도를 활용하고 개입한다는 것은 예술과 운동이 가야 하는 본래적 의미를 실현하기 어렵게 하는 조건과 동거하는 것과 같다. 매개의 속성이 가지는 이 불확실성으로 장애예술 현장의 제도를 불화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매개와 매개자의 역할이 제도 안에서 명확하게 구조화될수록 반듯한 길을 얻는 대신 방향을 잃을지 모른다. 매개자를 위한 매뉴얼이 안내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함께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진 못한다. 긍정적인 예술교육과 프로그램의 성과를 증명해 내는 방식이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지 못했던 시간을 되짚는 크고 작은 실패가 쌓이는 공간이 되어 본다면 어떨까. 매개자를 위한 길 안내서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장애인의 특성과 매끄러운 프로그램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되지 않길 바란다. 이미 충분히, 장애인은 전문가 시장에서 대상화되고 있다.

[참고자료]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7기 위원,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이다. 장애여성 동료들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술과 운동에 참여한다.
rpvl72@gmail.com

2021년 8월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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