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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로드킬 인 더 씨어터>

리뷰 심장을 때리는 메시지, 상상으로 채워지지 않는 이미지

  • 이성수 연극배우
  • 등록일 2021-12-29
  • 조회수1342

리뷰

까맸다. 무대도 배우들도 모두 새까맸다. 나에겐 그저 어두운 무대 위로 쉴 새 없이 그림자들만이 휙휙 달려가거나 혹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저승 같기도 하고 상갓집 같기도 한 검은 공간과 저승사자인 듯 상복인 듯 생각되는 검은 옷의 배우들. 굳이 검은색을 죽음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들. 그렇다. 이 연극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잔존시력이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도 ‘죽음’을 충분히 던져주는 검은 연극이었다. 무대와 의상뿐만이 아니었다. 고성, 외침, 절규. 배우들은 3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목이 터져라 크고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곡’을 하는 것인가? 절규하는 것인가? 검은 공간과 검은 옷에 대성통곡 같은 소리가 3시간 내내 이어지니 슬퍼하지 않으려 해도 슬펐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두려웠다.

죽음은 결국 그렇게 슬프고 두려운 것인가? 한때는 죽음 앞에 초연해지려 되도 않는 애를 써본 적이 있었다. 오만함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죽음 앞에 초연함이라니. 감당하지 못할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언젠가는 나 또한 죽으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마주한 죽음의 이야기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놓고 있던 나에게 커다랗고 검은 돌덩이 하나를 훅 던졌고,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자며 스스로를 달래는 순간 떠오르는 의문 하나.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먹먹하고 아픈 걸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도 아니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아플까? 답은 금세 나왔다. 연극 제목에도 있듯이 이 죽음은 ‘다이(die)’가 아니라 ‘킬(kill)’, 즉 타살이다. 원치 않는 죽음, 예상하지 못한 죽음,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어쩌면 폭력일지 모르는, 아니 폭력일 수밖에 없는 외부의 무언가에 의한 죽음. 죽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렇게 더 먹먹하고 아픈 것이라고. 킬링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가슴에 무수한 피해자들의,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던 찰나의, 죽음들이 쿵, 쿵, 쿵, 하고 떨어졌다. 때로는 가해자가 되고, 때로는 피해자가 되고, 또 때로는 방관자가 되었던 숱한 기억과 현재가 뒤엉키며 혼란스러웠다. 이 연극은 여전히 나의 심장을 때리고 있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눈과 귀의 고통이었다. 작품의 강력한 메시지가 마음을 힘들게 했다면, 눈과 귀의 고통은 저시력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고충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잔존시력을 혹사시켜가며 볼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보려 애썼으나 검은 그림자 외에는 보이지 않아서 눈은 눈대로 아프고 마음은 마음대로 답답했다. 공연 내내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성에 귀 또한 피로했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괴로운 공연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큰 극장이 좁고 무겁게 느껴졌으며, 얼른 공연이 끝나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죽음’에 대한 연극이 끝나는 순간, 나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깥 공기는 서울이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상쾌했다.

물살을 타듯, 순조로운 항해의 시작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뒤늦게 배리어프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적 요소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엔 분명 배리어프리적 요소가 있었다. 배우들이 자신의 행동을 말로 묘사하기도 하고 정해진 동작에 대한 신호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없었다. 왜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연극은 뒤로 갈수록 해설이나 묘사 그러니까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특별한 말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앞부분에 있었던 음성해설로 인해 시각장애인 관객으로서 배려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국립극단에서도 배리어프리 공연을 하는구나.”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소극장 공연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배리어프리 공연을 이제 제법 큰 무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드디어 국립극단에서도 장애인 배우가 출연하고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프리적 요소도 넣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다.

음성해설과 무대 등이 시각장애인 관객이 관람하기에 적절했는지 되짚어보았다. 앞서 말했듯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언어가 처음에는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슬쩍 사라졌다. 시각장애인 관객을 고려했다는 성의 표시 정도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해설 없이 진행된 후반부의 내용이 너무나 잘 전달되었다. 앞의 해설은 마중물 역할을 했던 것일까. 배를 띄워 놓고 그 배가 물살을 타는 데까지는 노를 저어주듯 해설이 들어가고, 안정적으로 물살을 타며 순조롭게 항해하면서부터는 굳이 힘들여 노를 저을 필요가 없듯, 그렇게 해설은 치고 빠졌다. 연출의 노련함일까.

뒤로 갈수록 더 강하게 대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였는지 점점 긴 대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더 이상 잔존시력을 혹사시키는 것을 멈추고 청각에 더 집중하며 대사를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애썼다. 그런데 그 순간 대사 사이사이로 쉼 없이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배우들의 움직임 소리였다. 달려가는 소리, 백스테이지에서 들려오는 소리, 업스테이지와 다운스테이지에서 들리는 소리 등등. 그 순간 새삼 느낀 것은 배우들은 역시 목소리로만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 큰 무대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들의 매 순간순간의 움직임이. 연극이 끝나고 나서야 드는,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억나는 대사들을 곱씹고, 충분히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며 자위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유효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연극을 시작할 때, 한 배우가 조명에 관해 미리 설명했다. 공연 중간에 크고 밝은 자극적인 조명이 한 번 있을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정보를 준 것이다. 아마도 나 같은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덕분에 그 조명이 나왔을 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른 조명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조명에 대해서는 별 의식 없이 관람했는데, 이 연극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각적인 연극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은은하고 약한 조명 혹은 단조로운 조명들이 여러 각도로 배우와 무대 곳곳을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비추었다는 것이다. 대사와 함께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이 이 연극을 관람하는 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조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은은한 조명이 그 특유의 느낌으로 어떻게 배우와 무대를 비추었을까? 그 모습을 보며 대사를 들었을 때 비장애인 혹은 정안인(시각장애가 없는 사람) 관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연극은 이미 끝난 후였다. 시각보다는 청각적으로 더 받을 것이 많다고 생각했던 연극은 알고 보니 어쩌면 시각적인 것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온통 검은색에 대사로 꽉 채워진 연극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아무리 잔존시력을 활용해도 결코 볼 수 없었던 은은한 조명들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제대로 허를 찔렸다. 연극은 이미 끝났고, 뒤늦은 상상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또 남았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배리어프리에 대한 나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한다.

모두가 즐기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

최근 공연계에서는 배리어프리에 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배리어프리 공연은 대부분 비장애인 중심으로 먼저 만든 후에 장애인 관객을 위해 배리어프리적 요소를 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연출가 등 참여 예술가의 의도와 작품성이 해설이나 자막 등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공들여 쌓은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다가 탑 전체가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비장애인 관객과 장애인 관객 모두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관객으로서 창작자로서 또 배리어프리에 관한 자문을 하는 입장에서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처음부터 장애인 관객을 고려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것이 모두에게 편리하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계단을 만들어놓고 나중에서야 한쪽 구석에 경사로를 깔면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사로를 만들면 휠체어 장애인, 시각장애인,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 모두에게 편리하다. 배리어프리 공연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이나 조명, 무대가 비장애인에게도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의 배리어프리가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 공연. 그것이 진정한 배리어프리가 아닐까? 물론 모든 공연이 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나의 장르로서 ‘배리어프리 공연’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된다면 장애인 창작자는 한층 더 자긍심을 가지고 임할 수 있을 것이고, 장애인 관객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꿈을 꾸고 있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국립극단 ∣ 2021.10.22.~11.14. ∣ 명동예술극장

구자혜 연출의 신작으로, 동물의 관점에서 인간의 시선을 비틀어보는 이 작품은 인간의 욕심으로 발생한 동물의 죽음 그 이면을 쫓는다. 독립을 위해 도로를 횡단하는 고라니, 평화사절단으로 날아간 비둘기들, 우주로 향한 잡종 개 라이카와 친구들. 길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진실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수어통역, 음성해설, 한글자막, 안내견 동반 입장 등 전 회차에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관객 누구나 안전하게 연극을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국립극단] 모두를 위한 이 밤의 라디오 |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 바로가기(링크)

이성수

저시력 시각장애 연극인. 2015년 1월 배리어프리 버전 뮤직드라마 <당신만이>를 통해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 장애인극단 다빈나오와 장애인문화예술 판을 거치며 꾸준히 공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6년 안은미컴퍼니와 함께한 퍼포먼스 공연 <안심댄스>는 이듬해인 2017년 유럽투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0set 프로젝트, 쿵짝프로젝트, 래빗홀씨어터 등과 협업했다. 최근에는 국립극단 ‘창작공감’ 강보름 연출팀의 다큐 연극 <소극장판-타지>에 출연했다.
hansole11@naver.com
페이스북 바로가기(링크)유튜브 바로가기(링크)

공연사진 제공. 국립극단

2022년 1월 (27호)

상세내용

리뷰

까맸다. 무대도 배우들도 모두 새까맸다. 나에겐 그저 어두운 무대 위로 쉴 새 없이 그림자들만이 휙휙 달려가거나 혹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저승 같기도 하고 상갓집 같기도 한 검은 공간과 저승사자인 듯 상복인 듯 생각되는 검은 옷의 배우들. 굳이 검은색을 죽음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들. 그렇다. 이 연극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잔존시력이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도 ‘죽음’을 충분히 던져주는 검은 연극이었다. 무대와 의상뿐만이 아니었다. 고성, 외침, 절규. 배우들은 3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목이 터져라 크고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곡’을 하는 것인가? 절규하는 것인가? 검은 공간과 검은 옷에 대성통곡 같은 소리가 3시간 내내 이어지니 슬퍼하지 않으려 해도 슬펐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두려웠다.

죽음은 결국 그렇게 슬프고 두려운 것인가? 한때는 죽음 앞에 초연해지려 되도 않는 애를 써본 적이 있었다. 오만함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죽음 앞에 초연함이라니. 감당하지 못할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언젠가는 나 또한 죽으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마주한 죽음의 이야기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놓고 있던 나에게 커다랗고 검은 돌덩이 하나를 훅 던졌고,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자며 스스로를 달래는 순간 떠오르는 의문 하나.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먹먹하고 아픈 걸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도 아니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아플까? 답은 금세 나왔다. 연극 제목에도 있듯이 이 죽음은 ‘다이(die)’가 아니라 ‘킬(kill)’, 즉 타살이다. 원치 않는 죽음, 예상하지 못한 죽음,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어쩌면 폭력일지 모르는, 아니 폭력일 수밖에 없는 외부의 무언가에 의한 죽음. 죽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렇게 더 먹먹하고 아픈 것이라고. 킬링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가슴에 무수한 피해자들의,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던 찰나의, 죽음들이 쿵, 쿵, 쿵, 하고 떨어졌다. 때로는 가해자가 되고, 때로는 피해자가 되고, 또 때로는 방관자가 되었던 숱한 기억과 현재가 뒤엉키며 혼란스러웠다. 이 연극은 여전히 나의 심장을 때리고 있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눈과 귀의 고통이었다. 작품의 강력한 메시지가 마음을 힘들게 했다면, 눈과 귀의 고통은 저시력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고충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잔존시력을 혹사시켜가며 볼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보려 애썼으나 검은 그림자 외에는 보이지 않아서 눈은 눈대로 아프고 마음은 마음대로 답답했다. 공연 내내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성에 귀 또한 피로했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괴로운 공연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큰 극장이 좁고 무겁게 느껴졌으며, 얼른 공연이 끝나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죽음’에 대한 연극이 끝나는 순간, 나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깥 공기는 서울이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상쾌했다.

물살을 타듯, 순조로운 항해의 시작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뒤늦게 배리어프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적 요소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엔 분명 배리어프리적 요소가 있었다. 배우들이 자신의 행동을 말로 묘사하기도 하고 정해진 동작에 대한 신호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없었다. 왜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연극은 뒤로 갈수록 해설이나 묘사 그러니까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특별한 말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앞부분에 있었던 음성해설로 인해 시각장애인 관객으로서 배려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국립극단에서도 배리어프리 공연을 하는구나.”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소극장 공연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배리어프리 공연을 이제 제법 큰 무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드디어 국립극단에서도 장애인 배우가 출연하고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프리적 요소도 넣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다.

음성해설과 무대 등이 시각장애인 관객이 관람하기에 적절했는지 되짚어보았다. 앞서 말했듯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언어가 처음에는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슬쩍 사라졌다. 시각장애인 관객을 고려했다는 성의 표시 정도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해설 없이 진행된 후반부의 내용이 너무나 잘 전달되었다. 앞의 해설은 마중물 역할을 했던 것일까. 배를 띄워 놓고 그 배가 물살을 타는 데까지는 노를 저어주듯 해설이 들어가고, 안정적으로 물살을 타며 순조롭게 항해하면서부터는 굳이 힘들여 노를 저을 필요가 없듯, 그렇게 해설은 치고 빠졌다. 연출의 노련함일까.

뒤로 갈수록 더 강하게 대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였는지 점점 긴 대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더 이상 잔존시력을 혹사시키는 것을 멈추고 청각에 더 집중하며 대사를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애썼다. 그런데 그 순간 대사 사이사이로 쉼 없이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배우들의 움직임 소리였다. 달려가는 소리, 백스테이지에서 들려오는 소리, 업스테이지와 다운스테이지에서 들리는 소리 등등. 그 순간 새삼 느낀 것은 배우들은 역시 목소리로만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 큰 무대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들의 매 순간순간의 움직임이. 연극이 끝나고 나서야 드는,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억나는 대사들을 곱씹고, 충분히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며 자위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유효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연극을 시작할 때, 한 배우가 조명에 관해 미리 설명했다. 공연 중간에 크고 밝은 자극적인 조명이 한 번 있을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정보를 준 것이다. 아마도 나 같은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덕분에 그 조명이 나왔을 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른 조명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조명에 대해서는 별 의식 없이 관람했는데, 이 연극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각적인 연극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은은하고 약한 조명 혹은 단조로운 조명들이 여러 각도로 배우와 무대 곳곳을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비추었다는 것이다. 대사와 함께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이 이 연극을 관람하는 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조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은은한 조명이 그 특유의 느낌으로 어떻게 배우와 무대를 비추었을까? 그 모습을 보며 대사를 들었을 때 비장애인 혹은 정안인(시각장애가 없는 사람) 관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연극은 이미 끝난 후였다. 시각보다는 청각적으로 더 받을 것이 많다고 생각했던 연극은 알고 보니 어쩌면 시각적인 것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온통 검은색에 대사로 꽉 채워진 연극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아무리 잔존시력을 활용해도 결코 볼 수 없었던 은은한 조명들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제대로 허를 찔렸다. 연극은 이미 끝났고, 뒤늦은 상상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또 남았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배리어프리에 대한 나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한다.

모두가 즐기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

최근 공연계에서는 배리어프리에 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배리어프리 공연은 대부분 비장애인 중심으로 먼저 만든 후에 장애인 관객을 위해 배리어프리적 요소를 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연출가 등 참여 예술가의 의도와 작품성이 해설이나 자막 등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공들여 쌓은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다가 탑 전체가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비장애인 관객과 장애인 관객 모두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관객으로서 창작자로서 또 배리어프리에 관한 자문을 하는 입장에서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처음부터 장애인 관객을 고려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것이 모두에게 편리하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계단을 만들어놓고 나중에서야 한쪽 구석에 경사로를 깔면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사로를 만들면 휠체어 장애인, 시각장애인,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 모두에게 편리하다. 배리어프리 공연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이나 조명, 무대가 비장애인에게도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의 배리어프리가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 공연. 그것이 진정한 배리어프리가 아닐까? 물론 모든 공연이 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나의 장르로서 ‘배리어프리 공연’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된다면 장애인 창작자는 한층 더 자긍심을 가지고 임할 수 있을 것이고, 장애인 관객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꿈을 꾸고 있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국립극단 ∣ 2021.10.22.~11.14. ∣ 명동예술극장

구자혜 연출의 신작으로, 동물의 관점에서 인간의 시선을 비틀어보는 이 작품은 인간의 욕심으로 발생한 동물의 죽음 그 이면을 쫓는다. 독립을 위해 도로를 횡단하는 고라니, 평화사절단으로 날아간 비둘기들, 우주로 향한 잡종 개 라이카와 친구들. 길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진실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수어통역, 음성해설, 한글자막, 안내견 동반 입장 등 전 회차에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관객 누구나 안전하게 연극을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국립극단] 모두를 위한 이 밤의 라디오 |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 바로가기(링크)

이성수

저시력 시각장애 연극인. 2015년 1월 배리어프리 버전 뮤직드라마 <당신만이>를 통해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 장애인극단 다빈나오와 장애인문화예술 판을 거치며 꾸준히 공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6년 안은미컴퍼니와 함께한 퍼포먼스 공연 <안심댄스>는 이듬해인 2017년 유럽투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0set 프로젝트, 쿵짝프로젝트, 래빗홀씨어터 등과 협업했다. 최근에는 국립극단 ‘창작공감’ 강보름 연출팀의 다큐 연극 <소극장판-타지>에 출연했다.
hansole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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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사진 제공. 국립극단

2022년 1월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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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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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06: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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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와닿습니다.. 저도 저시력장애 일러스트레이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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