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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창작자와 협업하기

이슈 느리게 교감하는 단단한 시간 여행

  • 신소명 동화작가
  • 등록일 2020-12-30
  • 조회수556

이슈

발달장애 창작자와 협업하기

느리게 교감하는 단단한 시간 여행

신소명 동화작가

동화책 혹은 그림책 좋아하시나요? 당신은 마음 한편에 어릴 때 읽었던 추억의 책 한 권을 마음에 품고 사는 분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 계시는군요. 좋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겠군요. 아니라고요? 먹고 살기도 힘든 바쁜 세상에 동화책이나 그림책 따위를 볼 시간이 어디 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군요. 좋습니다. 그런 분은 더욱더 환영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제 이야기를 공감하고 나눌 자격이 충분한 분들이기 때문이죠. 예상하셨듯이 저는 동화책,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중에서도 좀 특별한 그림책에 관해서 말이지요.

여기 상자를 쓰고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상자는 보통 상자가 아닙니다. 꿈으로 반짝이는 보물상자지요. 하지만 이 아이 외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죠. 그래서 모두 아이를 괴롭힙니다. ‘상자쓴아이’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며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다 상자를 쓰고 있는 아이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상자쓴아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고 발달장애 창작단체에서 일하는 김인경 기획자와 방민정 디자이너를 만나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화책 『상자쓴아이』는 오롯이 자기 세계에 빠져 이해받지 못하던 아이가 상자 안으로 들어온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된다는 내용으로, 우리 안의 이해받지 못하는 혹은 남들과는 다른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발달장애가 있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가 모두 될 수 있는 거죠.

초안에서는 ‘상자쓴아이’가 자기를 이해하는 친구로 인해 상자를 벗게 되는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소통하면서 ‘상자쓴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글을 수정했습니다. 네 분의 창작자와 약 3년간 작업을 했는데요. 네 분 모두 맑고 아이 같은 천상의 심성을 가졌습니다. 정종필 작가는 따뜻하고 다정한 그림체로 이야기 속 일상을 표현했고, 곽규섭 작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작품에 풍성함을 더했습니다. 서명수 작가는 반복되고 변주되는 색과 선으로 작품을 빛내주었습니다. 기차노선도 그림을 그리는 김동현(관련기사 바로가기)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여행하는 장면들을 작품화했습니다. 각자 소통의 정도가 달랐지만 작가의 이해도에 따라 작품의 텍스트를 같이 읽고 발췌한 단어와 문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그리기도 하고, 한 텍스트에 여러 작가가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발달장애 창작자와 소통하고 작업할 때 중요한 건 어떤 기대치의 결과물을 바라기보다 창작자 고유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로가 교감해서 창작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상자쓴아이』에서 꿈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환상적인 그림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창작자에게 유니콘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작자 본인이 가진 꿈은 그런 ‘환상’이 아니라 배드민턴을 치고 강아지와 노는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창작자가 생각한 그림으로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의 방향을 미리 정하기보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고 소통하는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의외의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깊이 있는 이해와 특별함이 생겨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가 비장애인보다 더 소통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그들의 작업 세계에 들어가서 교감하면서 자유로움과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깊이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업 간격도 1주일이나 2주에 한 번씩, 작업량도 2시간 정도에 한 장 그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교감해가는 과정에서 창작자 외에 기획자와 디자이너, 창작자 보호자들과의 소통과 협력이 작품의 내적 외적 에너지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과의 협력적인 시간이 작품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창작자들이 작업할 때 보지 못했던 깊은 감정선을 보호자를 통해 느꼈죠. 보통 작업할 때는 행복하고 일상적인 순간이지만 보호자가 겪는 시간은 아주 힘들 때가 많았을 테니까요. 고충을 들으며 창작자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작품의 내용이 깊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가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겪는 삶이기도 해서 이렇게 지속적인 관계와 시도로 알게 된 사실들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폭넓어지고 나와 다른 시선에 좀 더 너그러워지게 되었지요.

글 작가의 생각의 실마리가 점점 확장해서 그림 작가와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한 곳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어떤 운명적인 힘도 있는 것 같고, 공동의 장으로서의 창작물이 가지는 힘이 점점 세지는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들어와서 작품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힘을 실어주면서 그들도 힘을 갖게 되고 독자도 그 힘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자쓴아이’가 갖는 힘은 속도에 의한 가속의 힘이 아니라 시간과 협력이 만들어낸 내공의 힘입니다.

속도가 사유를 잠식하는 이 시대에 시간과 협력으로 느리게 만들어진 작품은, 속도의 문화가 가지는 역기능을 순화해, 숨 막히게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 잠시 쉬어가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상자쓴아이’라는 정거장에서 잠시 쉬면서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왼쪽부터) 정종필·곽규섭 창작자의 ‘상자쓴아이’

(왼쪽부터) 서명수·김동현 창작자의 ‘상자쓴아이’

신소명

우리들 누구나 가졌던 혹은 가지고 있는 동심의 세계에 머무르며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동화작가다. 현재 동화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상자쓴아이』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함께 만든 첫 그림책이다.
esca7920@gmail.com

사진제공.신소명

2020년 12월 (16호)

상세내용

이슈

발달장애 창작자와 협업하기

느리게 교감하는 단단한 시간 여행

신소명 동화작가

동화책 혹은 그림책 좋아하시나요? 당신은 마음 한편에 어릴 때 읽었던 추억의 책 한 권을 마음에 품고 사는 분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 계시는군요. 좋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겠군요. 아니라고요? 먹고 살기도 힘든 바쁜 세상에 동화책이나 그림책 따위를 볼 시간이 어디 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군요. 좋습니다. 그런 분은 더욱더 환영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제 이야기를 공감하고 나눌 자격이 충분한 분들이기 때문이죠. 예상하셨듯이 저는 동화책,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중에서도 좀 특별한 그림책에 관해서 말이지요.

여기 상자를 쓰고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상자는 보통 상자가 아닙니다. 꿈으로 반짝이는 보물상자지요. 하지만 이 아이 외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죠. 그래서 모두 아이를 괴롭힙니다. ‘상자쓴아이’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며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다 상자를 쓰고 있는 아이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상자쓴아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고 발달장애 창작단체에서 일하는 김인경 기획자와 방민정 디자이너를 만나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화책 『상자쓴아이』는 오롯이 자기 세계에 빠져 이해받지 못하던 아이가 상자 안으로 들어온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된다는 내용으로, 우리 안의 이해받지 못하는 혹은 남들과는 다른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발달장애가 있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가 모두 될 수 있는 거죠.

초안에서는 ‘상자쓴아이’가 자기를 이해하는 친구로 인해 상자를 벗게 되는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소통하면서 ‘상자쓴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글을 수정했습니다. 네 분의 창작자와 약 3년간 작업을 했는데요. 네 분 모두 맑고 아이 같은 천상의 심성을 가졌습니다. 정종필 작가는 따뜻하고 다정한 그림체로 이야기 속 일상을 표현했고, 곽규섭 작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작품에 풍성함을 더했습니다. 서명수 작가는 반복되고 변주되는 색과 선으로 작품을 빛내주었습니다. 기차노선도 그림을 그리는 김동현(관련기사 바로가기)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여행하는 장면들을 작품화했습니다. 각자 소통의 정도가 달랐지만 작가의 이해도에 따라 작품의 텍스트를 같이 읽고 발췌한 단어와 문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그리기도 하고, 한 텍스트에 여러 작가가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발달장애 창작자와 소통하고 작업할 때 중요한 건 어떤 기대치의 결과물을 바라기보다 창작자 고유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로가 교감해서 창작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상자쓴아이』에서 꿈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환상적인 그림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창작자에게 유니콘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작자 본인이 가진 꿈은 그런 ‘환상’이 아니라 배드민턴을 치고 강아지와 노는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창작자가 생각한 그림으로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의 방향을 미리 정하기보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고 소통하는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의외의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깊이 있는 이해와 특별함이 생겨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가 비장애인보다 더 소통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그들의 작업 세계에 들어가서 교감하면서 자유로움과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깊이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업 간격도 1주일이나 2주에 한 번씩, 작업량도 2시간 정도에 한 장 그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교감해가는 과정에서 창작자 외에 기획자와 디자이너, 창작자 보호자들과의 소통과 협력이 작품의 내적 외적 에너지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과의 협력적인 시간이 작품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창작자들이 작업할 때 보지 못했던 깊은 감정선을 보호자를 통해 느꼈죠. 보통 작업할 때는 행복하고 일상적인 순간이지만 보호자가 겪는 시간은 아주 힘들 때가 많았을 테니까요. 고충을 들으며 창작자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작품의 내용이 깊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가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겪는 삶이기도 해서 이렇게 지속적인 관계와 시도로 알게 된 사실들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폭넓어지고 나와 다른 시선에 좀 더 너그러워지게 되었지요.

글 작가의 생각의 실마리가 점점 확장해서 그림 작가와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한 곳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어떤 운명적인 힘도 있는 것 같고, 공동의 장으로서의 창작물이 가지는 힘이 점점 세지는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들어와서 작품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힘을 실어주면서 그들도 힘을 갖게 되고 독자도 그 힘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자쓴아이’가 갖는 힘은 속도에 의한 가속의 힘이 아니라 시간과 협력이 만들어낸 내공의 힘입니다.

속도가 사유를 잠식하는 이 시대에 시간과 협력으로 느리게 만들어진 작품은, 속도의 문화가 가지는 역기능을 순화해, 숨 막히게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 잠시 쉬어가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상자쓴아이’라는 정거장에서 잠시 쉬면서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왼쪽부터) 정종필·곽규섭 창작자의 ‘상자쓴아이’

(왼쪽부터) 서명수·김동현 창작자의 ‘상자쓴아이’

신소명

우리들 누구나 가졌던 혹은 가지고 있는 동심의 세계에 머무르며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동화작가다. 현재 동화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상자쓴아이』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함께 만든 첫 그림책이다.
esca7920@gmail.com

사진제공.신소명

2020년 12월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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