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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리뷰 아픔도 삶이다

  • 김소연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0-09-30
  • 조회수499

리뷰

이주호 & 이주승 <두 개의 시선>

가장 보통의 언어 속으로

구정화 경기도미술관 학예사

어두운 푸른 빛이 감싸고 있는 무대에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어둠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아른거린다. 잠시 후 푸른 어둠을 가르며 무대 한가운데에 노란빛이 쏟아지면 동그란 빛 안에 한 배우가 앉아 있다. 배우는 흰 종이를 들고 종이에 적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한 달 전 아프로펌을 했습니다.” 그때 까만 후면 무대 벽 가득 사진 한 장이 투사된다. 헐렁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생머리를 느슨하게 올린 무대 위의 배우와 부풀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사진 속 인물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야기의 주인공 ‘홍수영’은 근육병을 앓고 있다. 그녀는 약물 투여가 늘어나면서 탈모가 심해졌다. 파마를 하느라 오랜 시간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견뎌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부풀린 머리가 주는 강한 인상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파마를 끝내고 길을 나서 몇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온몸에 통증이 밀려온다. 가던 길에 주저앉아 통증을 견디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지만 그녀의 아픈 몸이 우리의 일상에 등장할 때는 ‘이상한 사람’인 것이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여섯 명의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육병, 크론병처럼 생소하거나 난치인 이야기도 있고 유방암, 난소낭종, 조현병 등 익숙하다면 익숙한 병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다. 모두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연극은 질병을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치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파괴된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연극치료가 아니라 연극이다.

여섯 개의 이야기에는 아픈 이들인 배우들이 겪고 있는 여러 일상이 등장한다. 갑자기 밀려온 통증으로 길에 주저앉아 있으면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받고, 수업이나 모둠 과제와 같은 정해진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 이제 암은 난치병도 희귀병도 아니건만 집중치료가 끝난 후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찾은 취업지원 창구 직원은 암이란 병력에 취업신청서를 받아야 할지 말지 머뭇거린다. 많은 이들이 앓고 있고 완치가 가능한 병마저도 ‘병력’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이처럼 연극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는 직접 질병을 앓고 있지 않다면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질병을 겪고 있건 아니건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 등장한다. 아픈 이들도 길을 걷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친구를 만나고, 춤춘다. 아픈 이들도 일해야 하고 일을 할 수 있다. 아픈 몸들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서 제한되거나 배제된다. 때로는 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로, 때로 보호를 위해. 하지만 아픔도 삶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 ‘나드’는 턱골절로 시작된 염증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지는 않았다. 거기에 난소와 자궁질환으로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나드는 얼굴 근육 수축으로 모자 벗는 것을 꺼렸지만 이제 무대 위에서 춤춘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나는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완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은 무대 위의 그녀에게만이 아니라 무대를 지켜보는 객석에도 해방감을 준다. 완치, 건강, 정상성에 대한 강박은 아픈 이건 건강한 이건 마찬가지다. 그 강박에서 놓일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조현병 당사자인 ‘목우’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환청이 들려온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목우 뒤에 선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얽혀들어 목우를 둘러싼다. 이때 목우는 이렇게 말한다.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다.” 그 순간 목우를 둘러싼 배우들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소리에서 목우의 연극을 돕는 동료가 된다. 연극은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서 놓여날 때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그려낸다.

각 장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배우들은 종종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이야기이더라도 무대에 선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고 배우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해야 한다. 이들의 눈물은 극적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눈물은 아름답다. 시민연극이라서 연기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또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아픈 것이어서도 아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고 그것을 듣고 있는 ‘연극’이라는 행위의 절실함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멈춘 세상에서, 가장 먼저 극장이 문을 닫는 시절에 아픈 몸들이 만나 연극을 만들었다. 비록 직접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만나서 함께 만들어갔을 그 시간이 영상에서도 전해진다. 비록 우리는 지금 서로 함께 만나지 못하지만 함께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이 아름답고 고맙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른몸들·인권연극제·장애인문화예술판 | 2020.7.12.~10.31. | 온라인상영

질병을 둘러싼 차별, 혐오, 낙인을 말하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시민연극이다. 연극 제목과 동명의 책에서 제기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건강권이 아니라 질병권(疾病權 잘 아플 권리)’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아픈 몸들을 공개 모집해서 각자의 이야기로 무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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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커뮤니티와 아트’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kdoonga@naver.com

사진 제공. 다른몸들

2020년 09월 (13호)

상세내용

리뷰

이주호 & 이주승 <두 개의 시선>

가장 보통의 언어 속으로

구정화 경기도미술관 학예사

어두운 푸른 빛이 감싸고 있는 무대에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어둠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아른거린다. 잠시 후 푸른 어둠을 가르며 무대 한가운데에 노란빛이 쏟아지면 동그란 빛 안에 한 배우가 앉아 있다. 배우는 흰 종이를 들고 종이에 적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한 달 전 아프로펌을 했습니다.” 그때 까만 후면 무대 벽 가득 사진 한 장이 투사된다. 헐렁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생머리를 느슨하게 올린 무대 위의 배우와 부풀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사진 속 인물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야기의 주인공 ‘홍수영’은 근육병을 앓고 있다. 그녀는 약물 투여가 늘어나면서 탈모가 심해졌다. 파마를 하느라 오랜 시간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견뎌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부풀린 머리가 주는 강한 인상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파마를 끝내고 길을 나서 몇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온몸에 통증이 밀려온다. 가던 길에 주저앉아 통증을 견디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지만 그녀의 아픈 몸이 우리의 일상에 등장할 때는 ‘이상한 사람’인 것이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여섯 명의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육병, 크론병처럼 생소하거나 난치인 이야기도 있고 유방암, 난소낭종, 조현병 등 익숙하다면 익숙한 병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다. 모두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연극은 질병을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치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파괴된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연극치료가 아니라 연극이다.

여섯 개의 이야기에는 아픈 이들인 배우들이 겪고 있는 여러 일상이 등장한다. 갑자기 밀려온 통증으로 길에 주저앉아 있으면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받고, 수업이나 모둠 과제와 같은 정해진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 이제 암은 난치병도 희귀병도 아니건만 집중치료가 끝난 후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찾은 취업지원 창구 직원은 암이란 병력에 취업신청서를 받아야 할지 말지 머뭇거린다. 많은 이들이 앓고 있고 완치가 가능한 병마저도 ‘병력’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이처럼 연극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는 직접 질병을 앓고 있지 않다면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질병을 겪고 있건 아니건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 등장한다. 아픈 이들도 길을 걷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친구를 만나고, 춤춘다. 아픈 이들도 일해야 하고 일을 할 수 있다. 아픈 몸들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서 제한되거나 배제된다. 때로는 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로, 때로 보호를 위해. 하지만 아픔도 삶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 ‘나드’는 턱골절로 시작된 염증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지는 않았다. 거기에 난소와 자궁질환으로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나드는 얼굴 근육 수축으로 모자 벗는 것을 꺼렸지만 이제 무대 위에서 춤춘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나는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완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은 무대 위의 그녀에게만이 아니라 무대를 지켜보는 객석에도 해방감을 준다. 완치, 건강, 정상성에 대한 강박은 아픈 이건 건강한 이건 마찬가지다. 그 강박에서 놓일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조현병 당사자인 ‘목우’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환청이 들려온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목우 뒤에 선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얽혀들어 목우를 둘러싼다. 이때 목우는 이렇게 말한다.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다.” 그 순간 목우를 둘러싼 배우들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소리에서 목우의 연극을 돕는 동료가 된다. 연극은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서 놓여날 때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그려낸다.

각 장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배우들은 종종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이야기이더라도 무대에 선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고 배우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해야 한다. 이들의 눈물은 극적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눈물은 아름답다. 시민연극이라서 연기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또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아픈 것이어서도 아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고 그것을 듣고 있는 ‘연극’이라는 행위의 절실함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멈춘 세상에서, 가장 먼저 극장이 문을 닫는 시절에 아픈 몸들이 만나 연극을 만들었다. 비록 직접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만나서 함께 만들어갔을 그 시간이 영상에서도 전해진다. 비록 우리는 지금 서로 함께 만나지 못하지만 함께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이 아름답고 고맙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른몸들·인권연극제·장애인문화예술판 | 2020.7.12.~10.31. | 온라인상영

질병을 둘러싼 차별, 혐오, 낙인을 말하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시민연극이다. 연극 제목과 동명의 책에서 제기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건강권이 아니라 질병권(疾病權 잘 아플 권리)’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아픈 몸들을 공개 모집해서 각자의 이야기로 무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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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커뮤니티와 아트’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kdoonga@naver.com

사진 제공. 다른몸들

2020년 09월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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