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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방식

이음광장 대화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홍성훈 작가
  • 등록일 2020-09-22
  • 조회수798

1년 전 어느 날, 나는 가족이 있는 대화방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어무이 아부지~ 내일 [비마이너]에 제 글 하나 나갈 건데, 그거 읽고 너무 충격받지 마셔요. 그냥 글 쓰는 못난 새끼 둔 탓이라 생각해주셔요.”

사뭇 비장한 말투에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곧바로 “뭔 글 썼는데?”라며 물어보았고, 나는 읽어보면 안다고 얼버무리며 넘겼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그렇게 얼렁뚱땅 대답으로 넘길 글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글을 두 번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중 하나는 부모가 진한 애무를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나는 처음으로 부모의 애무를 직접 목격했고, 그 광경은 나의 섹슈얼리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핍진성과 현장성을 제1원칙으로 삼고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에로틱한 장면을 글로 풀어냈다.

내 글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꽤 좋았다. 나를 만나면 글 이야기부터 꺼냈고, 후속편은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족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는 “소설 쓰시네~”라고 말하며 어느 ‘높으신 분’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고, 동생 세 명은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만이 내 글을 본인의 SNS에 공유했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은 내가 무슨 글을 쓰든 말든, 무슨 연극을 올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할 일을 해나갔다. 나도 가족의 무관심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쓰고 연극을 하는 창작자로서 보기 드물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족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내 방식대로의 철학과 가치관을 키울 수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렇게 무 자르듯 갈라칠 수 없는 것일까. 어느 순간 내 글쓰기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글에서 가족 이야기를 자주 했다. 가족 이야기를 쓸 때면 마치 접신이 된 것처럼 나의 타자 속도가 평소보다 약 1.5배 정도 더 빨라졌다. 쉽게 풀어갈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할 말도 많았다. 내가 쓴 이야기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에게 받은 상처나 한(恨) 때문에 할 말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쉬움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장애로 인해 가족과 깊은 소통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 식구들이 많다 보니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자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집안 분위기가 금세 부산해지기 마련이었다. 말이 말을 낳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족 사이에 낀 나는 고갯짓과 표정으로 간단한 응답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대화가 조금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면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두 마디 이상의 말을 하려면 우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야 하고, 노트북 전원을 켜야 하고, 한글 파일을 열어야 하고, 타이핑해서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가족 간의 대화 주제는 두세 번쯤 바뀌었고, 말을 하려고 타이핑하려다 중단한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괜히 끼어들어 대화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지만 서로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과 강제된 생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한 발짝 떨어져 외부인의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족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런 말들이 점점 무르익어갈 때쯤 나는 키보드로 말들을 수확하고, 타작하고, 타작한 말을 정갈하게 모아 한 편의 글로 완성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편의 글을 써 봐도 마음 한편에서는 가족과의 깊은 소통에 대한 갈망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족은 내 글에 대해 언제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돌아보면 가족은 나의 말보다 외부 사람들의 시선과 물음에 더 많은 대답을 해야 했다. 외부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나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교에 진학했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학급 회장씩이나 했으며,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까지 갔다. 이 ‘불구하고’라는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들은 장애인 구성원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가족을 주목했다. 그리고 미리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몸이 불편한 오빠를 돌보느라 힘들지 않았나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어떤 대답을 들려주겠는가? 맞다. 나의 가족도 기자들이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래야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으니까 말이다. 기자들은 가끔 나에게도 질문했는데, 나 또한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아무리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해봤자 기사는 결국 기자의 입맛대로 쓰일 것이 뻔했다. 한두 번쯤은 그런 행태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기자에게 따져보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기사를 바꿀 수 없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기사가 나간 뒤로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고 싶다는 ‘선하고 선한’ 독자 몇 분이 신문사를 통해 연락이 왔는데 나는 기꺼이 후원을 받아들였다. 지금도 나는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가족에게 궁금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괜찮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톺아보니 가족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고, 그저 지레짐작만 하며 지내온 날들이 아쉽기만 했다. 또한 나는 여전히 한 발 떨어져서 가족을 지켜보는 ‘외부 사람’의 위치를 자처했다. 그러다 작년에 <관람모드: 보는 방식>을 통해 ‘쓰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나는 언어장애를 가진 한 명의 구성원이 아닌 ‘쓰는 사람’으로서 가족에게 말(문자 언어)을 건네고 싶었고, 말을 건네는 과정을 한 편의 기록(다큐멘터리 연극)으로 남기고 싶었다.

올해 초, 나는 가족 단톡방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가족 여러분! 우리 함께 연극합시다.’

그러자 나의 가족은 5인 5색의 반응을 나타냈다.

<대화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음성으로 듣기
자료출처: 홍성훈, 낭독: 김현균 성우

홍성훈

홍성훈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장애’를 화두로 예술작업을 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기를 좋아한다. 현재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비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연극 <관람모드: 만나는 방식>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를 준비 중이다.
sunghun8786@naver.com

홍성훈

홍성훈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장애’를 화두로 예술작업을 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기를 좋아한다. 현재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비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연극 <관람모드: 만나는 방식>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를 준비 중이다.
sunghun8786@naver.com

상세내용

1년 전 어느 날, 나는 가족이 있는 대화방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어무이 아부지~ 내일 [비마이너]에 제 글 하나 나갈 건데, 그거 읽고 너무 충격받지 마셔요. 그냥 글 쓰는 못난 새끼 둔 탓이라 생각해주셔요.”

사뭇 비장한 말투에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곧바로 “뭔 글 썼는데?”라며 물어보았고, 나는 읽어보면 안다고 얼버무리며 넘겼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그렇게 얼렁뚱땅 대답으로 넘길 글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글을 두 번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중 하나는 부모가 진한 애무를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나는 처음으로 부모의 애무를 직접 목격했고, 그 광경은 나의 섹슈얼리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핍진성과 현장성을 제1원칙으로 삼고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에로틱한 장면을 글로 풀어냈다.

내 글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꽤 좋았다. 나를 만나면 글 이야기부터 꺼냈고, 후속편은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족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는 “소설 쓰시네~”라고 말하며 어느 ‘높으신 분’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고, 동생 세 명은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만이 내 글을 본인의 SNS에 공유했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은 내가 무슨 글을 쓰든 말든, 무슨 연극을 올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할 일을 해나갔다. 나도 가족의 무관심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쓰고 연극을 하는 창작자로서 보기 드물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족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내 방식대로의 철학과 가치관을 키울 수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렇게 무 자르듯 갈라칠 수 없는 것일까. 어느 순간 내 글쓰기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글에서 가족 이야기를 자주 했다. 가족 이야기를 쓸 때면 마치 접신이 된 것처럼 나의 타자 속도가 평소보다 약 1.5배 정도 더 빨라졌다. 쉽게 풀어갈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할 말도 많았다. 내가 쓴 이야기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에게 받은 상처나 한(恨) 때문에 할 말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쉬움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장애로 인해 가족과 깊은 소통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 식구들이 많다 보니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자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집안 분위기가 금세 부산해지기 마련이었다. 말이 말을 낳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족 사이에 낀 나는 고갯짓과 표정으로 간단한 응답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대화가 조금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면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두 마디 이상의 말을 하려면 우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야 하고, 노트북 전원을 켜야 하고, 한글 파일을 열어야 하고, 타이핑해서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가족 간의 대화 주제는 두세 번쯤 바뀌었고, 말을 하려고 타이핑하려다 중단한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괜히 끼어들어 대화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지만 서로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과 강제된 생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한 발짝 떨어져 외부인의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족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런 말들이 점점 무르익어갈 때쯤 나는 키보드로 말들을 수확하고, 타작하고, 타작한 말을 정갈하게 모아 한 편의 글로 완성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편의 글을 써 봐도 마음 한편에서는 가족과의 깊은 소통에 대한 갈망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족은 내 글에 대해 언제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돌아보면 가족은 나의 말보다 외부 사람들의 시선과 물음에 더 많은 대답을 해야 했다. 외부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나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교에 진학했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학급 회장씩이나 했으며,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까지 갔다. 이 ‘불구하고’라는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들은 장애인 구성원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가족을 주목했다. 그리고 미리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몸이 불편한 오빠를 돌보느라 힘들지 않았나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어떤 대답을 들려주겠는가? 맞다. 나의 가족도 기자들이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래야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으니까 말이다. 기자들은 가끔 나에게도 질문했는데, 나 또한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아무리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해봤자 기사는 결국 기자의 입맛대로 쓰일 것이 뻔했다. 한두 번쯤은 그런 행태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기자에게 따져보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기사를 바꿀 수 없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기사가 나간 뒤로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고 싶다는 ‘선하고 선한’ 독자 몇 분이 신문사를 통해 연락이 왔는데 나는 기꺼이 후원을 받아들였다. 지금도 나는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가족에게 궁금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괜찮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톺아보니 가족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고, 그저 지레짐작만 하며 지내온 날들이 아쉽기만 했다. 또한 나는 여전히 한 발 떨어져서 가족을 지켜보는 ‘외부 사람’의 위치를 자처했다. 그러다 작년에 <관람모드: 보는 방식>을 통해 ‘쓰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나는 언어장애를 가진 한 명의 구성원이 아닌 ‘쓰는 사람’으로서 가족에게 말(문자 언어)을 건네고 싶었고, 말을 건네는 과정을 한 편의 기록(다큐멘터리 연극)으로 남기고 싶었다.

올해 초, 나는 가족 단톡방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가족 여러분! 우리 함께 연극합시다.’

그러자 나의 가족은 5인 5색의 반응을 나타냈다.

<대화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음성으로 듣기
자료출처: 홍성훈, 낭독: 김현균 성우

홍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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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이다. ‘장애’를 화두로 예술작업을 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기를 좋아한다. 현재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비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연극 <관람모드: 만나는 방식>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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