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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장애학 코드로 미디어 읽기

이음광장 왜 앓아? 알아야지!

  • 차미경 작가
  • 등록일 2020-09-29
  • 조회수1154

휠체어를 탄 사람이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가 겪는 장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국제장애분류기준((ICIDH: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 Disabilities, and Handicaps)에 의해 80년대식으로 답한다면 장애의 원인은 걸을 수 없는 개인에게 있다. 이 분류기준에 따르면 장애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손상(impairment)을 가진 개인이 그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걸을 수 없기 때문이지 계단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식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명백히 틀렸다. 오늘날의 인식에서 장애의 원인은 걸을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게 개별적 모형에서 사회적 모형으로 이동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애를 ‘앓는 것’, 곧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KT 광고 ‘마음을 담다1’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
    [출처] KT 유튜브

  • KT 광고 ‘마음을 담다’
    <제 귀에는 삐삐가 있어요>
    [출처] KT 유튜브

최근 KT가 ‘따뜻한 기술’을 표방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청각 장애를 가진 엄마의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광고를 내놓아서 화제가 됐다. 수어가 아닌 인공지능이 찾아준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청각 장애인 엄마와 그 목소리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족의 모습에 ‘마음을 담다’라는 카피를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청각 장애를 가진 많은 당사자는 그 따뜻하다는 기술에 따뜻해하지 않았고 그 안에 담았다는 마음도 느낄 수 없었다. 목소리로 전하는 말 말고 수어로 전하는 말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는가? 물론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가족의 마음도, 한 번쯤은 자신의 목소리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굳이 목소리가 아닌 수어로도 충분히 마음을 나누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마음을 담다’의 또 다른 시리즈는 청각 장애 아동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지원한다는 기업의 홍보와 함께 ‘기가지니’를 언어치료용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그렸다. 또 유사한 콘셉트로 ‘웨어러블 로봇’을 연구하는 현대차 그룹의 ‘두 번째 걸음마’에서는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다시 일어서서 활을 쏘는 척수 장애 선수를 그렸다.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된 장애인 양궁선수에게 웨어러블 로봇으로 두 번째 걸음마를 선사한다는 콘셉트였다. 그런데 두 번째 걸음마의 기쁨과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 첫걸음마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너무 크게 그렸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과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의 지나친 대비가 장애를 입은 현재의 상황을 상실과 불완전한 상태로 느껴지게 한다. 굳이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이런 광고들이 보여주는 장애는 치료해야 하고 재활해야 하는 ‘비정상’의 상태이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사랑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부족한 엄마로 그려지고 인공지능을 통해서라도 목소리를 찾아주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존재다. 왜 ‘수어’라는 다른 소통방식은 무시되고 목소리를 통한 언어만 강요되는가. 이는 수어를 또 다른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 온 많은 청각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무례한 메시지인가.

인공와우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인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삶과 정체성을 무시한 채 청각 장애를 질병으로 인식하는 정부나 전문가들의 시각이 강요된 측면도 있다. 인공와우 수술의 위험성이나 부작용에 대한 올바른 정보도 미흡한 상황에서 마치 인공와우 수술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시킬 수 있는 무비판적인 광고는 농인의 정체성을 저해하고 아동의 선택권이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통한 정확한 발음 연습 또한 구어를 사용하는 의사소통만 강조할 우려가 있다.

이 다양성의 시대에도 활은 왜 서서 쏘아야만 하는가. 왜 꼭 웨어러블 로봇에 의지해 서서 쏘아야만 감동적인가. 물론 장애인들에게 최첨단 보조기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필요의 이유가 단지 ‘비정상성을 극복하는 치료와 재활’ 차원에만 있을까. 비장애인이 최고급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못 걸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장애인에게 최첨단 웨어러블 로봇이 필요한 이유는 왜 그렇게까지 필요 이상으로 감동적이어야 하는가.

어디 광고뿐인가. 장애를 다룬 다양한 기사에는 ‘지적장애를 앓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소아마비를 앓아온’ 등과 같이 장애를 앓는다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에도 장애를 가진 이들은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처럼 소개되거나 그려지곤 한다.

딸이 결혼할 때 손잡고 함께 입장해 줄 수 있는 ‘정상적인’ ‘보통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 위해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피땀 쏟으며 걸음 연습을 멈추지 않는 장애인 아버지가 감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어느 기한까지 일어나서 걷지 못하면 자신이 죽겠다고 장애인 아들을 협박하며 재활 훈련을 강요하던 어떤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했던 적도 있다. 제목도 ‘움직여라! 발가락’이었던 한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벌써 제목부터 벌떡 일어나 걸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느껴지게 했다.

“너 그러다 평생 휠체어 타면 어떻게 할래?” “너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서 살 수 있어?” “너 못 걸으면 너랑 엄마랑 제삿날 같을 줄 알아!” “그렇게 주저앉으면 어쩌자는 거야?” 일어서지 못하는 아이를 두고 그 엄마는 내내 이렇게 짜증 섞인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까지 발가락이 안 움직이면, 며칠까지 못 걸으면, 이런 부담스런 데드라인을 강요하며 끊임없이 아들을 채근하고 있었다. 척수를 다쳐 앞으로는 하지와 한쪽 손이 마비된 채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될 거라 말하는 의사와 그래도 기적을 바라는 가족들. 아이는 마치 곧 나을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빨리 나으라는 강요와 협박 속에 위축돼 있는데 그걸 ‘가족애’와 ‘희망’이라는 근사한 포장지로 싸서 방송하고 있었다.

장애는 게으르고 의지가 없어서 앓는 병이 아니다. 또 무엇보다 장애인으로 사느니 함께 죽자고 종용할 만큼 끔찍한 불행도, 앞이 깜깜하기만 한 절망도 아니다. 그저, 이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그 다른 삶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방송은 시종일관 장애는 결코 한 가족에게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기필코 낫지 않으면 안 되는 끔찍한 질병처럼 보여 주었다. 결국, 이 방송은 장애인 시청자들에게 무례했고 장애를 이해하는 바람직한 시각도 제시하지 못한 셈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를 여전히 한 개인이 ‘앓는’ 질병이나 불행 정도로 인식하는 한 그 앞에 놓인 계단을 제거하는 능동적인 변화는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가 장애를 이해하는 시각을 자꾸만 사회에서 개인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장애를 ‘앓는’ 사회와 장애를 ‘아는’ 사회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최근에 구찌(GUCCI)와 애플이 보여 준 사례를 보면 그 차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구찌 뷰티 모델 엘리 골드 스테인(Ellie Goldstein)
    [출처] 구찌 공식 인스타그램

  • 세계개발자회의에서 발표하는 메그 프로스트
    [출처] APPLE 유튜브

세계적인 명품사인 구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모델 엘리 골드 스테인(Ellie Goldstein)을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또 애플의 올해 세계개발자회의(WWDC2020)에서는 제품 디자인 디렉터 매그 프로스트(Meg Frost)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등장해서 애플 맵스의 새 기능을 설명했다. 멋진 최신형 전동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그녀는 그저 다른 스피커들과 똑같이 등장해서 자신이 맡은 상품의 새 기능을 설명하고 내려갔을 뿐 이후에 그 어떤 광고나 기사에서도 그녀의 장애에 대한 그 어떤 진부한 설명도 덧붙지 않았다. 장애를 개인이 ‘앓아야’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질병을 가진, 도와주어야 하는 환자로 인식되지만, 장애를 ‘아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이렇게 개성 있는 한 사람이 된다. 대중의 인식에 편승하지 않고 선도해 갈 수 있는 기업과 미디어의 관점은 어디 있어야 하는지 늘 새롭게 돌아보아야 한다.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상세내용

휠체어를 탄 사람이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가 겪는 장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국제장애분류기준((ICIDH: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 Disabilities, and Handicaps)에 의해 80년대식으로 답한다면 장애의 원인은 걸을 수 없는 개인에게 있다. 이 분류기준에 따르면 장애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손상(impairment)을 가진 개인이 그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걸을 수 없기 때문이지 계단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식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명백히 틀렸다. 오늘날의 인식에서 장애의 원인은 걸을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게 개별적 모형에서 사회적 모형으로 이동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애를 ‘앓는 것’, 곧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KT 광고 ‘마음을 담다1’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
    [출처] KT 유튜브

  • KT 광고 ‘마음을 담다’
    <제 귀에는 삐삐가 있어요>
    [출처] KT 유튜브

최근 KT가 ‘따뜻한 기술’을 표방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청각 장애를 가진 엄마의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광고를 내놓아서 화제가 됐다. 수어가 아닌 인공지능이 찾아준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청각 장애인 엄마와 그 목소리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족의 모습에 ‘마음을 담다’라는 카피를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청각 장애를 가진 많은 당사자는 그 따뜻하다는 기술에 따뜻해하지 않았고 그 안에 담았다는 마음도 느낄 수 없었다. 목소리로 전하는 말 말고 수어로 전하는 말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는가? 물론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가족의 마음도, 한 번쯤은 자신의 목소리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굳이 목소리가 아닌 수어로도 충분히 마음을 나누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마음을 담다’의 또 다른 시리즈는 청각 장애 아동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지원한다는 기업의 홍보와 함께 ‘기가지니’를 언어치료용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그렸다. 또 유사한 콘셉트로 ‘웨어러블 로봇’을 연구하는 현대차 그룹의 ‘두 번째 걸음마’에서는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다시 일어서서 활을 쏘는 척수 장애 선수를 그렸다.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된 장애인 양궁선수에게 웨어러블 로봇으로 두 번째 걸음마를 선사한다는 콘셉트였다. 그런데 두 번째 걸음마의 기쁨과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 첫걸음마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너무 크게 그렸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과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의 지나친 대비가 장애를 입은 현재의 상황을 상실과 불완전한 상태로 느껴지게 한다. 굳이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이런 광고들이 보여주는 장애는 치료해야 하고 재활해야 하는 ‘비정상’의 상태이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사랑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부족한 엄마로 그려지고 인공지능을 통해서라도 목소리를 찾아주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존재다. 왜 ‘수어’라는 다른 소통방식은 무시되고 목소리를 통한 언어만 강요되는가. 이는 수어를 또 다른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 온 많은 청각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무례한 메시지인가.

인공와우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인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삶과 정체성을 무시한 채 청각 장애를 질병으로 인식하는 정부나 전문가들의 시각이 강요된 측면도 있다. 인공와우 수술의 위험성이나 부작용에 대한 올바른 정보도 미흡한 상황에서 마치 인공와우 수술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시킬 수 있는 무비판적인 광고는 농인의 정체성을 저해하고 아동의 선택권이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통한 정확한 발음 연습 또한 구어를 사용하는 의사소통만 강조할 우려가 있다.

이 다양성의 시대에도 활은 왜 서서 쏘아야만 하는가. 왜 꼭 웨어러블 로봇에 의지해 서서 쏘아야만 감동적인가. 물론 장애인들에게 최첨단 보조기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필요의 이유가 단지 ‘비정상성을 극복하는 치료와 재활’ 차원에만 있을까. 비장애인이 최고급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못 걸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장애인에게 최첨단 웨어러블 로봇이 필요한 이유는 왜 그렇게까지 필요 이상으로 감동적이어야 하는가.

어디 광고뿐인가. 장애를 다룬 다양한 기사에는 ‘지적장애를 앓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소아마비를 앓아온’ 등과 같이 장애를 앓는다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에도 장애를 가진 이들은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처럼 소개되거나 그려지곤 한다.

딸이 결혼할 때 손잡고 함께 입장해 줄 수 있는 ‘정상적인’ ‘보통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 위해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피땀 쏟으며 걸음 연습을 멈추지 않는 장애인 아버지가 감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어느 기한까지 일어나서 걷지 못하면 자신이 죽겠다고 장애인 아들을 협박하며 재활 훈련을 강요하던 어떤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했던 적도 있다. 제목도 ‘움직여라! 발가락’이었던 한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벌써 제목부터 벌떡 일어나 걸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느껴지게 했다.

“너 그러다 평생 휠체어 타면 어떻게 할래?” “너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서 살 수 있어?” “너 못 걸으면 너랑 엄마랑 제삿날 같을 줄 알아!” “그렇게 주저앉으면 어쩌자는 거야?” 일어서지 못하는 아이를 두고 그 엄마는 내내 이렇게 짜증 섞인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까지 발가락이 안 움직이면, 며칠까지 못 걸으면, 이런 부담스런 데드라인을 강요하며 끊임없이 아들을 채근하고 있었다. 척수를 다쳐 앞으로는 하지와 한쪽 손이 마비된 채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될 거라 말하는 의사와 그래도 기적을 바라는 가족들. 아이는 마치 곧 나을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빨리 나으라는 강요와 협박 속에 위축돼 있는데 그걸 ‘가족애’와 ‘희망’이라는 근사한 포장지로 싸서 방송하고 있었다.

장애는 게으르고 의지가 없어서 앓는 병이 아니다. 또 무엇보다 장애인으로 사느니 함께 죽자고 종용할 만큼 끔찍한 불행도, 앞이 깜깜하기만 한 절망도 아니다. 그저, 이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그 다른 삶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방송은 시종일관 장애는 결코 한 가족에게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기필코 낫지 않으면 안 되는 끔찍한 질병처럼 보여 주었다. 결국, 이 방송은 장애인 시청자들에게 무례했고 장애를 이해하는 바람직한 시각도 제시하지 못한 셈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를 여전히 한 개인이 ‘앓는’ 질병이나 불행 정도로 인식하는 한 그 앞에 놓인 계단을 제거하는 능동적인 변화는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가 장애를 이해하는 시각을 자꾸만 사회에서 개인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장애를 ‘앓는’ 사회와 장애를 ‘아는’ 사회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최근에 구찌(GUCCI)와 애플이 보여 준 사례를 보면 그 차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구찌 뷰티 모델 엘리 골드 스테인(Ellie Goldstein)
    [출처] 구찌 공식 인스타그램

  • 세계개발자회의에서 발표하는 메그 프로스트
    [출처] APPLE 유튜브

세계적인 명품사인 구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모델 엘리 골드 스테인(Ellie Goldstein)을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또 애플의 올해 세계개발자회의(WWDC2020)에서는 제품 디자인 디렉터 매그 프로스트(Meg Frost)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등장해서 애플 맵스의 새 기능을 설명했다. 멋진 최신형 전동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그녀는 그저 다른 스피커들과 똑같이 등장해서 자신이 맡은 상품의 새 기능을 설명하고 내려갔을 뿐 이후에 그 어떤 광고나 기사에서도 그녀의 장애에 대한 그 어떤 진부한 설명도 덧붙지 않았다. 장애를 개인이 ‘앓아야’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질병을 가진, 도와주어야 하는 환자로 인식되지만, 장애를 ‘아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이렇게 개성 있는 한 사람이 된다. 대중의 인식에 편승하지 않고 선도해 갈 수 있는 기업과 미디어의 관점은 어디 있어야 하는지 늘 새롭게 돌아보아야 한다.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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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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