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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코드로 미디어 읽기

이음광장 마녀의 거울을 깨뜨릴 때

  • 차미경 작가
  • 등록일 2021-01-15
  • 조회수933

영화 <조제> 포스터 이미지
[사진출처]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페이스북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거울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묻는 마녀에게 매번 야속하게도 마녀가 아니라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답한다. 마녀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엔 웬만하면 마녀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거울은 매번 눈치도 없이 진실을 말한다는 명목으로 마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모멸감을 주는 돌직구를 참 무감하게 던진다. 마녀의 비극은 거기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장애인에게 있어 ‘장애 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상, 혹은 장애인이라는 집단을 바라보는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통합의 사회적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이익섭·신은경, 2005. 『장애 정체성 개념화 연구』). 이 정의에 의하면 장애 정체성이란 어쩌면 세상이라는 거울이 장애에 대해 답하는 대답의 총체인지도 모른다. 특히 미디어는 그동안 장애에 대한 냉혹한 현실을 무감하게 비춰온 가장 지독한 거울 중 하나다. ‘미디어’라는 거대한 거울은 그동안 장애인의 사랑을 어떻게 비춰줬을까.

아주 어릴 적 〈불행한 여자의 행복〉이란 드라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사고로 장애를 입은 여주인공이 휠체어에 앉아 너무도 슬픈 얼굴로 남편을 밀어내던 모습이었다. 그 몸으로는 아기를 낳아 줄 수도 없고 아내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서. 어린 맘에 나도 이다음에 커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렇게 일부러 나쁘게 굴면서 밀어내야 하나 보다 생각했었다. 또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라는 영화에서도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주인공이 자기는 아내로서 자격이 없다며 모질게 남편을 밀어내는 모습이 나왔는데, 헌신적인 남편인데도 구박을 당하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안돼 보였다. 그런데도 여자의 곁을 끝내 지키는 남자의 모습은 그래서 더 멋져 보이기도 했다.

책이라고 달랐을까. 한때 서점가를 뜨겁게 달궜던 베스트셀러인 김윤희 작가의 『잃어버린 너』는 영화로까지 제작되면서 최고의 화제를 모았는데, 그 내용 역시도 주인공 엄충식이 사고로 장애를 입자 자신에게서 연인을 떠나보내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해 자신을 숨기며 사는 모습이 마치 순애보처럼 그려졌다. 이런 설정은 멜로영화의 고전이라 불리는 〈클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손예진과 조승우가 주연한 이 영화는 참전 중 폭격으로 실명한 사실을 연인에게 감추기 위해 약속장소에 미리 나와 예행연습까지 해가며 보이는 척 연기하는 모습이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대개 장애를 가진 주인공에게는 사랑도 마치 시혜처럼, 천사들의 은혜처럼 주어진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종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공주의 모습이 그렇다. 맨 처음 종두가 공주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는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주에게 많은 장애 여성들이 공분했고 그녀의 사랑을 공감하지 못했다. ‘저런 여자한테 성욕이 느껴지냐’며 종두를 변태 강간범 취급하던 경찰의 태도에서 종두의 공주에 대한 사랑은 더 특별한 것이 되었고 장애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비장애인 남성으로 착하게 이미지화되었다.

종두와 공주에게서 느낀 노여움과 안타까움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던 건 무척 다행이긴 하다. 물론 조제와 츠네오 두 사람의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성장했으며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장애’에 갇히지 않고 당당하고 적극적이고 그녀만의 특별한 에너지를 발산했던 조제는 관객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영화는 올해 〈조제〉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어 개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2004년의 멋진 조제를 2020년의 새로운 조제가 결코 따라갈 수 없었다.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은유였던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희미하게 다 지우고 조제만을 내세웠지만 새로운 조제는 원작보다 더 매력적이지도 독특하지도 않았다. 밝고 빛나는 색감을 무채색으로 톤다운시킨 느낌이랄까. “네가 떠나면 사람들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몸도 성치 않은 나를 범했다고….” 특히 영석과 사랑을 나눈 후에 영석에게 했던 조제의 이 대사는 정말 듣기 참담할 지경이었다. 이 대사 하나만으로도 마치 종두가 공주를 범하려 했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려놓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원작보다 계절이나 배경 등 영상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나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2004년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독특한 매력의 조제에게 끌리던 츠네오의 설렘은 영석에게로 와서는 동정과 연민이 되고, 원작에서 호기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조제의 생기발랄한 모습은 현실 도피적인 망상을 지닌 음울한 장애인의 모습이 된다. 2004년의 조제보다 더 좋은 휠체어를 사용하고 시대에 맞게 스스로 차를 운전하지만, 2020년의 조제는 이 시대에 비추어 볼 장애인의 자화상은 될 수 없어 보인다.

휠체어를 탄 안주인에 대해 ‘여자구실’은 제대로 하겠냐며 가사도우미가 뒷담화하는 장면이 이 시대 아침 드라마에서 버젓이 그려지고, 장애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어려우며 남편이나 아내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오롯이 담으면서도 로맨틱함으로 포장되는 영화와 드라마도 아직 많은 현실이다. 이런 편견 가득한 왜곡된 거울을 바라보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과연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까. 마녀가 거울의 대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의 온전한 자아상, 긍정적인 장애 정체성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합적인 환경과 의식 수준, 모든 관계와 시스템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오랜 시간 축적되고 체화된 총체적인 사고와 경험의 결과이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제대로 비추지 않는 왜곡된 거울이라면 차라리 깨버려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거울이 필요하다!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myrodem1004@naver.com

상세내용

영화 <조제> 포스터 이미지
[사진출처]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페이스북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거울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묻는 마녀에게 매번 야속하게도 마녀가 아니라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답한다. 마녀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엔 웬만하면 마녀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거울은 매번 눈치도 없이 진실을 말한다는 명목으로 마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모멸감을 주는 돌직구를 참 무감하게 던진다. 마녀의 비극은 거기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장애인에게 있어 ‘장애 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상, 혹은 장애인이라는 집단을 바라보는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통합의 사회적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이익섭·신은경, 2005. 『장애 정체성 개념화 연구』). 이 정의에 의하면 장애 정체성이란 어쩌면 세상이라는 거울이 장애에 대해 답하는 대답의 총체인지도 모른다. 특히 미디어는 그동안 장애에 대한 냉혹한 현실을 무감하게 비춰온 가장 지독한 거울 중 하나다. ‘미디어’라는 거대한 거울은 그동안 장애인의 사랑을 어떻게 비춰줬을까.

아주 어릴 적 〈불행한 여자의 행복〉이란 드라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사고로 장애를 입은 여주인공이 휠체어에 앉아 너무도 슬픈 얼굴로 남편을 밀어내던 모습이었다. 그 몸으로는 아기를 낳아 줄 수도 없고 아내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서. 어린 맘에 나도 이다음에 커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렇게 일부러 나쁘게 굴면서 밀어내야 하나 보다 생각했었다. 또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라는 영화에서도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주인공이 자기는 아내로서 자격이 없다며 모질게 남편을 밀어내는 모습이 나왔는데, 헌신적인 남편인데도 구박을 당하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안돼 보였다. 그런데도 여자의 곁을 끝내 지키는 남자의 모습은 그래서 더 멋져 보이기도 했다.

책이라고 달랐을까. 한때 서점가를 뜨겁게 달궜던 베스트셀러인 김윤희 작가의 『잃어버린 너』는 영화로까지 제작되면서 최고의 화제를 모았는데, 그 내용 역시도 주인공 엄충식이 사고로 장애를 입자 자신에게서 연인을 떠나보내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해 자신을 숨기며 사는 모습이 마치 순애보처럼 그려졌다. 이런 설정은 멜로영화의 고전이라 불리는 〈클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손예진과 조승우가 주연한 이 영화는 참전 중 폭격으로 실명한 사실을 연인에게 감추기 위해 약속장소에 미리 나와 예행연습까지 해가며 보이는 척 연기하는 모습이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대개 장애를 가진 주인공에게는 사랑도 마치 시혜처럼, 천사들의 은혜처럼 주어진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종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공주의 모습이 그렇다. 맨 처음 종두가 공주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는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주에게 많은 장애 여성들이 공분했고 그녀의 사랑을 공감하지 못했다. ‘저런 여자한테 성욕이 느껴지냐’며 종두를 변태 강간범 취급하던 경찰의 태도에서 종두의 공주에 대한 사랑은 더 특별한 것이 되었고 장애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비장애인 남성으로 착하게 이미지화되었다.

종두와 공주에게서 느낀 노여움과 안타까움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던 건 무척 다행이긴 하다. 물론 조제와 츠네오 두 사람의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성장했으며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장애’에 갇히지 않고 당당하고 적극적이고 그녀만의 특별한 에너지를 발산했던 조제는 관객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영화는 올해 〈조제〉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어 개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2004년의 멋진 조제를 2020년의 새로운 조제가 결코 따라갈 수 없었다.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은유였던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희미하게 다 지우고 조제만을 내세웠지만 새로운 조제는 원작보다 더 매력적이지도 독특하지도 않았다. 밝고 빛나는 색감을 무채색으로 톤다운시킨 느낌이랄까. “네가 떠나면 사람들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몸도 성치 않은 나를 범했다고….” 특히 영석과 사랑을 나눈 후에 영석에게 했던 조제의 이 대사는 정말 듣기 참담할 지경이었다. 이 대사 하나만으로도 마치 종두가 공주를 범하려 했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려놓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원작보다 계절이나 배경 등 영상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나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2004년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독특한 매력의 조제에게 끌리던 츠네오의 설렘은 영석에게로 와서는 동정과 연민이 되고, 원작에서 호기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조제의 생기발랄한 모습은 현실 도피적인 망상을 지닌 음울한 장애인의 모습이 된다. 2004년의 조제보다 더 좋은 휠체어를 사용하고 시대에 맞게 스스로 차를 운전하지만, 2020년의 조제는 이 시대에 비추어 볼 장애인의 자화상은 될 수 없어 보인다.

휠체어를 탄 안주인에 대해 ‘여자구실’은 제대로 하겠냐며 가사도우미가 뒷담화하는 장면이 이 시대 아침 드라마에서 버젓이 그려지고, 장애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어려우며 남편이나 아내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오롯이 담으면서도 로맨틱함으로 포장되는 영화와 드라마도 아직 많은 현실이다. 이런 편견 가득한 왜곡된 거울을 바라보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과연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까. 마녀가 거울의 대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의 온전한 자아상, 긍정적인 장애 정체성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합적인 환경과 의식 수준, 모든 관계와 시스템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오랜 시간 축적되고 체화된 총체적인 사고와 경험의 결과이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제대로 비추지 않는 왜곡된 거울이라면 차라리 깨버려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거울이 필요하다!

차미경

차미경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이다! 10여 년간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 및 소외계층을 위한 방송에 참여했으며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애학 연구자로서 문화·예술 관련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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