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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지리산 편지

이음광장 흙으로 새기는 시간

  • 최은주 작가
  • 등록일 2021-01-13
  • 조회수492

어제와 같은 해가 떠올랐는데 새해라네요. 새로운 해라고 별다를 일 없는 생활이고, 또 아주 삐뚜로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그냥 이대로 살아보기로 합니다. 새해의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쨍하게 차갑습니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 하나 따서 입에 물고 시린 손을 비비며 도자 공방으로 들어서면 축축한 흙내음이 스며듭니다. 숨을 한껏 들이쉬며 한 바퀴 눈길을 돌려보고는 자리를 잡고 흙을 만집니다. 오늘은 컵, 내일은 접시, 모레는 벽을 장식할 나무 그림 도판, 그다음에는 꽃병을 하나 만들까….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만듭니다. 계획이나 작정을 할 줄 모르고 그냥 마음이 흐르는 대로 빚어봅니다. 한동안은 공방을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데, 만들고 싶은 것들을 많이 만들고 나니 좀 해소되었는지 요즘은 조금 덜 합니다.

도자공예를 하면서 나는 뭐가 됐든 만드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구나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삼십대에는 온갖 바늘로 입거나 덮을 것을 만들기도 했고, 여전히 음식을 만들어 주변 지인들과 나눠 먹는 일이 좋고, 나이 마흔을 넘어 배운 도자공예로는 만들고 싶은 것이 아직도 무궁무진합니다. 계속 뭔가를 만들어대고 있는 거죠. 저는 만들 수 있어서 좋고, 만들고 싶은 것이 계속 생겨나는 것도 좋고, 만드는 동안의 무념무상이 좋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그 사람의 기운이 담겨 각각 나름의 예쁨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 쓰임새가 있는 물건을 만들어 좋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아직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으니 계속할밖에요.

공방은 제가 아는 지식을 나눠주고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렁물렁 질척거리던 흙이 제 마음 한 자락이 담긴 손을 거쳐 서늘한 숙성과 뜨거운 익힘의 시간을 지나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예쁜 도기가 됩니다. 흙을 만져 형태를 빚고 가마에 구워내는데, 가마 문을 열고 기물들을 꺼낼 때만은 천하제일 도공이 된 듯한 기분을 혼자 냅니다. 내가 조금 남다른 특별한 일을 해냈다는 기쁨과 나름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환희, 예측되지 않은 기이한 변이를 만나는 일도 즐겁습니다. 흙이 불을 만나 이루어지는 놀라운 마술을 제가 어설프게나마 할 수 있다는 것은 제 어깨를 으쓱 올라가게 합니다. 세상 사람 중 흙을 빚어 가마로 구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 어려운 일을 제가 조금은 할 줄 안다는 거죠! 내가 무언가를 할 줄 안다는 건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하며 생의 의지를 다질 수도 있게 합니다.

만든다는 행위는 저에겐 어쩌면 존재의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사는 일이 가끔은 노동 능력이 없고, 쓰일 데가 없는 무용한 존재이자, 부담스러운 짐 취급을 당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거기 그냥 그렇게 있어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말하고 글로 쓰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는 나의 쓸모와 유용함을 인정받으려 너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스스로 반문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인정을 우선순위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존재 증명에 짓눌리지 않게, 할 수 있음이 즐거울 만큼만 하자고 다짐해봅니다. 창조, 창작, 생산, 뭔가를 만들어내는 쾌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이 부분에서 많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이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하게 발굴되고 발견되어 존재 자체의 당위성과 함께 창작, 창조, 생산의 자부심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흙이 손을 거쳐 숙성과 익힘의 시간을 지나 쓰임을 얻는 예쁜 도기가 됩니다.

이 동네에 이사 와서 도자공예를 배우고 동네에 도자 공방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공방 운영에서 제일 큰 목돈이 들어가는 것은 가마 구입이었습니다. 스물다섯 명의 주변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가마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공방이 저만의 개인 작업실이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쓰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도자기에 관심 있고 배우고 싶어 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제가 아는 지식을 나눠주고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해마다 도자기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방은 나만의 자기만족을 넘어서 나눔의 공간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엮어 만나게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저에게 도자공예를 좀 더 깊이 있게 가르쳐주고 도와준 친구가 해준 말이 있습니다.

“흙도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덩어리였던 기억을 천천히 지우고 예쁜 형태의 기억을 다시 천천히 입혀줘야 한다. 성급하게 기억을 바꾸면 새로운 기억이 잘 입혀지지 않는다. 마음을 담아 ‘너는 덩어리였지만 이제는 멋진 모습으로 변신할 거야’ 하고 세심한 손길로 천천히 새겨줘야 새 기억이 잘 자리 잡는다.”

제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모난 덩어리처럼 구는 시간은 곱게 매만지고, 특출나진 않지만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무늬와 형태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천천히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2021년은 예쁘고 고운 무늬를 새기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눈 덮인 지리산 자락에서 꼼지락 올림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사진 출처. 필자 제공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상세내용

어제와 같은 해가 떠올랐는데 새해라네요. 새로운 해라고 별다를 일 없는 생활이고, 또 아주 삐뚜로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그냥 이대로 살아보기로 합니다. 새해의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쨍하게 차갑습니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 하나 따서 입에 물고 시린 손을 비비며 도자 공방으로 들어서면 축축한 흙내음이 스며듭니다. 숨을 한껏 들이쉬며 한 바퀴 눈길을 돌려보고는 자리를 잡고 흙을 만집니다. 오늘은 컵, 내일은 접시, 모레는 벽을 장식할 나무 그림 도판, 그다음에는 꽃병을 하나 만들까….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만듭니다. 계획이나 작정을 할 줄 모르고 그냥 마음이 흐르는 대로 빚어봅니다. 한동안은 공방을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데, 만들고 싶은 것들을 많이 만들고 나니 좀 해소되었는지 요즘은 조금 덜 합니다.

도자공예를 하면서 나는 뭐가 됐든 만드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구나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삼십대에는 온갖 바늘로 입거나 덮을 것을 만들기도 했고, 여전히 음식을 만들어 주변 지인들과 나눠 먹는 일이 좋고, 나이 마흔을 넘어 배운 도자공예로는 만들고 싶은 것이 아직도 무궁무진합니다. 계속 뭔가를 만들어대고 있는 거죠. 저는 만들 수 있어서 좋고, 만들고 싶은 것이 계속 생겨나는 것도 좋고, 만드는 동안의 무념무상이 좋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그 사람의 기운이 담겨 각각 나름의 예쁨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 쓰임새가 있는 물건을 만들어 좋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아직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으니 계속할밖에요.

공방은 제가 아는 지식을 나눠주고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렁물렁 질척거리던 흙이 제 마음 한 자락이 담긴 손을 거쳐 서늘한 숙성과 뜨거운 익힘의 시간을 지나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예쁜 도기가 됩니다. 흙을 만져 형태를 빚고 가마에 구워내는데, 가마 문을 열고 기물들을 꺼낼 때만은 천하제일 도공이 된 듯한 기분을 혼자 냅니다. 내가 조금 남다른 특별한 일을 해냈다는 기쁨과 나름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환희, 예측되지 않은 기이한 변이를 만나는 일도 즐겁습니다. 흙이 불을 만나 이루어지는 놀라운 마술을 제가 어설프게나마 할 수 있다는 것은 제 어깨를 으쓱 올라가게 합니다. 세상 사람 중 흙을 빚어 가마로 구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 어려운 일을 제가 조금은 할 줄 안다는 거죠! 내가 무언가를 할 줄 안다는 건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하며 생의 의지를 다질 수도 있게 합니다.

만든다는 행위는 저에겐 어쩌면 존재의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사는 일이 가끔은 노동 능력이 없고, 쓰일 데가 없는 무용한 존재이자, 부담스러운 짐 취급을 당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거기 그냥 그렇게 있어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말하고 글로 쓰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는 나의 쓸모와 유용함을 인정받으려 너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스스로 반문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인정을 우선순위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존재 증명에 짓눌리지 않게, 할 수 있음이 즐거울 만큼만 하자고 다짐해봅니다. 창조, 창작, 생산, 뭔가를 만들어내는 쾌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이 부분에서 많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이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하게 발굴되고 발견되어 존재 자체의 당위성과 함께 창작, 창조, 생산의 자부심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흙이 손을 거쳐 숙성과 익힘의 시간을 지나 쓰임을 얻는 예쁜 도기가 됩니다.

이 동네에 이사 와서 도자공예를 배우고 동네에 도자 공방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공방 운영에서 제일 큰 목돈이 들어가는 것은 가마 구입이었습니다. 스물다섯 명의 주변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가마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공방이 저만의 개인 작업실이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쓰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도자기에 관심 있고 배우고 싶어 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제가 아는 지식을 나눠주고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해마다 도자기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방은 나만의 자기만족을 넘어서 나눔의 공간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엮어 만나게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저에게 도자공예를 좀 더 깊이 있게 가르쳐주고 도와준 친구가 해준 말이 있습니다.

“흙도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덩어리였던 기억을 천천히 지우고 예쁜 형태의 기억을 다시 천천히 입혀줘야 한다. 성급하게 기억을 바꾸면 새로운 기억이 잘 입혀지지 않는다. 마음을 담아 ‘너는 덩어리였지만 이제는 멋진 모습으로 변신할 거야’ 하고 세심한 손길로 천천히 새겨줘야 새 기억이 잘 자리 잡는다.”

제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모난 덩어리처럼 구는 시간은 곱게 매만지고, 특출나진 않지만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무늬와 형태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천천히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2021년은 예쁘고 고운 무늬를 새기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눈 덮인 지리산 자락에서 꼼지락 올림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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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사진 출처.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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