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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지리산 편지

이음광장 허기와 온기를 채우는 함께살이

  • 최은주 작가
  • 등록일 2020-12-16
  • 조회수440

겨울 채비의 시작을 알리는 곶감 만들기

겨울이 막 시작된 하늘은 더없이 맑고 높습니다. 코로나로 심각한 세상사 이야기가 들리면 막막한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해보다, 쨍하게 파랗고 높은 하늘을 보면 또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합니다. 자연이 가까이 있는 산골에 산다는 것은 사계절을 온몸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계절마다 다른 바람이 부는 걸 여기 살면서 알았답니다. 살랑이며 스쳐 가는 봄바람 끝자락엔 꽃향기가 담겨 있고, 여름엔 물기 많은 햇살이 느린 바람에 묵직하게 묻어 있습니다. 가을바람은 바삭하게 마른 햇살을 담아와서는 너른 들판을 스윽 훑고 지나가고, 깊은 산 계곡 얼음장을 통과한 겨울바람은 할퀴듯 휘몰아쳐 갑니다.

바람결이 거칠어지면 산골살이의 겨울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보일러에 난방유를 채우고, 겨우내 먹을 두어 자루의 쌀을 사서 쟁여두고, 일 년 양식이 될 김장을 하고, 주홍빛 감을 깎아 그늘진 곳에 걸어두면 비로소 저의 겨울 준비는 완료됩니다.

감을 깎아 말려 곶감을 만드는 일은 우리 집 겨우살이의 밑천이고, 김장김치는 일 년 동안 밑반찬으로 만두로 김치찌개로 부침개로 밥상에 매일 올라 허기를 채울 밑천입니다. 감 수천 개를 깎고 겨울 최대 양식인 배추 오십여 포기를 김장하기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버겁고 힘들지만, 온갖 지인의 손을 빌려 노동인 양 놀이인 양 해냅니다. 어떤 노동은 여러 사람이 손을 보태 함께 하면 흥겨운 생산적인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생산적인 놀이가 되기 위해선 물론 기꺼운 마음 내기, 응당한 대우, 각자의 힘에 맞는 적정량의 노동 강도가 전제되어야겠지요.

동네 이웃과 함께 한 겨우살이 준비

7~8년째 이 놀이 같은 노동을 반복할 때마다 누구와 함께 너무 힘들지 않고 재미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김장도, 감 깎는 일도,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 일도, 어쩌면 제 삶의 모든 일이 놀이와 노동의 경계에 있습니다. 특히 도자기를 빚을 때 놀이까지만 하고 노동이 되지 않게 하려 합니다. 올해 김장은 놀이였습니다. 기꺼운 마음을 내준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부담되지 않을 만큼 적절하게 일을 나눠서 하고 함께 즐기는 밥상을 누렸습니다. 제 입에는 꽤 맛있는 김치가 만들어져 몇 집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함께 일하고 놀고 즐기고 나누기가 어우러진 김장잔치였습니다.

저의 삶은 자립 자조 자생이 아니라 공립 공조 공생의 삶입니다. 주변에 참 많이 기대고, 나눠주고 나눔 받는 것도 좋아하고, 여럿이 함께 놀거나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누구나 부족하고 모자람이 있는 생명이니 서로 돕고 나누며 서로의 선함을 드러내고 확인하며 사는 방식이 공생이 아닐까 합니다. 삶의 고단함과 날섦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각자도생이나 자력갱생보다는 동고동락 공존하기를 바랍니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미적 작품을 만드는 인간의 창조활동’이라고 하고, 예술가는 ‘표현적인 창조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이 말에 끼워 맞추자면, 저는 이번 달에 ‘김장과 감 깎기’라는 창조활동을 동네 친구들과 함께 집단창작을 했습니다. 만 개에 이르는 감을 깎아 곶감이라는 창작물을 만들고, 오십 포기의 배추를 김장김치로 만드는 창조활동을, 동네 친구 십여 명과 함께 해냈지요.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앉아 햇볕을 받으며 각자의 최선으로 일하던 그 순간에, 같이 일하고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일의 고됨과 즐거움을 나누는 대화 속에, 짙은 색은 사라지고 빛바랜 색들만 남은 계절에 주홍색을 환하게 드러내며 잘 말라가는 감에, 그 먹거리가 저희 집에 머물거나 지나는 이들에게 허기와 온기를 채우는 그 순간에, 세상 유일하면서 찰나인 아름다운 예술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예술은 제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의 삶의 모습이 각자의 예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술을 하고 있다면 많은 부분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 덕분에 이뤄지고 완성되는 예술입니다.

추워진 날씨보다 코로나란 녀석이 우리를 더 움추러들게 하는 시절입니다. 마스크 없이 지내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금 당연하게 지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잘 다독이며 지내야겠구나 생각해봅니다. 올겨울 모쪼록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며 이 시절을 무탈하게 잘 지내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겨울이 막 얼굴을 내민 날 지리산에서 꼼지락 최은주 드림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사진출처.필자 제공

최은주

최은주 

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상세내용

겨울 채비의 시작을 알리는 곶감 만들기

겨울이 막 시작된 하늘은 더없이 맑고 높습니다. 코로나로 심각한 세상사 이야기가 들리면 막막한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해보다, 쨍하게 파랗고 높은 하늘을 보면 또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합니다. 자연이 가까이 있는 산골에 산다는 것은 사계절을 온몸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계절마다 다른 바람이 부는 걸 여기 살면서 알았답니다. 살랑이며 스쳐 가는 봄바람 끝자락엔 꽃향기가 담겨 있고, 여름엔 물기 많은 햇살이 느린 바람에 묵직하게 묻어 있습니다. 가을바람은 바삭하게 마른 햇살을 담아와서는 너른 들판을 스윽 훑고 지나가고, 깊은 산 계곡 얼음장을 통과한 겨울바람은 할퀴듯 휘몰아쳐 갑니다.

바람결이 거칠어지면 산골살이의 겨울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보일러에 난방유를 채우고, 겨우내 먹을 두어 자루의 쌀을 사서 쟁여두고, 일 년 양식이 될 김장을 하고, 주홍빛 감을 깎아 그늘진 곳에 걸어두면 비로소 저의 겨울 준비는 완료됩니다.

감을 깎아 말려 곶감을 만드는 일은 우리 집 겨우살이의 밑천이고, 김장김치는 일 년 동안 밑반찬으로 만두로 김치찌개로 부침개로 밥상에 매일 올라 허기를 채울 밑천입니다. 감 수천 개를 깎고 겨울 최대 양식인 배추 오십여 포기를 김장하기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버겁고 힘들지만, 온갖 지인의 손을 빌려 노동인 양 놀이인 양 해냅니다. 어떤 노동은 여러 사람이 손을 보태 함께 하면 흥겨운 생산적인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생산적인 놀이가 되기 위해선 물론 기꺼운 마음 내기, 응당한 대우, 각자의 힘에 맞는 적정량의 노동 강도가 전제되어야겠지요.

동네 이웃과 함께 한 겨우살이 준비

7~8년째 이 놀이 같은 노동을 반복할 때마다 누구와 함께 너무 힘들지 않고 재미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김장도, 감 깎는 일도,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 일도, 어쩌면 제 삶의 모든 일이 놀이와 노동의 경계에 있습니다. 특히 도자기를 빚을 때 놀이까지만 하고 노동이 되지 않게 하려 합니다. 올해 김장은 놀이였습니다. 기꺼운 마음을 내준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부담되지 않을 만큼 적절하게 일을 나눠서 하고 함께 즐기는 밥상을 누렸습니다. 제 입에는 꽤 맛있는 김치가 만들어져 몇 집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함께 일하고 놀고 즐기고 나누기가 어우러진 김장잔치였습니다.

저의 삶은 자립 자조 자생이 아니라 공립 공조 공생의 삶입니다. 주변에 참 많이 기대고, 나눠주고 나눔 받는 것도 좋아하고, 여럿이 함께 놀거나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누구나 부족하고 모자람이 있는 생명이니 서로 돕고 나누며 서로의 선함을 드러내고 확인하며 사는 방식이 공생이 아닐까 합니다. 삶의 고단함과 날섦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각자도생이나 자력갱생보다는 동고동락 공존하기를 바랍니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미적 작품을 만드는 인간의 창조활동’이라고 하고, 예술가는 ‘표현적인 창조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이 말에 끼워 맞추자면, 저는 이번 달에 ‘김장과 감 깎기’라는 창조활동을 동네 친구들과 함께 집단창작을 했습니다. 만 개에 이르는 감을 깎아 곶감이라는 창작물을 만들고, 오십 포기의 배추를 김장김치로 만드는 창조활동을, 동네 친구 십여 명과 함께 해냈지요.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앉아 햇볕을 받으며 각자의 최선으로 일하던 그 순간에, 같이 일하고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일의 고됨과 즐거움을 나누는 대화 속에, 짙은 색은 사라지고 빛바랜 색들만 남은 계절에 주홍색을 환하게 드러내며 잘 말라가는 감에, 그 먹거리가 저희 집에 머물거나 지나는 이들에게 허기와 온기를 채우는 그 순간에, 세상 유일하면서 찰나인 아름다운 예술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예술은 제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의 삶의 모습이 각자의 예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술을 하고 있다면 많은 부분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 덕분에 이뤄지고 완성되는 예술입니다.

추워진 날씨보다 코로나란 녀석이 우리를 더 움추러들게 하는 시절입니다. 마스크 없이 지내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금 당연하게 지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잘 다독이며 지내야겠구나 생각해봅니다. 올겨울 모쪼록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며 이 시절을 무탈하게 잘 지내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겨울이 막 얼굴을 내민 날 지리산에서 꼼지락 최은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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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살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comaenge@naver.com

사진출처.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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