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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국 행위예술가

인터뷰 나의 몸, 나의 언어, 나의 무기

  • 김소연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19-11-27
  • 조회수445

인터뷰

이민희 사진작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매일매일, 뻔하지 않게

김소연 연극평론가

강성국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05년 한국실험예술제로 막 데뷔했을 때이다. 25세 청년이었지만 작은 몸과 앳된 얼굴이 소년 같았던, 하지만 무대에 서면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퍼포머였다. 데뷔 이후 그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 작고 단단한 퍼포머의 무대가 이어졌다. 행위예술만이 아니다. 양길호 안무가와 협업한 무용 <핏줄>은 2006년 CJ영페스티벌 무용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작품은 지금도 국내외에서 공연을 계속하고 있는 강성국 작가의 대표작이다. 장애 비장애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무용극 <브라더(brother)>(2008), KBS 다큐멘터리 <세 번의 만남, 강성국 편>에서도 소개되었던, 소소한 일상을 재치있게 그려낸 <라면 퍼포먼스>(2009),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감정을 세세하게 전개하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복합극 <오! 베이비(Oh! Baby)>(2010), 제목처럼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어가 되어 공간에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몸시>(2018) 등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영화 <눈이라도 내렸으면>(2015)도 있다.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은 차고 넘칠 것이다.

강성국은 행위예술가이면서 무용수이고, 연출가이면서 안무가이자, 영화배우이다. 구성, 연출, 출연을 도맡아 하는 1인 퍼포먼스를 창작하고 공연하지만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작업도 한다. 그런가 하면 움직임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이 데뷔 이후 지난 15년 그의 시간에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 시간 동안 청년은 중년이 되고 신진예술가는 중견예술가가 되었다. 강성국 작가와의 인터뷰는 그 빼곡한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께도 그 뜨거운 시간이 전해지길 바란다. 나의 몸은 나의 무기. 강성국의 이야기다.

시각예술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2003년 한국실험예술제에서 장애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예술치료워크숍이 있었다. 워크숍 마지막 프로그램이 걷고 싶은 거리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을 하고 며칠 잠을 못 잤다. 그 정도로 희열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부터 퍼포먼스에 매료되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좋다.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여전히 좋다. 무대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냥 좋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웃음) 무대의 희열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무대에서 희열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무대에서 실수하고 몰입을 못 하면 관객들이 공연을 잘 봤다고 해도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공연에 대해 뭐 이딴 식으로 해, 하면서 폄하해도 내가 온전히 집중한 공연에서는 희열을 느낀다. 관객과의 호흡이라고 할까, 공감의 순간이 있다. 그때 오는 뭉텅이의 감정이 있다.

한국실험예술제로 데뷔했다. 데뷔 직후부터 많은 작품을 했는데, 데뷔작에 대해서 듣고 싶다. 어떤 작품인가?

제목은 <검은 피>다. 6·25전쟁 희생자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바닥에는 태극기가 있고 나는 이층 높이에서 태극기로 구슬 50개를 던진다. 구슬을 던지고 움직임을 하면서 내려와서 태극기 위에 올라서 옷을 벗고 빨간 물감을 머리 위에서 붓는다. 구슬은 눈물의 의미였다. 이 작품 전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많이 출연해서 퍼포먼스는 어렵지 않았다. 무슨 용기로 관객들 앞에서 옷을 다 벗었는지 모르겠다. (웃음)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데뷔 전에도 퍼포머로 무대에 많이 섰다고 하는데, 데뷔 이후 작가이자 퍼포머로 정말 많은 무대에 섰다. 그렇게 계속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도 있나?

한국실험예술제와 김백기 예술감독이 내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많이 애썼다.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알코올이 근육을 이완해서 강직으로 인한 움직임이 완화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데뷔 당시에는 거의 홍대에서 살았다. 매일 작가들하고 새벽까지 술 마시고 아침에 2호선 타서는 잠들어서 한 바퀴 빙 돌고 그랬다. 작업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강한 체력이다. 일종의 네트워킹이자 협업 프리프로덕션인 셈이다. 단독 퍼포먼스와 협업의 차이가 있나?

협업하면 작업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그러면서 작품이 점점 발전하는 것이 보인다. 그게 좋다. 단독 작업은 많이 외롭다. 창작과정도 그렇고 공연 과정도 그렇다. 오브제가 많은 작품도 있는데, 그럴 때 나 혼자 이동하고 세팅 하는 것이 어렵다. 서울이면 택시라도 타겠는데, 지방이면 죽어난다.

협업의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움직임이 필요한데 내가 그 움직임을 하지 못할 때, 그게 제일 마음이 아프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는데, 무용수들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있는 몸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움직임은 나만의 색깔이고 무기라고 생각한다. 나만큼, 나처럼 움직임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는 없다. 해외 예술가들, 안무가들의 이야기다.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나의 움직임은 유일한 움직임이다. 훈련된, 잘 추는 무용수라도 나의 움직임을 따라 할 수는 없다.

과장 아니다. 유일한 몸이고 유일한 움직임 맞다. 장애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서 꾸준히 활동해온 개척자다. 데뷔 이후 작품 활동 기간이 15년에 이르는데 그동안 슬럼프는 없었나?

공연이 없을 때다. 4월부터 10월까지 공연이 몰려 있는 반면 그 이후부터는 거의 비수기다. 그때가 힘들다. 점점 공연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극장도 많아지고 축제도 많아졌지만 이벤트성 공연들이 성행한다. 나이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올해 마흔이다. 무용하는 분들 이야기가 마흔이 고비라고 한다. 넘기느냐 포기하느냐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체력도 약해지고 무대에 서는 기회도 줄어들고 그러면서 생활도 어려워지고. 마음이 복잡하다. 생각할 것도 많아지고, 하나씩 포기하는 것도 생긴다. 제일 아쉬운 것은 열정이 식는 거다.

열정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 아닐까 싶다. 행위예술을 낯설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창작과정에 대해서도 소개해 달라.

행위예술은 모호하다. 난해한 작품도 많다. 나는 난해한 작품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관객이 공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 작품으로 예를 들면, <몸시>라는 작품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성을 생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나의 경험에서 작품이 나온다.

훈련 과정은 어떤가.

행위예술은 따로 연습하고 그러지 않는다. 행위예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내 생각으로는 공간 감각이다. 행위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장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감각을 익혀야 한다. 기본적으로 공연하기 전에 세 시간 전에 미리 가서 준비한다. 공간을 인지하고 오브제를 어떻게 세팅하고 어떻게 움직일까 구상한다.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움직임워크숍도 많이 하고 있다. 어떻게 진행하나.

몸의 감각을 깨우는 워크숍을 많이 한다. 워크숍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써본다든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본다든지 그렇게 진행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워크숍이 재미없다. 참여자들이 너무 소극적이다. 반면 외국에서 워크숍을 진행하면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재밌다

강성국 작가를 행위예술가, 무용수로 소개한다. 본인은 어떤 역할에 더 비중을 두나.

두 가지 다 좋다. 두 가지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좋다. 영화도 재미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 각각의 매력이 다르다. 행위예술은 규제가 없다. 그게 좋다. 내가 어떤 오브제를 쓸 것인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한다. 지금은 무용도 복합 형식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무용은 보이지 않는 규제가 있다. 무용의 매력은 연습이다. 새로운 작품을 하면 최소 한 달 연습을 한다. 한 달 연습하고 공연을 마쳤을 때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있다. 둘 다 좋다.

어려운 질문일지 모르겠다. 작품이 많은데, 그중에서 강성국이 꼽는 베스트는 무엇인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몸시>. 내가 좋아하는 이성과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물 한 컵을 따라주지 못하는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두 번째는 <라면 퍼포먼스>. 관객과 이야기하면서 라면을 끓이고 나눠 먹는다. 유쾌한 퍼포먼스다. 하나 더 꼽으면 <오! 베이비>. 만약에 내가 2세를 갖게 된다면 혹시 내 장애가 유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풀었다. 1시간짜리 작품이다. <몸시> <라면 퍼포먼스>는 지금도 종종 공연하는데, <오! 베이비>는 지금은 공연하지 않고 있다.

<몸시> <오! 베이비> 모두 사랑이 주제다.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사랑에 관심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2005년 데뷔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도 변하고 예술계도 변했다. 또 최근에는 장애 예술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강성국 작가도 20대에서 40대로, 신진에서 중견으로 변했다. 장애 예술의 경계 없이 작업해왔는데 창작 현장에서 느끼는 장애 예술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도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변화가 있지만 나의 창작활동에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여전히 장애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 부족하다. (공연할 무대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 활동공간을 말하는 거다. 지금 이음센터가 유일하다. 그것 말고는 없다. 가장 필요한 건 작업실, 연습실이다. 연습실을 운영하고 싶어도 만만치 않다. 독서실 같이 1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작업을 많이 하는데, 장애가 있으면 카페 가기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컴퓨터 작업을 발로 하는데, 카페에서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지원사업이다. 2006년부터 계속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공연을 하고 나서 성과보고서 쓰고 정산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거의 한 달 걸린다.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정산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래서 지원사업 안 해야지 하지만, 공연을 만들려면 지원서를 쓰게 된다. 지금 필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정책이나 시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강성국

행위예술가이자 무용가, 온몸컴퍼니 대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전공하고 2005년 한국실험예술제에서 퍼포먼스 작가로 데뷔, 이듬해 2006년에 무용 작품 <핏줄>로 CJ영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외 여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해오고 있으며, 매년 신작발표 혹은 국제교류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철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대만 국제교류 기획공연을 기획하고 주최한 바 있다. 또한 움직임 워크숍 강사로 활동함으로써 비장애 몸과 장애의 몸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수업을 통해 장애 예술가에 대한 인식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페이스북 바로가기 (링크)

김소연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경기문화재단 <커뮤니티와 아트> 콜로키움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kdoonga@naver.com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인터뷰 장소협조. 네스트나다 페이스북 바로가기(링크)

2019년 11월 (10호)

상세내용

인터뷰

이민희 사진작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매일매일, 뻔하지 않게

김소연 연극평론가

강성국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05년 한국실험예술제로 막 데뷔했을 때이다. 25세 청년이었지만 작은 몸과 앳된 얼굴이 소년 같았던, 하지만 무대에 서면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퍼포머였다. 데뷔 이후 그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 작고 단단한 퍼포머의 무대가 이어졌다. 행위예술만이 아니다. 양길호 안무가와 협업한 무용 <핏줄>은 2006년 CJ영페스티벌 무용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작품은 지금도 국내외에서 공연을 계속하고 있는 강성국 작가의 대표작이다. 장애 비장애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무용극 <브라더(brother)>(2008), KBS 다큐멘터리 <세 번의 만남, 강성국 편>에서도 소개되었던, 소소한 일상을 재치있게 그려낸 <라면 퍼포먼스>(2009),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감정을 세세하게 전개하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복합극 <오! 베이비(Oh! Baby)>(2010), 제목처럼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어가 되어 공간에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몸시>(2018) 등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영화 <눈이라도 내렸으면>(2015)도 있다.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은 차고 넘칠 것이다.

강성국은 행위예술가이면서 무용수이고, 연출가이면서 안무가이자, 영화배우이다. 구성, 연출, 출연을 도맡아 하는 1인 퍼포먼스를 창작하고 공연하지만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작업도 한다. 그런가 하면 움직임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이 데뷔 이후 지난 15년 그의 시간에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 시간 동안 청년은 중년이 되고 신진예술가는 중견예술가가 되었다. 강성국 작가와의 인터뷰는 그 빼곡한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께도 그 뜨거운 시간이 전해지길 바란다. 나의 몸은 나의 무기. 강성국의 이야기다.

시각예술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2003년 한국실험예술제에서 장애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예술치료워크숍이 있었다. 워크숍 마지막 프로그램이 걷고 싶은 거리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을 하고 며칠 잠을 못 잤다. 그 정도로 희열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부터 퍼포먼스에 매료되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좋다.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여전히 좋다. 무대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냥 좋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웃음) 무대의 희열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무대에서 희열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무대에서 실수하고 몰입을 못 하면 관객들이 공연을 잘 봤다고 해도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공연에 대해 뭐 이딴 식으로 해, 하면서 폄하해도 내가 온전히 집중한 공연에서는 희열을 느낀다. 관객과의 호흡이라고 할까, 공감의 순간이 있다. 그때 오는 뭉텅이의 감정이 있다.

한국실험예술제로 데뷔했다. 데뷔 직후부터 많은 작품을 했는데, 데뷔작에 대해서 듣고 싶다. 어떤 작품인가?

제목은 <검은 피>다. 6·25전쟁 희생자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바닥에는 태극기가 있고 나는 이층 높이에서 태극기로 구슬 50개를 던진다. 구슬을 던지고 움직임을 하면서 내려와서 태극기 위에 올라서 옷을 벗고 빨간 물감을 머리 위에서 붓는다. 구슬은 눈물의 의미였다. 이 작품 전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많이 출연해서 퍼포먼스는 어렵지 않았다. 무슨 용기로 관객들 앞에서 옷을 다 벗었는지 모르겠다. (웃음)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데뷔 전에도 퍼포머로 무대에 많이 섰다고 하는데, 데뷔 이후 작가이자 퍼포머로 정말 많은 무대에 섰다. 그렇게 계속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도 있나?

한국실험예술제와 김백기 예술감독이 내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많이 애썼다.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알코올이 근육을 이완해서 강직으로 인한 움직임이 완화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데뷔 당시에는 거의 홍대에서 살았다. 매일 작가들하고 새벽까지 술 마시고 아침에 2호선 타서는 잠들어서 한 바퀴 빙 돌고 그랬다. 작업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강한 체력이다. 일종의 네트워킹이자 협업 프리프로덕션인 셈이다. 단독 퍼포먼스와 협업의 차이가 있나?

협업하면 작업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그러면서 작품이 점점 발전하는 것이 보인다. 그게 좋다. 단독 작업은 많이 외롭다. 창작과정도 그렇고 공연 과정도 그렇다. 오브제가 많은 작품도 있는데, 그럴 때 나 혼자 이동하고 세팅 하는 것이 어렵다. 서울이면 택시라도 타겠는데, 지방이면 죽어난다.

협업의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움직임이 필요한데 내가 그 움직임을 하지 못할 때, 그게 제일 마음이 아프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는데, 무용수들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있는 몸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움직임은 나만의 색깔이고 무기라고 생각한다. 나만큼, 나처럼 움직임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는 없다. 해외 예술가들, 안무가들의 이야기다.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나의 움직임은 유일한 움직임이다. 훈련된, 잘 추는 무용수라도 나의 움직임을 따라 할 수는 없다.

과장 아니다. 유일한 몸이고 유일한 움직임 맞다. 장애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서 꾸준히 활동해온 개척자다. 데뷔 이후 작품 활동 기간이 15년에 이르는데 그동안 슬럼프는 없었나?

공연이 없을 때다. 4월부터 10월까지 공연이 몰려 있는 반면 그 이후부터는 거의 비수기다. 그때가 힘들다. 점점 공연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극장도 많아지고 축제도 많아졌지만 이벤트성 공연들이 성행한다. 나이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올해 마흔이다. 무용하는 분들 이야기가 마흔이 고비라고 한다. 넘기느냐 포기하느냐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체력도 약해지고 무대에 서는 기회도 줄어들고 그러면서 생활도 어려워지고. 마음이 복잡하다. 생각할 것도 많아지고, 하나씩 포기하는 것도 생긴다. 제일 아쉬운 것은 열정이 식는 거다.

열정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 아닐까 싶다. 행위예술을 낯설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창작과정에 대해서도 소개해 달라.

행위예술은 모호하다. 난해한 작품도 많다. 나는 난해한 작품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관객이 공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 작품으로 예를 들면, <몸시>라는 작품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성을 생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나의 경험에서 작품이 나온다.

훈련 과정은 어떤가.

행위예술은 따로 연습하고 그러지 않는다. 행위예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내 생각으로는 공간 감각이다. 행위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장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감각을 익혀야 한다. 기본적으로 공연하기 전에 세 시간 전에 미리 가서 준비한다. 공간을 인지하고 오브제를 어떻게 세팅하고 어떻게 움직일까 구상한다.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움직임워크숍도 많이 하고 있다. 어떻게 진행하나.

몸의 감각을 깨우는 워크숍을 많이 한다. 워크숍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써본다든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본다든지 그렇게 진행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워크숍이 재미없다. 참여자들이 너무 소극적이다. 반면 외국에서 워크숍을 진행하면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재밌다

강성국 작가를 행위예술가, 무용수로 소개한다. 본인은 어떤 역할에 더 비중을 두나.

두 가지 다 좋다. 두 가지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좋다. 영화도 재미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 각각의 매력이 다르다. 행위예술은 규제가 없다. 그게 좋다. 내가 어떤 오브제를 쓸 것인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한다. 지금은 무용도 복합 형식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무용은 보이지 않는 규제가 있다. 무용의 매력은 연습이다. 새로운 작품을 하면 최소 한 달 연습을 한다. 한 달 연습하고 공연을 마쳤을 때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있다. 둘 다 좋다.

어려운 질문일지 모르겠다. 작품이 많은데, 그중에서 강성국이 꼽는 베스트는 무엇인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몸시>. 내가 좋아하는 이성과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물 한 컵을 따라주지 못하는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두 번째는 <라면 퍼포먼스>. 관객과 이야기하면서 라면을 끓이고 나눠 먹는다. 유쾌한 퍼포먼스다. 하나 더 꼽으면 <오! 베이비>. 만약에 내가 2세를 갖게 된다면 혹시 내 장애가 유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풀었다. 1시간짜리 작품이다. <몸시> <라면 퍼포먼스>는 지금도 종종 공연하는데, <오! 베이비>는 지금은 공연하지 않고 있다.

<몸시> <오! 베이비> 모두 사랑이 주제다.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사랑에 관심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2005년 데뷔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도 변하고 예술계도 변했다. 또 최근에는 장애 예술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강성국 작가도 20대에서 40대로, 신진에서 중견으로 변했다. 장애 예술의 경계 없이 작업해왔는데 창작 현장에서 느끼는 장애 예술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도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변화가 있지만 나의 창작활동에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여전히 장애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 부족하다. (공연할 무대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 활동공간을 말하는 거다. 지금 이음센터가 유일하다. 그것 말고는 없다. 가장 필요한 건 작업실, 연습실이다. 연습실을 운영하고 싶어도 만만치 않다. 독서실 같이 1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작업을 많이 하는데, 장애가 있으면 카페 가기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컴퓨터 작업을 발로 하는데, 카페에서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지원사업이다. 2006년부터 계속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공연을 하고 나서 성과보고서 쓰고 정산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거의 한 달 걸린다.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정산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래서 지원사업 안 해야지 하지만, 공연을 만들려면 지원서를 쓰게 된다. 지금 필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정책이나 시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강성국

행위예술가이자 무용가, 온몸컴퍼니 대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전공하고 2005년 한국실험예술제에서 퍼포먼스 작가로 데뷔, 이듬해 2006년에 무용 작품 <핏줄>로 CJ영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외 여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해오고 있으며, 매년 신작발표 혹은 국제교류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철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대만 국제교류 기획공연을 기획하고 주최한 바 있다. 또한 움직임 워크숍 강사로 활동함으로써 비장애 몸과 장애의 몸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수업을 통해 장애 예술가에 대한 인식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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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경기문화재단 <커뮤니티와 아트> 콜로키움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kdoonga@naver.com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인터뷰 장소협조. 네스트나다 페이스북 바로가기(링크)

2019년 11월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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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