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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도우 <조건>

리뷰 삶을 겪고 노는 시간은 어떻게 그를 물들이는가

  • 김남수 안무비평가
  • 등록일 2019-02-27
  • 조회수400

리뷰

댄 도우 <조건>

삶을 겪고 노는 시간은 어떻게 그를 물들이는가

김남수 안무비평가

시간이 스치듯 지나간다. 스칠 때까지 시간은 거기 무대에 머무른다. 머무른다는 것은 서성거린다는 것이고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무게는 지그시 관객들 마음을 누르고 함께 한다. 무게의 느낌은 지긋한 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댄 도우(Dan DAW)는 극장 바깥에서 들어와 무대에 올라 빈 몸으로 양말을 신는다. 이 양말 신는 시간은 비장애인에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에게는 하염없는 행위이다. 가누는 몸과 가늠해야 할 양말 그 사이에서 댄 도우는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도 양말 신기를 시도한다. 시간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 행위의 시간 동안 관객들이 처음에는 팔짱을 낀 채 객관적 시간 체험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 행위 속으로 걸어들어와서 주관적 시간 체험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거기 머무르고 있으니, 함께 해야 한다.

양말을 신는 행위는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다. 누가 양말을 신으면서 의미 있는 말을 뇌까릴까. 댄 도우 역시 그러하다. 양말 신기에 이어 바지 입기, 와이셔츠 입기 등으로 이어진다. 그때마다 실패하고 결국 성공한다. 다만 그가 시도하는 그 실패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시간은 머무르면서 여러 차례 분절된다. 비장애인에게 자연화되어 아무것도 아닌 행위가 길게 늘여지면서 동시에 같은 행위가 분절되어 반복될 때, 관객에게는 시간 감각이 낯설어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댄 도우의 1인 렉처 퍼포먼스 <조건>(On One Condition)은 저널리즘 비평에서 말하듯 “정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 자신이 겪은 것과 지금 무대에서 겪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보여줄 뿐이다. 계몽적으로 인식의 변화를 역설하는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인식 차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있는 그대로가 느끼는 바로서 긍정될 뿐이다. 관객에게는 1인의 담백한 라이프스토리 연극이라고 해도 좋다.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거꾸로 장애에 대한 과도한 붐업이 없다. 삶의 생활시간이 이 장애 예술가에게 어떻게 흘렀고, 그가 겪고 노는 시간의 감각이 어떻게 그를 물들이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댄 도우가 자신이 삶 속에서 겪은 젠더와 정체성의 체험 – “당신은 아름다워요!”라고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의 액면가와 다르게, 즉 탈맥락화된 욕망으로 다가오는 진술 앞에서 그가 반응하는 과정은 이 물들여지는 시간 감각이 얼마나 풍요한 것인가 입증해준다. 영미권의 이 드라이한 렉처의 수법은 우회하지 않고 단박에 핵심을 찌르기에 좋다. 그때 남성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타자로부터의 인정 속에서 스스로의 자기의식을 꾸려가는 방식이 과하지 않고 담백하며 그 자체로 울림이 있다. 젠더로부터의 사회적 호명과 자기의식을 따르는 성찰. 그때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깔리고 댄 도우는 문득 자유로워진 조르바처럼 춤춘다.

그리고 그는 농담한다. 그의 춤은 자기 만족적으로 스스로 감흥을 즐기는 식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에서 농담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그는 그 춤추는 시간 동안 일어난 현대무용의 역사를 죽 꿰고 있으며, 그 이어지는 맥락 안에서 “저는 지금 컨템퍼러리 댄스를 추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몸은 의미 없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중이다. 이는 풍자적이며 논평적이다. 이는 이중으로 그러한데, 하나는 자신의 장애의 몸이 취할 수밖에 없는 결격의 동작이 컨템퍼러리의 수위에 있다는 대담한 발언인 동시에 또 하나는 현재 흘러가는 소위 ‘컨템퍼러리 댄스’라는 것이 삶의 결락과 함께 비의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인 것.

이 농담은 곧바로 잘 되지 않는, 고도의 트레이닝과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발레로 이어지기도 한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지금 발레를 추고 있습니다.”

이 농담은 비평적 관점으로 훨씬 더 장애인의 입장을 관철하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무용 나아가 컨템퍼러리 댄스는 어떤 자유로운 모더니즘의 허용도가 높지만, 발레와 같은 장르에서 그 허용도는 현저히 엄격해진다. 그렇다고 댄 도우가 이러한 발레의 ‘좁은 문’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발레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도 더 가장자리에 서 있다. 발레와 같은 비장애인의 영역을 허물어뜨리는 시도를 하거나 그것으로 상징되는 편견의 벽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훨씬 더 여유롭고 유희적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 놀 뿐이며, 그 노는 행위의 감흥 속에서 관객에게 스치듯 지나는 시간 감각을 함께 하도록 할 뿐이다.

때마다 흘러나오는 데이빗 보위의 록 음악은 댄 도우의 자전적인 에피소드 들려주기 갈피마다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따지고 보면, 연대기적 방식이 아닌 여러 가지로 떠오르는 자유연상법의 이야기 방식은 여러 박편을 모음함으로써 이 장애인의 상태를 온전히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퍼포머의 음악적이고 안무적인 시간 속에서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시 시간 속에서 물들어간다고 할까. 거기에 위트와 해학 그리고 페이소스같이 영국식 농담의 감흥이 작용한다고 할까. 데이빗 보위의 음악은 그러한 감흥의 기제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비서구권에 당도했을 때, 그가 겪었던 비극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에피소드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중국의 베이징에서 강한 정상성의 강요가 빚어낸 폭력적인 사건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계단을 내려가라”라는 수행문으로서 장애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결국 댄 도우 자신이 서구와 비서구, 장애와 비장애, 수동성과 능동성, 보호와 행위 같은 두 개의 층위 사이에서 격렬하게, 동시에 고요하게 진동해온 인식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에피소드 자체의 표면적인 결이 동아시아 유교적 정상성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지만, 댄 도우 자신에게 피드백된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이고 확장적인 타입이었던 것 같다. 가령, 장애인을 배려한답시고 그의 지성을 의심하는 ‘쉬운 시험지’를 내미는 서구 사회에 대한 비판이 거울의 반대편처럼 붙어 있는 것이 한 가지 예다. 장애인, 장애 예술가에게 자기 자신과 사회 사이의 접변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적 대타자가 장애인에게 욕망하는 법을 가르치는 방식에 댄 도우는 동의하지 않는다. 타자를 자기 자신 속으로 감아들여서 스스로 생각하는 그에게 그 타자는 어느덧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면의 힘은 그 타자의 확인과 갈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사회적 안전망 부족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와 제도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적 상황에서 댄 도우의 자아적 문제의식은 상당히 앞서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경우에 동시대적이기도 하다.

좌우간 삶의 시간 동안, 그리고 예술가로서 겪는 시간 동안 그가 행위해온 바, 그 이야기의 울림은 파장이 있다. 장애를 치유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강한 사회에서 댄 도우의 이 렉처 퍼포먼스는 장애라는 유니크한 조건, 삶의 환경 안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그 시간 그대로 보여주고 함께 생각하게 했다. 시간은 스치듯 ‘저절로’ 지나간다. 그런데 댄 도우에게 그 ‘저절로’는 의심된다. 의심되지만 춤추고 노래한다. 삶은 음악을 지향한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시간은 여기서 오래 머무를 것이다.

<조건>(On One Condition)

댄 도우, 2019. 1.17. ~ 1.19.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영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이음 해외 공연 쇼케이스: 영국’ 초청작 중 하나이다. <조건>은 댄 도우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인극으로 ‘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대답을 담았다. 안무가 에이디(AdeY)와 함께 만든 작품 <조건>은 관객들을 댄 도우의 일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신체적인 한계 또한 하나의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며 장애인과 정상인으로 세상을 나누는 시선을 향해 조용히 날카로운 반기를 든다.

김남수

김남수

무용평론가. 미술기획자.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일했고,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콜렉티브 감독으로 활동했다. ‘확장된 안무’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 미술, 다원 등을 연결 짓고 있다.
kiapenu@gmail.com
(프로필 사진 ⓒ 양동민)

사진제공. Foteini Christofilopoulou

2019년 2월 (4호)

상세내용

리뷰

댄 도우 <조건>

삶을 겪고 노는 시간은 어떻게 그를 물들이는가

김남수 안무비평가

시간이 스치듯 지나간다. 스칠 때까지 시간은 거기 무대에 머무른다. 머무른다는 것은 서성거린다는 것이고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무게는 지그시 관객들 마음을 누르고 함께 한다. 무게의 느낌은 지긋한 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댄 도우(Dan DAW)는 극장 바깥에서 들어와 무대에 올라 빈 몸으로 양말을 신는다. 이 양말 신는 시간은 비장애인에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에게는 하염없는 행위이다. 가누는 몸과 가늠해야 할 양말 그 사이에서 댄 도우는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도 양말 신기를 시도한다. 시간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 행위의 시간 동안 관객들이 처음에는 팔짱을 낀 채 객관적 시간 체험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 행위 속으로 걸어들어와서 주관적 시간 체험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거기 머무르고 있으니, 함께 해야 한다.

양말을 신는 행위는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다. 누가 양말을 신으면서 의미 있는 말을 뇌까릴까. 댄 도우 역시 그러하다. 양말 신기에 이어 바지 입기, 와이셔츠 입기 등으로 이어진다. 그때마다 실패하고 결국 성공한다. 다만 그가 시도하는 그 실패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시간은 머무르면서 여러 차례 분절된다. 비장애인에게 자연화되어 아무것도 아닌 행위가 길게 늘여지면서 동시에 같은 행위가 분절되어 반복될 때, 관객에게는 시간 감각이 낯설어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댄 도우의 1인 렉처 퍼포먼스 <조건>(On One Condition)은 저널리즘 비평에서 말하듯 “정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 자신이 겪은 것과 지금 무대에서 겪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보여줄 뿐이다. 계몽적으로 인식의 변화를 역설하는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인식 차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있는 그대로가 느끼는 바로서 긍정될 뿐이다. 관객에게는 1인의 담백한 라이프스토리 연극이라고 해도 좋다.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거꾸로 장애에 대한 과도한 붐업이 없다. 삶의 생활시간이 이 장애 예술가에게 어떻게 흘렀고, 그가 겪고 노는 시간의 감각이 어떻게 그를 물들이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댄 도우가 자신이 삶 속에서 겪은 젠더와 정체성의 체험 – “당신은 아름다워요!”라고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의 액면가와 다르게, 즉 탈맥락화된 욕망으로 다가오는 진술 앞에서 그가 반응하는 과정은 이 물들여지는 시간 감각이 얼마나 풍요한 것인가 입증해준다. 영미권의 이 드라이한 렉처의 수법은 우회하지 않고 단박에 핵심을 찌르기에 좋다. 그때 남성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타자로부터의 인정 속에서 스스로의 자기의식을 꾸려가는 방식이 과하지 않고 담백하며 그 자체로 울림이 있다. 젠더로부터의 사회적 호명과 자기의식을 따르는 성찰. 그때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깔리고 댄 도우는 문득 자유로워진 조르바처럼 춤춘다.

그리고 그는 농담한다. 그의 춤은 자기 만족적으로 스스로 감흥을 즐기는 식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에서 농담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그는 그 춤추는 시간 동안 일어난 현대무용의 역사를 죽 꿰고 있으며, 그 이어지는 맥락 안에서 “저는 지금 컨템퍼러리 댄스를 추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몸은 의미 없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중이다. 이는 풍자적이며 논평적이다. 이는 이중으로 그러한데, 하나는 자신의 장애의 몸이 취할 수밖에 없는 결격의 동작이 컨템퍼러리의 수위에 있다는 대담한 발언인 동시에 또 하나는 현재 흘러가는 소위 ‘컨템퍼러리 댄스’라는 것이 삶의 결락과 함께 비의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인 것.

이 농담은 곧바로 잘 되지 않는, 고도의 트레이닝과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발레로 이어지기도 한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지금 발레를 추고 있습니다.”

이 농담은 비평적 관점으로 훨씬 더 장애인의 입장을 관철하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무용 나아가 컨템퍼러리 댄스는 어떤 자유로운 모더니즘의 허용도가 높지만, 발레와 같은 장르에서 그 허용도는 현저히 엄격해진다. 그렇다고 댄 도우가 이러한 발레의 ‘좁은 문’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발레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도 더 가장자리에 서 있다. 발레와 같은 비장애인의 영역을 허물어뜨리는 시도를 하거나 그것으로 상징되는 편견의 벽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훨씬 더 여유롭고 유희적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 놀 뿐이며, 그 노는 행위의 감흥 속에서 관객에게 스치듯 지나는 시간 감각을 함께 하도록 할 뿐이다.

때마다 흘러나오는 데이빗 보위의 록 음악은 댄 도우의 자전적인 에피소드 들려주기 갈피마다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따지고 보면, 연대기적 방식이 아닌 여러 가지로 떠오르는 자유연상법의 이야기 방식은 여러 박편을 모음함으로써 이 장애인의 상태를 온전히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퍼포머의 음악적이고 안무적인 시간 속에서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시 시간 속에서 물들어간다고 할까. 거기에 위트와 해학 그리고 페이소스같이 영국식 농담의 감흥이 작용한다고 할까. 데이빗 보위의 음악은 그러한 감흥의 기제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비서구권에 당도했을 때, 그가 겪었던 비극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에피소드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중국의 베이징에서 강한 정상성의 강요가 빚어낸 폭력적인 사건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계단을 내려가라”라는 수행문으로서 장애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결국 댄 도우 자신이 서구와 비서구, 장애와 비장애, 수동성과 능동성, 보호와 행위 같은 두 개의 층위 사이에서 격렬하게, 동시에 고요하게 진동해온 인식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에피소드 자체의 표면적인 결이 동아시아 유교적 정상성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지만, 댄 도우 자신에게 피드백된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이고 확장적인 타입이었던 것 같다. 가령, 장애인을 배려한답시고 그의 지성을 의심하는 ‘쉬운 시험지’를 내미는 서구 사회에 대한 비판이 거울의 반대편처럼 붙어 있는 것이 한 가지 예다. 장애인, 장애 예술가에게 자기 자신과 사회 사이의 접변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적 대타자가 장애인에게 욕망하는 법을 가르치는 방식에 댄 도우는 동의하지 않는다. 타자를 자기 자신 속으로 감아들여서 스스로 생각하는 그에게 그 타자는 어느덧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면의 힘은 그 타자의 확인과 갈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사회적 안전망 부족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와 제도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적 상황에서 댄 도우의 자아적 문제의식은 상당히 앞서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경우에 동시대적이기도 하다.

좌우간 삶의 시간 동안, 그리고 예술가로서 겪는 시간 동안 그가 행위해온 바, 그 이야기의 울림은 파장이 있다. 장애를 치유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강한 사회에서 댄 도우의 이 렉처 퍼포먼스는 장애라는 유니크한 조건, 삶의 환경 안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그 시간 그대로 보여주고 함께 생각하게 했다. 시간은 스치듯 ‘저절로’ 지나간다. 그런데 댄 도우에게 그 ‘저절로’는 의심된다. 의심되지만 춤추고 노래한다. 삶은 음악을 지향한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시간은 여기서 오래 머무를 것이다.

<조건>(On One Condition)

댄 도우, 2019. 1.17. ~ 1.19.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영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이음 해외 공연 쇼케이스: 영국’ 초청작 중 하나이다. <조건>은 댄 도우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인극으로 ‘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대답을 담았다. 안무가 에이디(AdeY)와 함께 만든 작품 <조건>은 관객들을 댄 도우의 일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신체적인 한계 또한 하나의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며 장애인과 정상인으로 세상을 나누는 시선을 향해 조용히 날카로운 반기를 든다.

김남수

김남수

무용평론가. 미술기획자.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일했고,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콜렉티브 감독으로 활동했다. ‘확장된 안무’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 미술, 다원 등을 연결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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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 양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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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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