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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하이징스 <프레드>

리뷰 ‘진짜 세상’을 향한 명랑 인형 분투기

  • 정수연 공연평론가
  • 등록일 2019-02-27
  • 조회수289

리뷰

극단 하이징스 <프레드>

‘진짜 세상’을 향한 명랑 인형 분투기

정수연 공연평론가

‘작품으로 승부하겠다!’

<프레드>가 궁금했던 건 극단 대표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장애는 남과 다른 개성’이기에 장애인만의 감각과 표현이야말로 프로페셔널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이야기는 신선하고 놀라웠다. 2030년까지 발달장애인 배우를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만들겠다고 말할 때, 그는 ‘꿈’이 아니라 ‘목표’라는 단어를 썼다.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으로 실천해나가고 있음을 분명히 한 거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연극,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지 않겠나. 훌륭하고 탁월한 작품으로 주류연극의 중심에 서겠으니 ‘연민 어린 호평’ 따위는 하지 말라, 당당하게 평가를 요구하는 이 예술적 자존감에 작품을 보기도 전에 벌써 마음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프레드>는 그 말이 호언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인형극인데, 세 명의 조종사가 인형 하나를 연기하는 분라쿠의 형식을 가져왔다. 한 사람이 조종하는 인형극은 인형의 움직임이 단순한 만큼 배우는 인형의 입을 빌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하지만 세 명이 하나로 움직이는 분절인형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과 다름없이 인형이 움직여야 하니 배우는 몸짓의 전문가인 마임이스트여야 하고, 사람과 똑같이 말을 해야 하니 성우 못지않게 말하는 배우여야 하는 거다. 분절인형을 내세운 공연들이 대개 성공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웬만한 전문성 없이는 이런 형식의 인형극은 애초에 공연하기가 불가능하다.

눈코입도 없는 헝겊인형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는 또 있다. 세 사람의 손길로 생명을 얻는 이 인형의 살아가는 모습은 ‘인형 같은’ 사람들이 겪는 일상에 다름 아니다. 들어보시라. 인형으로 태어나자마자 맞닥뜨리는 현실은 일하지 않으면 ‘인형생존수당’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이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형 프레드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주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있는 일은 애초에 들어있지 않다. 먹고 살게 해주면 되잖나, 빵만 주면 되잖나 라는 통념에 인형 프레드는 매일매일 모욕당한다. 솔직하게 자기의 원하는 바를 표현한다면? 그나마의 일자리와 그나마의 만남까지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영국이나 여기나 팍팍한 현실은 별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야기로나 만듦새로나,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프레드, 네가 이겼다!

이 작품의 형식은 아주 연극적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만일 형식적인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자칫 뜨거워졌을 거다. 이 뜨거움을 식히는 냉매는 재치와 유머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 것처럼 온갖 장애물과 싸워야 하고 좌절과 낙담에 술을 퍼마시기도 하지만, 프레드의 삶이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그의 말과 몸짓에 당당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왜 문제인 거야? 이런 대답을 듣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인형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프레드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때 사람들이 답하는 소위 상식이란 그냥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한데, 또 유쾌하다.

이런 재미는 웃음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의미가 깊어지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인형 프레드와 조연출 마틴이 하나의 존재로 엮이는 순간이다. 수당이 깎인 프레드의 다리 조종사가 해고되었을 때 마틴 역시 바보같이 무대를 오간다는 이유로 조연출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걸을 수 없는 프레드와 일할 수 없는 마틴.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프레드의 다리를 마틴이 잡아주는 것이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던 마틴은 프레드의 다리를 잡아줌으로써 프레드에게 다시금 몸짓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가 된다. 마틴의 손길에 힘입어 높은 곳에서 도약하는 프레드의 유영은 죽기 위한 뛰어내림에서 삶을 위한 날아오름으로 맥락을 바꾼다. ‘무대’라는 가짜 세상에서 현실이라는 진짜 세상을 향해 힘없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당당히 뛰어들어야 하는 이 도약대에 프레드와 마틴이 함께 서 있는 거다.

이 함께 있음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크다. 단지 장애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리 없는 자들을 향한 예술적 공감과 격려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적인 책무임을 기억하자면 <프레드>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말대로, ‘주류 예술의 완성도 높은 작품’의 조건에 넉넉히 들어맞는 작품임이 맞다. 장애인 예술이라는 말 뒤에 ‘작품’이라는 말보다는 ‘활동’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프레드>가 제시하는 비전은 명쾌하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삶’을 끌어안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장애’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묵직하다.

<프레드>(Meet Fred)

극단 하이징스(Hijinx), 2019. 1.11. ~ 1.13.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인형으로서 마주해야하는 현실과 편견들로 가득한 프레드의 하루를 발랄한 인형극으로 담았다. <프레드>는 2016년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2018년에만 16개국 67개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2019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주한영국문화원이 공동주최한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 : 영국’에 초청받았다.

정수연

정수연

공연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konan29@hanmail.net

사진제공.주한영국문화원

2019년 2월 (4호)

상세내용

리뷰

극단 하이징스 <프레드>

‘진짜 세상’을 향한 명랑 인형 분투기

정수연 공연평론가

‘작품으로 승부하겠다!’

<프레드>가 궁금했던 건 극단 대표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장애는 남과 다른 개성’이기에 장애인만의 감각과 표현이야말로 프로페셔널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이야기는 신선하고 놀라웠다. 2030년까지 발달장애인 배우를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만들겠다고 말할 때, 그는 ‘꿈’이 아니라 ‘목표’라는 단어를 썼다.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으로 실천해나가고 있음을 분명히 한 거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연극,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지 않겠나. 훌륭하고 탁월한 작품으로 주류연극의 중심에 서겠으니 ‘연민 어린 호평’ 따위는 하지 말라, 당당하게 평가를 요구하는 이 예술적 자존감에 작품을 보기도 전에 벌써 마음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프레드>는 그 말이 호언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인형극인데, 세 명의 조종사가 인형 하나를 연기하는 분라쿠의 형식을 가져왔다. 한 사람이 조종하는 인형극은 인형의 움직임이 단순한 만큼 배우는 인형의 입을 빌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하지만 세 명이 하나로 움직이는 분절인형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과 다름없이 인형이 움직여야 하니 배우는 몸짓의 전문가인 마임이스트여야 하고, 사람과 똑같이 말을 해야 하니 성우 못지않게 말하는 배우여야 하는 거다. 분절인형을 내세운 공연들이 대개 성공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웬만한 전문성 없이는 이런 형식의 인형극은 애초에 공연하기가 불가능하다.

눈코입도 없는 헝겊인형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는 또 있다. 세 사람의 손길로 생명을 얻는 이 인형의 살아가는 모습은 ‘인형 같은’ 사람들이 겪는 일상에 다름 아니다. 들어보시라. 인형으로 태어나자마자 맞닥뜨리는 현실은 일하지 않으면 ‘인형생존수당’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이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형 프레드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주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있는 일은 애초에 들어있지 않다. 먹고 살게 해주면 되잖나, 빵만 주면 되잖나 라는 통념에 인형 프레드는 매일매일 모욕당한다. 솔직하게 자기의 원하는 바를 표현한다면? 그나마의 일자리와 그나마의 만남까지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영국이나 여기나 팍팍한 현실은 별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야기로나 만듦새로나,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프레드, 네가 이겼다!

이 작품의 형식은 아주 연극적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만일 형식적인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자칫 뜨거워졌을 거다. 이 뜨거움을 식히는 냉매는 재치와 유머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 것처럼 온갖 장애물과 싸워야 하고 좌절과 낙담에 술을 퍼마시기도 하지만, 프레드의 삶이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그의 말과 몸짓에 당당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왜 문제인 거야? 이런 대답을 듣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인형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프레드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때 사람들이 답하는 소위 상식이란 그냥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한데, 또 유쾌하다.

이런 재미는 웃음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의미가 깊어지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인형 프레드와 조연출 마틴이 하나의 존재로 엮이는 순간이다. 수당이 깎인 프레드의 다리 조종사가 해고되었을 때 마틴 역시 바보같이 무대를 오간다는 이유로 조연출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걸을 수 없는 프레드와 일할 수 없는 마틴.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프레드의 다리를 마틴이 잡아주는 것이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던 마틴은 프레드의 다리를 잡아줌으로써 프레드에게 다시금 몸짓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가 된다. 마틴의 손길에 힘입어 높은 곳에서 도약하는 프레드의 유영은 죽기 위한 뛰어내림에서 삶을 위한 날아오름으로 맥락을 바꾼다. ‘무대’라는 가짜 세상에서 현실이라는 진짜 세상을 향해 힘없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당당히 뛰어들어야 하는 이 도약대에 프레드와 마틴이 함께 서 있는 거다.

이 함께 있음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크다. 단지 장애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리 없는 자들을 향한 예술적 공감과 격려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적인 책무임을 기억하자면 <프레드>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말대로, ‘주류 예술의 완성도 높은 작품’의 조건에 넉넉히 들어맞는 작품임이 맞다. 장애인 예술이라는 말 뒤에 ‘작품’이라는 말보다는 ‘활동’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프레드>가 제시하는 비전은 명쾌하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삶’을 끌어안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장애’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묵직하다.

<프레드>(Meet Fred)

극단 하이징스(Hijinx), 2019. 1.11. ~ 1.13.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인형으로서 마주해야하는 현실과 편견들로 가득한 프레드의 하루를 발랄한 인형극으로 담았다. <프레드>는 2016년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2018년에만 16개국 67개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2019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주한영국문화원이 공동주최한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 : 영국’에 초청받았다.

정수연

정수연

공연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konan29@hanmail.net

사진제공.주한영국문화원

2019년 2월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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