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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원 사진작가

인터뷰 따뜻한 빛으로 담아내는 진심

  • 박유미 미술작가
  • 등록일 2022-02-23
  • 조회수1360

인터뷰

황성원은 설치와 사진 작업을 넘나든다.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 시작된 초기 작업에서는 주로 물성을 탐구했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물질 안에 시간을 축적했으며 파라핀과 바니시, 니스와 같은 재료로 그 흔적을 박제했다. 작업은 재미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토록 고민하던 정체성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황성원은 결국 오랜 공백을 선택했다. 그러나 2018년 개인전 《온 더 로드(On the Road)》를 통해 21년 만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이후로 왕성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오랜 시간 굽이굽이 돌아온 그녀의 여정에는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이 수반됐다. 어깨에 내려앉는 머리카락이 무거워 귀밑까지 짧게 잘라야 했고 하루 세 번 하는 양치질에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를 고통에 시달리며 대부분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했던 그때, 따뜻한 빛이 그녀를 위로했다. 황성원은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테이프와 실, 얇은 천처럼 다루기 쉽고 가변적인 재료를 선택해 공간에 빛을 펼쳤고, 낡은 카메라 한 대로 빛을 담았다. 그녀는 빛을 쫓아 천천히 길을 걷는 산책자다. 그 길 위에서 작가 황성원을 만났다. 그녀의 느린 걸음을 따라 잠시 함께 걸어보기를.

평소 작업하는 모습이 궁금하다.

주로 집 주변의 산책로를 걸으며 작업한다. 언제나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나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부터 눈에 보이는 건 거의 다 찍는 거 같다. 어디든 풍경은 있고 빛이 있으니까. 시간대도 그때그때 다르다. 겨울에는 해가 뜰 무렵의 색감이 좋고, 봄에는 노을빛이 아름답다. 요즘에는 아침이 좋다. 7시에서 9시 사이에 나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찬란한 아침의 기운이 눈부시다. 그럼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찍는다. 그렇게 그날그날 기분 내키는 대로 작업한다.

초기 물성 작업이 시간성을 담았다면, 최근의 작업은 빛에 대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빛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물성 작업을 하던 대학원 때는 그저 정체성 찾기에 바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시절 작품에 조명을 맞추면서 아, 나중에 조명예술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조명을 비추니까 작품이 확 살아나는 게 좋았던 거다. (웃음) 본격적으로 빛에 관한 작업을 하게 된 건 가장 아플 때, 어느 날 찾아온 강렬한 경험 때문이다. 어떤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다.

어떤 경험인가.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을 때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굉장히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너무 강렬해서 그저 따라다니며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패스파인더(pathfinder)’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는데 꼭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죽음의 냉기를 녹여줄 만한 따뜻한 빛을 쫓아가면서 나의 길을 새로 개척하고 싶었다. 그렇게 또 다른 개념으로 작업을 하게 됐고 21년 만에 개인전을 했다.

그렇게 해서 21년 만에 발표한 개인전 《On the Road》는 PVC 테이프를 활용한 공간 설치 작업이다. 그런데 매체는 물론이고 공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 시각적 효과까지 이전 작업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나도 사실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테이프’라는 재료도 처음 사용해봤으니까. 그런데 예전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20년 전에 했던 작품과 20년 후에 발표한 테이핑 설치와 사진의 느낌이 같았다. 아, 도구만 달라졌구나, 그때 깨달았다. 내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패스파인더(pathfinder)>에는 내가 빛을 따라 개척해온 길, 20년 동안 겪은 인생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람이 채워지면 팽팽해졌다가 빠지면 수축하는 커다란 비치볼 위의 라인들도 내 인생길을 닮았다. 그런 표현이 그냥 저절로 나온 것 같다. 이후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리플렉션(reflection)>의 경우, 유리 벽면 가득 반복적인 패턴의 반투명 시트지를 설치했는데 작품의 패턴 때문에 유리벽 너머에 보이는 풍경이 분절되고 중첩되고 반복됐다. 나는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되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론 단절되기도 하지 않나. 검은 실을 천장부터 커튼처럼 드리운 작품 <언타이틀드(untitled)>(2020)는 그 자체가 나에게 빛이었다.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빛이 작품으로 표현된 거다.

사진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나는 원래 사진 안 좋아한다. (웃음) 사실 찍히는 것도 안 좋아하고 찍는 것도 안 좋아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만 있을 때가 있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강남장애인복지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음악 듣고 낙서하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냥 자유롭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낙서를 할 때는 눈물이 났다. 너무 행복해서. 그리고 동시에 너무 아팠다. 그래서 카메라로 스케치를 하면 좀 나을까 싶었다. 집에 묵혀두고 있던 캐논 400D를 꺼내 찍기 시작했다. 내가 렌즈를 보고 있지 않아도 셔터만 누르면 사진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니까. 아픈 나에게는 카메라밖에 없었던 거다. 물론 카메라도 쉽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메고 나가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아파서 내내 울면서 했던 거 같다. 어찌어찌 3년을 했는데 지치더라.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걸 왜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그저 내 욕심 같았다. 그렇게 다 포기하려 했을 때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자리가 났다고,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 후로 계속해서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어떤 상황들이 나를 이끈 셈이다.

캐논 400D면 꽤 오래된 카메라다. 지금도 같은 카메라를 사용하나.

그렇다. 수리도 굉장히 많이 했다. 빛을 따라 빛을 향해서 촬영하다 보니 특히나 오류가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셔터 소리도 힘겹다. 정말 제 한 몸 다 불사르는 중이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빛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빛과 작가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성장해 왔나.

처음에는 내가 빛을 따라가면서 촬영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어느 날 촬영을 하다가 나무를 올려다봤는데 살랑이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햇빛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도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사진을 찍으며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통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냥 그 자체로, 그 감흥이 좋은 것 같다.

작품 <물아일체 : 랜드스케이프(Landscape)>나 전시 《더 셀프(THE SELF)-길, 빛, 관계》의 작품들에서 빛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몸으로 직접 체험한 감흥이 담겨있다.

가장 최근에 했던 전시 《겨울, 꽃》(2021)의 작품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밝은 느낌이다. 어떤 전시였는지 소개해 달라.

《겨울, 꽃》은 정말 행복한 전시였다. 그간 내 작업을 눈여겨 봐주셨던 지웅아트갤러리 큐레이터가 이전과는 다른 전시를 해보고 싶다며 제안을 해줬다. 대중예술을 지향하는 기획자로서 나의 밝은 면을 끄집어내는 전시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분을 믿고 사진 160장을 드렸고, 18장이 선별됐다. 처음 《겨울, 꽃》이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맑고 영롱한 고드름이 떠올랐다. 그래서 투명한 아크릴과 광택이 있는 얇은 천에 인쇄해서 그 느낌을 살렸다. 전시 서문으로는 기획자가 직접 쓴 시를 받았는데 보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만들어나간 전시였다.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

내가 나에게 솔직해야 한다. 나가서 촬영할 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걸 추리는 과정에서는 나의 감정과 욕심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의 눈까지도 버려야 한다. 더 멋있게 보이려고 내가 아닌 모습으로 꾸미거나 욕심내면 안 된다. 물론 욕심난다. 하지만 나에게 솔직해야 작품도 솔직하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야 작품을 보는 관람객도 솔직해질 수 있고 작가인 내 입장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기쁠 수 있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추구해야 한다. 나는 그게 진심이고 진심이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자유. 빛과의 물아일체를 경험할 때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한 가지로 정의되고 싶지 않은 바람과 욕심이 있다. 관람객도 보는 대로, 보이는 대로 내 작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도 내 작품에 대해서도 뭐라고 딱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작품 제목도 ‘untitled(무제)’가 많다.

작업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사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몸이 굳었다. 작업하는 게 너무 아팠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언제 행복하냐고 물으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작업하며 자유를 느낀다.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만큼은 통증도 잊게 된다. 그럴 때 행복하다. 또 내 작품을 보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감동하는 관람객을 만나며 힘을 얻는다. 계속해도 되는구나,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진짜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들려 달라.

당장 예정된 전시는 없다. 계속 꾸준히 작업할 뿐이다. 다행히 나한테는 그런 성실함이 있다.

작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인간으로서도 마찬가지다. 감동은 진심에서 태어나고 진심을 통해 전해진다. 내가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떳떳해지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작업하며 살고 싶다. 그렇게 서로 진심을 나누면서 위로받고 또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면 좋겠다. 진심으로 바란다.

  • <물아일체 : 랜드스케이프(Landscape)> (2019)

황성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조형예술을 공부했다. 2018년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었다. 2019년 spaceD9 신진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개인전 《On the Road》(2018), 《세상의 빛에 반응하는 신체》(2019), 《THE SELF-길, 빛, 관계》(2020), 《겨울, 꽃》(2021), 그룹전 《흐르는 흐름》(2018), 《감각의 섬》(2020) 외에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블로그 바로가기(링크)

박유미

설치와 영상을 중심으로 작은 서사에 주목하는 미술작가. 2018년 개인전 《바다에서 만날까》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글과 영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2018년 <찔레꽃>을 연출했다. 현재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 ‘효창서담’을 운영 중이다.
gomako1983@hanmail.net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이근영 사진작가 studioowau@naver.com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 제공. 황성원

2022년 3월 (29호)

상세내용

인터뷰

황성원은 설치와 사진 작업을 넘나든다.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 시작된 초기 작업에서는 주로 물성을 탐구했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물질 안에 시간을 축적했으며 파라핀과 바니시, 니스와 같은 재료로 그 흔적을 박제했다. 작업은 재미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토록 고민하던 정체성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황성원은 결국 오랜 공백을 선택했다. 그러나 2018년 개인전 《온 더 로드(On the Road)》를 통해 21년 만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이후로 왕성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오랜 시간 굽이굽이 돌아온 그녀의 여정에는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이 수반됐다. 어깨에 내려앉는 머리카락이 무거워 귀밑까지 짧게 잘라야 했고 하루 세 번 하는 양치질에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를 고통에 시달리며 대부분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했던 그때, 따뜻한 빛이 그녀를 위로했다. 황성원은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테이프와 실, 얇은 천처럼 다루기 쉽고 가변적인 재료를 선택해 공간에 빛을 펼쳤고, 낡은 카메라 한 대로 빛을 담았다. 그녀는 빛을 쫓아 천천히 길을 걷는 산책자다. 그 길 위에서 작가 황성원을 만났다. 그녀의 느린 걸음을 따라 잠시 함께 걸어보기를.

평소 작업하는 모습이 궁금하다.

주로 집 주변의 산책로를 걸으며 작업한다. 언제나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나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부터 눈에 보이는 건 거의 다 찍는 거 같다. 어디든 풍경은 있고 빛이 있으니까. 시간대도 그때그때 다르다. 겨울에는 해가 뜰 무렵의 색감이 좋고, 봄에는 노을빛이 아름답다. 요즘에는 아침이 좋다. 7시에서 9시 사이에 나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찬란한 아침의 기운이 눈부시다. 그럼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찍는다. 그렇게 그날그날 기분 내키는 대로 작업한다.

초기 물성 작업이 시간성을 담았다면, 최근의 작업은 빛에 대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빛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물성 작업을 하던 대학원 때는 그저 정체성 찾기에 바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시절 작품에 조명을 맞추면서 아, 나중에 조명예술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조명을 비추니까 작품이 확 살아나는 게 좋았던 거다. (웃음) 본격적으로 빛에 관한 작업을 하게 된 건 가장 아플 때, 어느 날 찾아온 강렬한 경험 때문이다. 어떤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다.

어떤 경험인가.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을 때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굉장히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너무 강렬해서 그저 따라다니며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패스파인더(pathfinder)’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는데 꼭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죽음의 냉기를 녹여줄 만한 따뜻한 빛을 쫓아가면서 나의 길을 새로 개척하고 싶었다. 그렇게 또 다른 개념으로 작업을 하게 됐고 21년 만에 개인전을 했다.

그렇게 해서 21년 만에 발표한 개인전 《On the Road》는 PVC 테이프를 활용한 공간 설치 작업이다. 그런데 매체는 물론이고 공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 시각적 효과까지 이전 작업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나도 사실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테이프’라는 재료도 처음 사용해봤으니까. 그런데 예전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20년 전에 했던 작품과 20년 후에 발표한 테이핑 설치와 사진의 느낌이 같았다. 아, 도구만 달라졌구나, 그때 깨달았다. 내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패스파인더(pathfinder)>에는 내가 빛을 따라 개척해온 길, 20년 동안 겪은 인생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람이 채워지면 팽팽해졌다가 빠지면 수축하는 커다란 비치볼 위의 라인들도 내 인생길을 닮았다. 그런 표현이 그냥 저절로 나온 것 같다. 이후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리플렉션(reflection)>의 경우, 유리 벽면 가득 반복적인 패턴의 반투명 시트지를 설치했는데 작품의 패턴 때문에 유리벽 너머에 보이는 풍경이 분절되고 중첩되고 반복됐다. 나는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되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론 단절되기도 하지 않나. 검은 실을 천장부터 커튼처럼 드리운 작품 <언타이틀드(untitled)>(2020)는 그 자체가 나에게 빛이었다.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빛이 작품으로 표현된 거다.

사진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나는 원래 사진 안 좋아한다. (웃음) 사실 찍히는 것도 안 좋아하고 찍는 것도 안 좋아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만 있을 때가 있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강남장애인복지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음악 듣고 낙서하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냥 자유롭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낙서를 할 때는 눈물이 났다. 너무 행복해서. 그리고 동시에 너무 아팠다. 그래서 카메라로 스케치를 하면 좀 나을까 싶었다. 집에 묵혀두고 있던 캐논 400D를 꺼내 찍기 시작했다. 내가 렌즈를 보고 있지 않아도 셔터만 누르면 사진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니까. 아픈 나에게는 카메라밖에 없었던 거다. 물론 카메라도 쉽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메고 나가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아파서 내내 울면서 했던 거 같다. 어찌어찌 3년을 했는데 지치더라.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걸 왜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그저 내 욕심 같았다. 그렇게 다 포기하려 했을 때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자리가 났다고,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 후로 계속해서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어떤 상황들이 나를 이끈 셈이다.

캐논 400D면 꽤 오래된 카메라다. 지금도 같은 카메라를 사용하나.

그렇다. 수리도 굉장히 많이 했다. 빛을 따라 빛을 향해서 촬영하다 보니 특히나 오류가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셔터 소리도 힘겹다. 정말 제 한 몸 다 불사르는 중이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빛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빛과 작가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성장해 왔나.

처음에는 내가 빛을 따라가면서 촬영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어느 날 촬영을 하다가 나무를 올려다봤는데 살랑이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햇빛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도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사진을 찍으며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통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냥 그 자체로, 그 감흥이 좋은 것 같다.

작품 <물아일체 : 랜드스케이프(Landscape)>나 전시 《더 셀프(THE SELF)-길, 빛, 관계》의 작품들에서 빛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몸으로 직접 체험한 감흥이 담겨있다.

가장 최근에 했던 전시 《겨울, 꽃》(2021)의 작품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밝은 느낌이다. 어떤 전시였는지 소개해 달라.

《겨울, 꽃》은 정말 행복한 전시였다. 그간 내 작업을 눈여겨 봐주셨던 지웅아트갤러리 큐레이터가 이전과는 다른 전시를 해보고 싶다며 제안을 해줬다. 대중예술을 지향하는 기획자로서 나의 밝은 면을 끄집어내는 전시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분을 믿고 사진 160장을 드렸고, 18장이 선별됐다. 처음 《겨울, 꽃》이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맑고 영롱한 고드름이 떠올랐다. 그래서 투명한 아크릴과 광택이 있는 얇은 천에 인쇄해서 그 느낌을 살렸다. 전시 서문으로는 기획자가 직접 쓴 시를 받았는데 보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만들어나간 전시였다.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

내가 나에게 솔직해야 한다. 나가서 촬영할 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걸 추리는 과정에서는 나의 감정과 욕심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의 눈까지도 버려야 한다. 더 멋있게 보이려고 내가 아닌 모습으로 꾸미거나 욕심내면 안 된다. 물론 욕심난다. 하지만 나에게 솔직해야 작품도 솔직하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야 작품을 보는 관람객도 솔직해질 수 있고 작가인 내 입장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기쁠 수 있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추구해야 한다. 나는 그게 진심이고 진심이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자유. 빛과의 물아일체를 경험할 때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한 가지로 정의되고 싶지 않은 바람과 욕심이 있다. 관람객도 보는 대로, 보이는 대로 내 작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도 내 작품에 대해서도 뭐라고 딱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작품 제목도 ‘untitled(무제)’가 많다.

작업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사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몸이 굳었다. 작업하는 게 너무 아팠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언제 행복하냐고 물으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작업하며 자유를 느낀다. 빛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만큼은 통증도 잊게 된다. 그럴 때 행복하다. 또 내 작품을 보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감동하는 관람객을 만나며 힘을 얻는다. 계속해도 되는구나,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진짜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들려 달라.

당장 예정된 전시는 없다. 계속 꾸준히 작업할 뿐이다. 다행히 나한테는 그런 성실함이 있다.

작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인간으로서도 마찬가지다. 감동은 진심에서 태어나고 진심을 통해 전해진다. 내가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떳떳해지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작업하며 살고 싶다. 그렇게 서로 진심을 나누면서 위로받고 또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면 좋겠다. 진심으로 바란다.

  • <물아일체 : 랜드스케이프(Landscape)> (2019)

황성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조형예술을 공부했다. 2018년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었다. 2019년 spaceD9 신진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개인전 《On the Road》(2018), 《세상의 빛에 반응하는 신체》(2019), 《THE SELF-길, 빛, 관계》(2020), 《겨울, 꽃》(2021), 그룹전 《흐르는 흐름》(2018), 《감각의 섬》(2020) 외에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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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미

설치와 영상을 중심으로 작은 서사에 주목하는 미술작가. 2018년 개인전 《바다에서 만날까》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글과 영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2018년 <찔레꽃>을 연출했다. 현재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 ‘효창서담’을 운영 중이다.
gomako1983@hanmail.net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이근영 사진작가 studioowau@naver.com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 제공. 황성원

2022년 3월 (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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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3 10: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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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사진은 그 찰나를 잡아 지나가지 않게 잡아주는 힘이 있습니다. 심신의 아픔과 어려움이 바닥에 있을때 잡게 된 사진이란 예술을 통해 작가는 새로운 시각예술의 문을 열고 들어가 스스로의 삶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개성있는 사진작가의 삶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