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웹진 이음

마주하는 순간④ 도움

이음광장 선의와 미덕 속 복잡한 마음

  • 장근영 작가
  • 등록일 2022-02-15
  • 조회수613
  • 분홍색 시각장애인 보도 블럭이 있는 전철 승강장 6-4번

도움, 남을 돕는 일은 인간의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이는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도움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다. 그런데 나는 그 아름다운 행위 속에서 묘한 내적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녁 6시 15분, 나는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전철을 타고 퇴근했다. 나의 퇴근 경로는 일정했다. 내가 익숙해져 있는 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타는 전철 승강장은 늘 6-4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전철을 타면 휙! 휘! 소리와 함께 “아가씨, 이리 와요! 여기 앉아요!”라는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나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혀주는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흰지팡이를 들고 타는 나를 종종 보셨는지, “나랑 항상 같은 전철을 타네. 내가 아가씨 자리 맡아놓을게.” 하며, 내가 전철을 탈 때마다 나를 노약자석에 앉혀주었다. 저녁 퇴근 시간이라 전철에는 늘 사람이 가득했고, 내가 타는 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전철을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놀라운 스피드와 민첩함으로 나를 자리에 정확하게 앉혀주었다. 아니, 거의 꽂아놓다시피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늘 할머니의 민첩한 손놀림에 놀라며 허겁지겁 감사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마치 저녁 6시 15분 전철에서 나를 기다리는 히어로 같았다. 나는 퇴근 시간이라 피곤해서 자리에 앉아서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에 할머니의 도움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하는 약간은 어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루는,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잽싸게 나를 데려다 자리에 앉히는 할머니를 보고 한 할아버지가 “뭘 그렇게까지 해요? 아는 사람인가?”라고 물으셨다.
“아니요. 항상 이 시간에 타더라고요. 내가 앉혀주고 싶어서요.”
“위험해요! 사람도 많은데!”
두 분은 노약자석 가운데 좌석에 앉은 나의 양옆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두 분 사이에 있었지만 없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뻘쭘해져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씩 마음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께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삐져나오던 다른 마음이 나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둑함은 나 자신에 대한 처량함, 초라함, 씁쓸함의 먹구름이었다. 나를 뒤덮은 마음들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과하게 도와준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민망해서였을까? 그것도 맞다. 처음 할머니께 도움을 받을 때부터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할머니의 도움은 할아버지의 말처럼 지나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할머니가 내게 그런 지나친 도움을 주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것은 나, 장애인인 내가 이유인 것이다. 나는 나로 인해 아니, 나의 장애로 인해 일어난 이 모든 상황이 싫어졌고, 나 자신이 싫어졌다. 물론 이타심에 기인한 선한 할머니의 마음을 원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량하고 초라한 상황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사실 시각장애를 갖고 난 후 나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이들은 “장애가 있어서 도움받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절대로 말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작은 일상부터 배워오지 않았던가? 자립적으로 살아야 하며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장애인인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립도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쓸모없는 그저 가엽고 시혜적인 존재일 뿐임을 인정해야 할까. 나는 주체적 존재가 아닌 객체적 존재로 이 사회에 머무는 것일까. ‘도움’이라는 미덕 속에 이런 복잡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남에게 보이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 때문은 아닐까.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작은 일상에서부터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나를 자괴감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에게 보일 때조차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비친다는 것, 그리고 남들은 다 혼자 하는 일도 못 하는 안타까운 존재로 비친다는 것. 이 모든 시선은 정말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솔직히 내가 자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내 손상 때문만이 아니라 약자와 소수자를 고려하지 않고 다수의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사회 환경에 원인이 있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을 나의 손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가령 연극을 보러 갈 때도 나는 공연 정보에서부터 예매 그리고 공연장을 찾는 일까지 숱한 난관을 마주한다. 남들에게는 없어도 될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당연하다. 대다수의 극장은 비시각장애인을 위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곳곳에서 받는 도움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다. 그저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게 된다.

‘내가 눈이 보였다면 이런 도움을 안 받아도 됐을 텐데….’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저 안 보이는 내가 문제인 것 같고,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들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도움을 받는 나의 내적 소용돌이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없다. 생각의 변화, 그것은 참 어렵다. 겉으로는 아주 당당한 척하지만, 장애인인 나조차도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기준이라는 생각에 절어 뇌가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이야기할게요.”
“제가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도움도 안 주시면, 저를 배제하시는 건가요?”
말은 당당하나 속으로는 내 존재에 대한 자괴감에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전히 개인적 성향의 문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 도움을 주고 싶어도 이런 감정들을 알게 되니 도움 주기가 더 조심스러워질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내놓고 싶지 않은 나의 어둑한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 또한 서로를 알아가는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는 마음을 나누고 싶고,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 또는 아무 생각 없었던 이들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관객으로 동료로 또는 우연한 만남으로라도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게 되거나 도움을 요청받는 일이 생긴다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그가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받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장근영

장근영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며, 장애인 당사자로 시설접근성 및 공연 배리어프리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2020년에 자전적 시각장애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어쩌려고 혼자 다녀?』를 출간하였고, 2022년 연극 <비추다 :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를 공동창작하고 출연하였다.
zzangkku9902@naver.com

사진제공. 필자

장근영

장근영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며, 장애인 당사자로 시설접근성 및 공연 배리어프리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2020년에 자전적 시각장애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어쩌려고 혼자 다녀?』를 출간하였고, 2022년 연극 <비추다 :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를 공동창작하고 출연하였다.
zzangkku9902@naver.com

상세내용

  • 분홍색 시각장애인 보도 블럭이 있는 전철 승강장 6-4번

도움, 남을 돕는 일은 인간의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이는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도움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다. 그런데 나는 그 아름다운 행위 속에서 묘한 내적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녁 6시 15분, 나는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전철을 타고 퇴근했다. 나의 퇴근 경로는 일정했다. 내가 익숙해져 있는 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타는 전철 승강장은 늘 6-4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전철을 타면 휙! 휘! 소리와 함께 “아가씨, 이리 와요! 여기 앉아요!”라는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나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혀주는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흰지팡이를 들고 타는 나를 종종 보셨는지, “나랑 항상 같은 전철을 타네. 내가 아가씨 자리 맡아놓을게.” 하며, 내가 전철을 탈 때마다 나를 노약자석에 앉혀주었다. 저녁 퇴근 시간이라 전철에는 늘 사람이 가득했고, 내가 타는 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전철을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놀라운 스피드와 민첩함으로 나를 자리에 정확하게 앉혀주었다. 아니, 거의 꽂아놓다시피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늘 할머니의 민첩한 손놀림에 놀라며 허겁지겁 감사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마치 저녁 6시 15분 전철에서 나를 기다리는 히어로 같았다. 나는 퇴근 시간이라 피곤해서 자리에 앉아서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에 할머니의 도움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하는 약간은 어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루는,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잽싸게 나를 데려다 자리에 앉히는 할머니를 보고 한 할아버지가 “뭘 그렇게까지 해요? 아는 사람인가?”라고 물으셨다.
“아니요. 항상 이 시간에 타더라고요. 내가 앉혀주고 싶어서요.”
“위험해요! 사람도 많은데!”
두 분은 노약자석 가운데 좌석에 앉은 나의 양옆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두 분 사이에 있었지만 없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뻘쭘해져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씩 마음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께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삐져나오던 다른 마음이 나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둑함은 나 자신에 대한 처량함, 초라함, 씁쓸함의 먹구름이었다. 나를 뒤덮은 마음들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과하게 도와준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민망해서였을까? 그것도 맞다. 처음 할머니께 도움을 받을 때부터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할머니의 도움은 할아버지의 말처럼 지나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할머니가 내게 그런 지나친 도움을 주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것은 나, 장애인인 내가 이유인 것이다. 나는 나로 인해 아니, 나의 장애로 인해 일어난 이 모든 상황이 싫어졌고, 나 자신이 싫어졌다. 물론 이타심에 기인한 선한 할머니의 마음을 원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량하고 초라한 상황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사실 시각장애를 갖고 난 후 나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이들은 “장애가 있어서 도움받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절대로 말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작은 일상부터 배워오지 않았던가? 자립적으로 살아야 하며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장애인인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립도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쓸모없는 그저 가엽고 시혜적인 존재일 뿐임을 인정해야 할까. 나는 주체적 존재가 아닌 객체적 존재로 이 사회에 머무는 것일까. ‘도움’이라는 미덕 속에 이런 복잡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남에게 보이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 때문은 아닐까.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작은 일상에서부터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나를 자괴감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에게 보일 때조차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비친다는 것, 그리고 남들은 다 혼자 하는 일도 못 하는 안타까운 존재로 비친다는 것. 이 모든 시선은 정말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솔직히 내가 자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내 손상 때문만이 아니라 약자와 소수자를 고려하지 않고 다수의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사회 환경에 원인이 있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을 나의 손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가령 연극을 보러 갈 때도 나는 공연 정보에서부터 예매 그리고 공연장을 찾는 일까지 숱한 난관을 마주한다. 남들에게는 없어도 될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당연하다. 대다수의 극장은 비시각장애인을 위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곳곳에서 받는 도움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다. 그저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게 된다.

‘내가 눈이 보였다면 이런 도움을 안 받아도 됐을 텐데….’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저 안 보이는 내가 문제인 것 같고,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들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도움을 받는 나의 내적 소용돌이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없다. 생각의 변화, 그것은 참 어렵다. 겉으로는 아주 당당한 척하지만, 장애인인 나조차도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기준이라는 생각에 절어 뇌가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이야기할게요.”
“제가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도움도 안 주시면, 저를 배제하시는 건가요?”
말은 당당하나 속으로는 내 존재에 대한 자괴감에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전히 개인적 성향의 문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 도움을 주고 싶어도 이런 감정들을 알게 되니 도움 주기가 더 조심스러워질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내놓고 싶지 않은 나의 어둑한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 또한 서로를 알아가는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는 마음을 나누고 싶고,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 또는 아무 생각 없었던 이들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관객으로 동료로 또는 우연한 만남으로라도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게 되거나 도움을 요청받는 일이 생긴다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그가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받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장근영

장근영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며, 장애인 당사자로 시설접근성 및 공연 배리어프리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2020년에 자전적 시각장애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어쩌려고 혼자 다녀?』를 출간하였고, 2022년 연극 <비추다 :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를 공동창작하고 출연하였다.
zzangkku9902@naver.com

사진제공. 필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

2022-02-21 16:01:19

비밀번호

작성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일상에서 (지하철이나 공공장소 등)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장애인들에게 작은 배려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지는 데 큰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약자인 소수를 배려하지 않는 다수의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사회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장애인들의 작은 도움의 청이 생긴다면 반드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배려하도록 저부터 인식을 바꿔가겠습니다.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