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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이 아닌 접근성

이음광장 누구든 어떤 것이든 즐기기 위한 실무

  • 안희제 작가
  • 등록일 2022-09-28
  • 조회수615

장애라는 구획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혹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인사가 무대에 나와서 강연을 하는 유튜브 채널에 한글 자막과 수어 통역 버전의 영상이 올라왔다. 처음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봤더니 해당 영상에 나온 연사가 장애인이었고, 그의 강연 주제도 장애와 관련된 것이었다. 강연의 내용이 너무 좋았고, 이런 영상에 접근성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묘한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평소에는 장애인 접근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영상을 업로드하면서 ‘장애’를 소재나 주제로 사용하는 경우에만 갑자기 한글 자막을 다는 모습에, 접근성 혹은 장애가 구색 맞추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은 장애와 관련된 콘텐츠만 보라는 걸까?’

처음부터 ‘배리어프리’로 만들어지는 것 중 일부 또한 그랬다. ‘2021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배리어프리 웹툰과 관련한 세션의 사회를 볼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실제 배리어프리 웹툰의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웹툰이 흔히 ‘따뜻한 감성’으로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그려내며 비장애인의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배리어프리를 적용해 만든 ‘보이스 웹툰’이 내용 면에서는 비장애인을 시청자로 가정하고 만든 ‘장애 공감’ 콘텐츠라는 게 다소 난감했다.

물론 의의는 분명히 있다. 대체로 배리어프리 작업은 작품이 완성된 이후 후반 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제작과정 전반에서 배리어프리를 고려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지금 시점에 너무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작업도 꼭 콘텐츠가 ‘장애’와 관련될 때 더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누구든 원한다면 어떤 콘텐츠든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메뉴얼 대신 실험을

작년 가을쯤, 나는 알고 지내던 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실험적인 영상 작업을 계획 중인데, 접근성과 관련하여 작업에 참여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배리어프리 버전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배리어프리를 적용한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작업 전반에서 접근성을 고려하고자 했다.

이 영상 작업은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을 배리어프리하게 만든 사례를 적어도 국내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청각적 효과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아야 하는데, 작품의 주제가 퀴어 안에서도 주변화된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었기에, 감독은 일부러 접근성 전문가가 아닌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매뉴얼을 잘 알고 일반적인 배리어프리 작업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실험 영상의 주제를 충실히 살리며 배리어프리 작업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였다.

나는 꾸준히 접근성을 ‘감각 번역’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해왔다. 접근성이란 단지 시청각적 정보를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시각을 청각으로, 청각을 시각으로 변환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정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 분위기, 느낌까지 번역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예술 연구자 문영민과 작가이자 변호사인 김원영은 이를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이라고 부른다(「시·청각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 연구」, 2015). 어느 장소에 갈 수 있느냐, 어떤 말을 들을 수 있느냐와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동등한 미적 체험’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험적인 영상 작업의 감각 번역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접근성이, 작업 관계자들의 개별적인 인권 감수성보다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작업 방식 자체의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전체 예산 규모, 배정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구체적으로 배분하고 집행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의해 접근성은 만들어진다. 애초 예산 자체가 접근성까지 계산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예산을 배분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사실 접근성을 위해 없는 예산을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접근성은 가치관이 아닌 실무였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안희제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상세내용

장애라는 구획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혹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인사가 무대에 나와서 강연을 하는 유튜브 채널에 한글 자막과 수어 통역 버전의 영상이 올라왔다. 처음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봤더니 해당 영상에 나온 연사가 장애인이었고, 그의 강연 주제도 장애와 관련된 것이었다. 강연의 내용이 너무 좋았고, 이런 영상에 접근성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묘한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평소에는 장애인 접근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영상을 업로드하면서 ‘장애’를 소재나 주제로 사용하는 경우에만 갑자기 한글 자막을 다는 모습에, 접근성 혹은 장애가 구색 맞추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은 장애와 관련된 콘텐츠만 보라는 걸까?’

처음부터 ‘배리어프리’로 만들어지는 것 중 일부 또한 그랬다. ‘2021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배리어프리 웹툰과 관련한 세션의 사회를 볼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실제 배리어프리 웹툰의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웹툰이 흔히 ‘따뜻한 감성’으로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그려내며 비장애인의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배리어프리를 적용해 만든 ‘보이스 웹툰’이 내용 면에서는 비장애인을 시청자로 가정하고 만든 ‘장애 공감’ 콘텐츠라는 게 다소 난감했다.

물론 의의는 분명히 있다. 대체로 배리어프리 작업은 작품이 완성된 이후 후반 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제작과정 전반에서 배리어프리를 고려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지금 시점에 너무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작업도 꼭 콘텐츠가 ‘장애’와 관련될 때 더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누구든 원한다면 어떤 콘텐츠든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메뉴얼 대신 실험을

작년 가을쯤, 나는 알고 지내던 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실험적인 영상 작업을 계획 중인데, 접근성과 관련하여 작업에 참여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배리어프리 버전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배리어프리를 적용한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작업 전반에서 접근성을 고려하고자 했다.

이 영상 작업은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을 배리어프리하게 만든 사례를 적어도 국내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청각적 효과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아야 하는데, 작품의 주제가 퀴어 안에서도 주변화된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었기에, 감독은 일부러 접근성 전문가가 아닌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매뉴얼을 잘 알고 일반적인 배리어프리 작업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실험 영상의 주제를 충실히 살리며 배리어프리 작업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였다.

나는 꾸준히 접근성을 ‘감각 번역’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해왔다. 접근성이란 단지 시청각적 정보를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시각을 청각으로, 청각을 시각으로 변환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정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 분위기, 느낌까지 번역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예술 연구자 문영민과 작가이자 변호사인 김원영은 이를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이라고 부른다(「시·청각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 연구」, 2015). 어느 장소에 갈 수 있느냐, 어떤 말을 들을 수 있느냐와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동등한 미적 체험’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험적인 영상 작업의 감각 번역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접근성이, 작업 관계자들의 개별적인 인권 감수성보다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작업 방식 자체의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전체 예산 규모, 배정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구체적으로 배분하고 집행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의해 접근성은 만들어진다. 애초 예산 자체가 접근성까지 계산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예산을 배분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사실 접근성을 위해 없는 예산을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접근성은 가치관이 아닌 실무였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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