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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귀귀퀴퀴> 배리어프리 작업기

이음광장 감각 사이의 번역, 협상으로서의 번역

  • 안희제 작가
  • 등록일 2022-11-09
  • 조회수526

이슈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의 접근성 작업 내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제작 전반에서 접근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단지 접근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에 썼듯, 접근성은 가치관이 아닌 실무의 문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접근성은 의사결정 과정과 업무 처리 방식, 작품 제작 기획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상이 나오면 그에 대한 화면해설을 생각했고, 이때 화면해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음향 효과로 시각적 분위기를 전달하자고 했다. 이런 이유로 삽입된 음향 효과나 음악에 대해 폐쇄자막을 어디까지 넣어야 할지도 논의 대상이었다.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향이 필요했던 것인데, 이미 같은 걸 표현하는 영상이 있다면 해당 음향 효과를 다시 폐쇄자막으로 시각화할 필요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음성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들어가는 이미지들은 어디까지 청각적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이때 청각적으로 표현되는 것과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정말 ‘같은가?’

이 과정에서 접근성은 매우 자주 영상 자체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 영상 작업은 영상이 나오면 그에 대해 접근성을 고려한 논의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정본이 나오면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큰 틀은 맨 처음에 나온 영상에서 정해지고, 그 뒤에 바뀌는 것들은 디테일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접근성을 고려’할 수는 없는 구조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인터뷰를 편집하여 만든 음성파일이 영상보다 먼저 있었다. 사실상 러닝타임 내내 쉴 새 없이 말이 나오고, 중간에 사운드가 비는 구간은 미적 효과를 위한 ‘정적’이지 화면해설을 위한 ‘비대사 구간’으로 고려되기 힘들었다. 달리 표현하면, 애초에 이 작품은 영상이 나오기 이전에 화면해설 삽입이 불가능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화면해설을 군데군데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연출, 그리고 정적과 비대사 구간 사이에 이루어진 부단한 협상의 결과물이자, 파편적인 이미지들에 맞게 문장 대신 단어의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작업은 적지 않은 부분을 연출이 먼저 결정하고 다른 제작진에게 그 사항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연출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이전의 작업들에서 제작진이 동의하고 선호해서 모두가 익숙해진 업무수행 방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모든 연출 사항에 대해 개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라도 조금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 화면해설이나 폐쇄자막도 바뀌어야 하기에, 연출의 일에는 언제나 나의 일도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해결된 문제지만, 엔딩 크레딧의 화면해설이 원칙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임에도 작품의 분위기 등 연출상의 이유로 화면해설을 일부 빼겠다고 연출이 통보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때도 결국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연출이었다. 영상 작품에서 접근성을 제대로 고려하려면 영상의 제작 과정과 영상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했고, 나는 이번 작업에서 그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나는 때로 소외감을 느꼈고, 연출은 상처를 받았다. 그에게 접근성 작업은 지금까지 해오던 작업 방식, 의사결정 과정 자체를 뒤집어엎는 도전이기도 했고, 나는 그게 얼마나 큰 일일 수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처음부터 접근성이 가치관이기보다 실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뉴얼은 분명 존재한다. 배리어프리 영화나 드라마 등 참고할 자료들도 있다. 그러나 접근성은 레디메이드(ready-made)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화면해설과 폐쇄자막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그것을 연출에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그의 작업 방식과 그렇게 작업이 이루어지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묻고, 이 지점에서 먼저 협상을 시도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접근성은 작업의 단계마다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었고, 감각 번역은 감각 사이의 번역이기 이전에 제작진 내부의 작업 방식과 실무에서의 조정 즉, 협상으로서의 번역이었다.

  • 흰 티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사람의 옆모습 상체만 화면 왼쪽으로 약간 잘려 보이고, 화면 전체는 약간 벌린 입술과 치아 부분을 확대한 반투명한 이미지가 채우고 있다.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 질퍽한 질감의 배경에 보랏빛 조명이 비추고, 한 사람의 그림자와 그가 앞으로 뻗은 손이 보인다. 폐쇄자막은 [규칙적인 마찰음과 긴박한 전자음]. 자막은 성 정체성, 지향성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Gender identity and sexual orientation are.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폐쇄자막이 적혀 있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사진 제공. 필자

안희제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상세내용

이슈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의 접근성 작업 내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제작 전반에서 접근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단지 접근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에 썼듯, 접근성은 가치관이 아닌 실무의 문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접근성은 의사결정 과정과 업무 처리 방식, 작품 제작 기획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상이 나오면 그에 대한 화면해설을 생각했고, 이때 화면해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음향 효과로 시각적 분위기를 전달하자고 했다. 이런 이유로 삽입된 음향 효과나 음악에 대해 폐쇄자막을 어디까지 넣어야 할지도 논의 대상이었다.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향이 필요했던 것인데, 이미 같은 걸 표현하는 영상이 있다면 해당 음향 효과를 다시 폐쇄자막으로 시각화할 필요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음성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들어가는 이미지들은 어디까지 청각적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이때 청각적으로 표현되는 것과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정말 ‘같은가?’

이 과정에서 접근성은 매우 자주 영상 자체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 영상 작업은 영상이 나오면 그에 대해 접근성을 고려한 논의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정본이 나오면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큰 틀은 맨 처음에 나온 영상에서 정해지고, 그 뒤에 바뀌는 것들은 디테일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접근성을 고려’할 수는 없는 구조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인터뷰를 편집하여 만든 음성파일이 영상보다 먼저 있었다. 사실상 러닝타임 내내 쉴 새 없이 말이 나오고, 중간에 사운드가 비는 구간은 미적 효과를 위한 ‘정적’이지 화면해설을 위한 ‘비대사 구간’으로 고려되기 힘들었다. 달리 표현하면, 애초에 이 작품은 영상이 나오기 이전에 화면해설 삽입이 불가능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화면해설을 군데군데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연출, 그리고 정적과 비대사 구간 사이에 이루어진 부단한 협상의 결과물이자, 파편적인 이미지들에 맞게 문장 대신 단어의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작업은 적지 않은 부분을 연출이 먼저 결정하고 다른 제작진에게 그 사항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연출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이전의 작업들에서 제작진이 동의하고 선호해서 모두가 익숙해진 업무수행 방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모든 연출 사항에 대해 개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라도 조금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 화면해설이나 폐쇄자막도 바뀌어야 하기에, 연출의 일에는 언제나 나의 일도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해결된 문제지만, 엔딩 크레딧의 화면해설이 원칙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임에도 작품의 분위기 등 연출상의 이유로 화면해설을 일부 빼겠다고 연출이 통보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때도 결국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연출이었다. 영상 작품에서 접근성을 제대로 고려하려면 영상의 제작 과정과 영상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했고, 나는 이번 작업에서 그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나는 때로 소외감을 느꼈고, 연출은 상처를 받았다. 그에게 접근성 작업은 지금까지 해오던 작업 방식, 의사결정 과정 자체를 뒤집어엎는 도전이기도 했고, 나는 그게 얼마나 큰 일일 수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처음부터 접근성이 가치관이기보다 실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뉴얼은 분명 존재한다. 배리어프리 영화나 드라마 등 참고할 자료들도 있다. 그러나 접근성은 레디메이드(ready-made)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화면해설과 폐쇄자막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그것을 연출에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그의 작업 방식과 그렇게 작업이 이루어지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묻고, 이 지점에서 먼저 협상을 시도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접근성은 작업의 단계마다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었고, 감각 번역은 감각 사이의 번역이기 이전에 제작진 내부의 작업 방식과 실무에서의 조정 즉, 협상으로서의 번역이었다.

  • 흰 티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사람의 옆모습 상체만 화면 왼쪽으로 약간 잘려 보이고, 화면 전체는 약간 벌린 입술과 치아 부분을 확대한 반투명한 이미지가 채우고 있다.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 질퍽한 질감의 배경에 보랏빛 조명이 비추고, 한 사람의 그림자와 그가 앞으로 뻗은 손이 보인다. 폐쇄자막은 [규칙적인 마찰음과 긴박한 전자음]. 자막은 성 정체성, 지향성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Gender identity and sexual orientation are.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폐쇄자막이 적혀 있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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