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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재현하는 동시대 소설 읽기③ 김초엽 「마리의 춤」

이음광장 감각의 무게

  • 이지훈 국문학 연구자
  • 등록일 2022-11-09
  • 조회수879

이슈

삶이 그렇듯, 앎의 과정은 지난하다. 매끄럽지만은 않으며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아무런 예고 없이 무작정 찾아오는 앎이 있는가 하면, 그간 고수해왔던 믿음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는 앎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앎은 당혹감과 짝을 이룰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결심의 순간이 있다. 마주한 당혹감을 밑거름 삼아, 자신과 세계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순간. 그때 앎은 삶을 바꾼다. 김초엽의 「마리의 춤」(『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은 바로 그 변화의 현장을 담은 기록이다.

변화는 ‘마리’와 ‘나’,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싹튼다. 어느 날 마리는 춤을 배우기 위해 무용 강사인 ‘나’를 방문한다. ‘나’는 그 방문이 더없이 낯설다. 마리는 ‘나’와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 즉 시지각 이상증을 가진 ‘모그’이기 때문이다. 모그는 시각 자극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이 모그로 불리는 것은, 이 같은 증상의 원인이 과거 해양오염을 해결하고자 고안했던 “테트라마이드”라는 화학물질의 부작용임을 밝혀낸 사람의 이름이 ‘모그’였던 까닭이다. ‘나’는 마리에게 춤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모그인 마리가 안무들을 직접 보고 익힐 수 있을지 의아해한다. 그러자 마리는 묻는다. “모그인 제가 잘 배울 수 있을지 걱정하시는 건가요?”

마리의 물음은 힘을 갖는다. ‘나’를 경유해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는다. 사실 ‘나’는 모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사회는 모그들을 특수 구역에 격리한 채 구성원의 자격조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시혜와 동정의 태도만 견지할 뿐, 이들의 몸과 삶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마리는 힘주어 응답한다. “보여지는 아름다움”을 비껴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춤을 출 수 있음을, 모그들은 사회의 편협함을 거부하면서 더 나은 공동체를 일구어왔음을 몸소 입증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감각 보조 장치 “플루이드”가 있다.

마리는 플루이드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플루이드는 시각 정보를 다른 감각 정보들로 변환시켜줌으로써 마리의 공간 이해를 돕는다. 변환의 과정은 온라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를 활용해 감각 정보들을 다른 모그들과 교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모그들은 플루이드를 매개로 상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플루이드는 세계를 다양한 감각과 모그들이 소외되지 않고 함께 모여 사는 시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나’ 역시 이 사실을 깨닫는다. 마리의 제안으로 짧게나마 플루이드에 접속해 본 ‘나’는, 적어도 모그들의 시공간에선 서로 다른 감각들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면서 부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나’는 낯섦과 의아함을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앎으로 채운다. 다음과 같은 마리의 말에도 다가설 수 있음은 물론이다. “플루이드는 모그가 된다는 게 결핍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요. 변화인 거죠. 어쩌면 진보일 수도 있어요.”

실패한 테러리스트. 훗날 사람들은 마리를 이렇게 부른다. 마리는 ‘나’에게서 배운 춤을 바탕으로 모그들의 단체 공연을 꾸리는데, 실은 그 이면엔 또 다른 계획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전환 물질”을 흩뿌려 공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모그로 만드는 “테러”의 감행이었다. 계획은 실행되었고 여러 혼란과 논란을 남겼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시지각 이상증을 갖게 된 사람들, 현장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이 속출했다. 모그들을 향한 혐오와 비난 여론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마리가 남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야 사회는 모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그가 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리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기란 어렵다. 반성을 촉구하는 앎을 품을 때, 삶은 다채로워진다. 마리를 알게 된 ‘나’의 삶의 모습이 정확히 그럴 것이다. 마리에게 춤을 가르친 경험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일”이자, 시각 중심의 “구체성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학습하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마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그렇지만 마리의 흔적은 ‘나’의 일상 곳곳에 남아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우는 해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자문한다. “빛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수다한 감각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마리를 만나기 전엔 떠오르지 않았을 질문이다.

질문을 더 이을 차례이다. 「마리의 춤」의 시공간을 소설 밖 현실과 견줄 수 있을까. 테트라마이드, 모그, 플루이드, 전환 물질, 테러와 같은 단어들은 익숙지 않은데, 그렇다면 두 세계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들 단어를 곱씹을수록, ‘장애화’ ‘시설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문제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그들이 직면해 온 사회가,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앞세워 이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몸과 삶에 낙인을 찍는 한국 사회와 포개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설의 상상력이 우리를 가까운 거리에서 끌어당겨 먼 곳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마리의 춤」은 ‘나’의 삶의 변화를 담은 기록인 동시에, 우리가 머무는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기록이 아닐까.

또 하나의 질문을 덧대어본다. 감각엔 무게가 있을까. 만일 있다면, 고르게 나누고 싶다. ‘플루이드’라는 새로운 우주에선 숱한 감각들이 저마다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제 가치를 잃지 않은 채 공존한다. 이곳 현실에서도 특정한 감각에 편중된 무게를 덜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를 꿈꿔본다. 테러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다. 평등만이 이뤄질 것이다.

  • 김초엽의 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 표지. 세 개의 손이 하트 모양의 틈으로 공간을 뚫고 뻗어나와 있다. 세가지의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 모양이 그려진 액체가 각 손과 바닥으로 이어져 있다.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이미지 제공. 한겨레출판

이지훈

대학원에서 한국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를 재현하는 소설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중요성과 문제성을 고민한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다. 이곳에서 비상근 신입 교사로 활동하면서 큰 힘을 얻고 있다.
zyhoon@naver.com

이지훈

이지훈 

대학원에서 한국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를 재현하는 소설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중요성과 문제성을 고민한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다. 이곳에서 비상근 신입 교사로 활동하면서 큰 힘을 얻고 있다.
zyhoon@naver.com

상세내용

이슈

삶이 그렇듯, 앎의 과정은 지난하다. 매끄럽지만은 않으며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아무런 예고 없이 무작정 찾아오는 앎이 있는가 하면, 그간 고수해왔던 믿음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는 앎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앎은 당혹감과 짝을 이룰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결심의 순간이 있다. 마주한 당혹감을 밑거름 삼아, 자신과 세계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순간. 그때 앎은 삶을 바꾼다. 김초엽의 「마리의 춤」(『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은 바로 그 변화의 현장을 담은 기록이다.

변화는 ‘마리’와 ‘나’,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싹튼다. 어느 날 마리는 춤을 배우기 위해 무용 강사인 ‘나’를 방문한다. ‘나’는 그 방문이 더없이 낯설다. 마리는 ‘나’와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 즉 시지각 이상증을 가진 ‘모그’이기 때문이다. 모그는 시각 자극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이 모그로 불리는 것은, 이 같은 증상의 원인이 과거 해양오염을 해결하고자 고안했던 “테트라마이드”라는 화학물질의 부작용임을 밝혀낸 사람의 이름이 ‘모그’였던 까닭이다. ‘나’는 마리에게 춤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모그인 마리가 안무들을 직접 보고 익힐 수 있을지 의아해한다. 그러자 마리는 묻는다. “모그인 제가 잘 배울 수 있을지 걱정하시는 건가요?”

마리의 물음은 힘을 갖는다. ‘나’를 경유해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는다. 사실 ‘나’는 모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사회는 모그들을 특수 구역에 격리한 채 구성원의 자격조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시혜와 동정의 태도만 견지할 뿐, 이들의 몸과 삶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마리는 힘주어 응답한다. “보여지는 아름다움”을 비껴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춤을 출 수 있음을, 모그들은 사회의 편협함을 거부하면서 더 나은 공동체를 일구어왔음을 몸소 입증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감각 보조 장치 “플루이드”가 있다.

마리는 플루이드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플루이드는 시각 정보를 다른 감각 정보들로 변환시켜줌으로써 마리의 공간 이해를 돕는다. 변환의 과정은 온라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를 활용해 감각 정보들을 다른 모그들과 교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모그들은 플루이드를 매개로 상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플루이드는 세계를 다양한 감각과 모그들이 소외되지 않고 함께 모여 사는 시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나’ 역시 이 사실을 깨닫는다. 마리의 제안으로 짧게나마 플루이드에 접속해 본 ‘나’는, 적어도 모그들의 시공간에선 서로 다른 감각들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면서 부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나’는 낯섦과 의아함을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앎으로 채운다. 다음과 같은 마리의 말에도 다가설 수 있음은 물론이다. “플루이드는 모그가 된다는 게 결핍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요. 변화인 거죠. 어쩌면 진보일 수도 있어요.”

실패한 테러리스트. 훗날 사람들은 마리를 이렇게 부른다. 마리는 ‘나’에게서 배운 춤을 바탕으로 모그들의 단체 공연을 꾸리는데, 실은 그 이면엔 또 다른 계획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전환 물질”을 흩뿌려 공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모그로 만드는 “테러”의 감행이었다. 계획은 실행되었고 여러 혼란과 논란을 남겼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시지각 이상증을 갖게 된 사람들, 현장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이 속출했다. 모그들을 향한 혐오와 비난 여론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마리가 남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야 사회는 모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그가 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리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기란 어렵다. 반성을 촉구하는 앎을 품을 때, 삶은 다채로워진다. 마리를 알게 된 ‘나’의 삶의 모습이 정확히 그럴 것이다. 마리에게 춤을 가르친 경험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일”이자, 시각 중심의 “구체성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학습하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마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그렇지만 마리의 흔적은 ‘나’의 일상 곳곳에 남아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우는 해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자문한다. “빛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수다한 감각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마리를 만나기 전엔 떠오르지 않았을 질문이다.

질문을 더 이을 차례이다. 「마리의 춤」의 시공간을 소설 밖 현실과 견줄 수 있을까. 테트라마이드, 모그, 플루이드, 전환 물질, 테러와 같은 단어들은 익숙지 않은데, 그렇다면 두 세계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들 단어를 곱씹을수록, ‘장애화’ ‘시설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문제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그들이 직면해 온 사회가,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앞세워 이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몸과 삶에 낙인을 찍는 한국 사회와 포개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설의 상상력이 우리를 가까운 거리에서 끌어당겨 먼 곳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마리의 춤」은 ‘나’의 삶의 변화를 담은 기록인 동시에, 우리가 머무는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기록이 아닐까.

또 하나의 질문을 덧대어본다. 감각엔 무게가 있을까. 만일 있다면, 고르게 나누고 싶다. ‘플루이드’라는 새로운 우주에선 숱한 감각들이 저마다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제 가치를 잃지 않은 채 공존한다. 이곳 현실에서도 특정한 감각에 편중된 무게를 덜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를 꿈꿔본다. 테러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다. 평등만이 이뤄질 것이다.

  • 김초엽의 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 표지. 세 개의 손이 하트 모양의 틈으로 공간을 뚫고 뻗어나와 있다. 세가지의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 모양이 그려진 액체가 각 손과 바닥으로 이어져 있다.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이미지 제공. 한겨레출판

이지훈

대학원에서 한국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를 재현하는 소설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중요성과 문제성을 고민한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다. 이곳에서 비상근 신입 교사로 활동하면서 큰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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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0 16: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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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겄어요. 장애인과 모그의 현실을 연결한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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