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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귀귀퀴퀴> 배리어프리 작업기

이음광장 주제와 미적 체험을 살리는 감각 번역

  • 안희제 작가
  • 등록일 2022-10-12
  • 조회수828

이음광장

영상과 음성 연출의 의도를 알아야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부터 감추려고 하는지 내가 더 이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화면해설과 폐쇄자막에서도 드러내고 감추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연출을 귀찮게 하자는 것이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퀴>의 배리어프리 작업에 임하는 나의 태도였다.

하지만 푸티지(footage)들을 조합하고 시각 효과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작품의 특성상,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작업 과정보다는 연출의 컴퓨터 안에서 일단 만들어진 영상들이었다. 연출 작업이 이루어지는 내내 옆에서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연출의 의도를 묻고 접근성 요소를 고려하는 일은 작업 과정의 특성과 맞지 않았다. 연출에게는 혼자서 고민하고 영상과 효과를 조합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일단 만들어진 영상을 보고 ‘어떤 분위기를 주고 싶었나’, ‘이건 왜 들어갔나’ 등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의도와 감각이 언어화될 수 없다는 어쩌면 새삼스러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작품 전체가 완성되기 이전에 영상 작업에 개입하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영상 언어에 많이 미흡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귀로는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풀어낼 때, 같은 시간 동안 눈이 하나하나 따라가며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귀귀퀴퀴> 작업처럼 음성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에 맞추어 시각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때, 게다가 영어 자막과 한글 자막, 폐쇄자막이 모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청각 정보를 시각적으로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지도 계속해서 고민되는 지점이었다.

자막이 나을까? 시각 효과가 나을까? 효과를 쓴다면 어떤 효과를 쓸까? 차라리 다른 푸티지를 활용할까? 그렇다면 그 푸티지에 대한 화면해설은? 그래서 우리 작업에서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은 ‘접근성’ 차원에서가 아니라, 작품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미적 체험과 의미라는 차원에서 한 덩어리였다. 작품의 주제 의식, 그리고 미적 체험이라는 기준으로 우리는 어떤 감각을 어떤 형태로 번역할지 결정했다.

<귀귀퀴퀴>에서는 수많은 상반된 이야기가 청각 정보로 부딪히고, 연출은 이를 시각 정보에 반영하기 위해 화면에 여러 방식으로 균열을 만들었다. 청각 정보는 자막으로 처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성별 표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를테면, 화자의 성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자를 좋아한다’라는 정보가 자막에 등장할 때, 청각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을 해소하면서도, 목소리만으로 출연자의 성별을 잘못 판단하는 ‘미스젠더링(misgendering)’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에서 출연자의 허락을 받아서 자막에도 성별을 표시함으로써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예를 들면 폐쇄자막에 ‘남성’을 의미하는 ‘ㄴ’(니은)과 ‘M’을 적었다.

충돌도 있었다. 문제가 된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히 꺼진 전등과 그것을 둘러싼 천장이었다. 감독은 화면해설에서 이를 강조하고 싶었고, 나는 그 주변에 존재하는 부분까지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화면에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면 다 설명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었고, 감독은 그 원칙을 위해 천장과 전등만 남기고 화면을 자르길 제안했다. 논의 끝에 우리는 화면해설의 타이밍과 열거하는 순서, 속도를 조정했고, 주변 요소에 대한 화면해설은 동시에 나오게 했다. 작품 자체가 실험적이니까 접근성 요소도 실험적으로 활용하자는 우리의 합의는 많은 선택지를 남겨두었고, 그 안에서 적절한 것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소리가 없는 구간을 화면해설이 들어갈 수 있는 ‘비대사 구간’으로 보았고, 감독은 그 구간을 그 자체로 미적 효과를 지닌 ‘정적’으로 보았다. 나는 화면해설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고, 연출은 정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적의 효과를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시간에는 분명 영상이 나온다. 시간이 충분하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반영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작품은 20분 내외였다. 접근성 작업은 치열한 논쟁의 반복이었다.

  • 밝은 공간의 흰색 벽에 정육각형 모양의 거울 세 개가 제각기 다른 위치에 걸려 있고, 같은 사람의 옆 모습이 세 개의 거울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반사되고 있다. 폐쇄자막은 [메아리 치는 작은 타악기 소리]

    사진설명: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폐쇄자막이 적혀 있다.

  • 어두운 빛의 직물이나 흐릿한 회색 털실, 아니면 완전히 검은 면이 제각기 다른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자막은 (ㄴ) 내가 만나는 내 주변 애들은 다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애들 (M) People around me are all men who like men

    사진설명: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자막에는 ‘남성’을 의미하는 ‘ㄴ’과 ‘M’이 적혀 있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사진제공. 필자

안희제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dheejeh@naver.com

상세내용

이음광장

영상과 음성 연출의 의도를 알아야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부터 감추려고 하는지 내가 더 이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화면해설과 폐쇄자막에서도 드러내고 감추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연출을 귀찮게 하자는 것이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퀴>의 배리어프리 작업에 임하는 나의 태도였다.

하지만 푸티지(footage)들을 조합하고 시각 효과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작품의 특성상,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작업 과정보다는 연출의 컴퓨터 안에서 일단 만들어진 영상들이었다. 연출 작업이 이루어지는 내내 옆에서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연출의 의도를 묻고 접근성 요소를 고려하는 일은 작업 과정의 특성과 맞지 않았다. 연출에게는 혼자서 고민하고 영상과 효과를 조합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일단 만들어진 영상을 보고 ‘어떤 분위기를 주고 싶었나’, ‘이건 왜 들어갔나’ 등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의도와 감각이 언어화될 수 없다는 어쩌면 새삼스러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작품 전체가 완성되기 이전에 영상 작업에 개입하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영상 언어에 많이 미흡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귀로는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풀어낼 때, 같은 시간 동안 눈이 하나하나 따라가며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귀귀퀴퀴> 작업처럼 음성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에 맞추어 시각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때, 게다가 영어 자막과 한글 자막, 폐쇄자막이 모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청각 정보를 시각적으로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지도 계속해서 고민되는 지점이었다.

자막이 나을까? 시각 효과가 나을까? 효과를 쓴다면 어떤 효과를 쓸까? 차라리 다른 푸티지를 활용할까? 그렇다면 그 푸티지에 대한 화면해설은? 그래서 우리 작업에서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은 ‘접근성’ 차원에서가 아니라, 작품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미적 체험과 의미라는 차원에서 한 덩어리였다. 작품의 주제 의식, 그리고 미적 체험이라는 기준으로 우리는 어떤 감각을 어떤 형태로 번역할지 결정했다.

<귀귀퀴퀴>에서는 수많은 상반된 이야기가 청각 정보로 부딪히고, 연출은 이를 시각 정보에 반영하기 위해 화면에 여러 방식으로 균열을 만들었다. 청각 정보는 자막으로 처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성별 표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를테면, 화자의 성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자를 좋아한다’라는 정보가 자막에 등장할 때, 청각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을 해소하면서도, 목소리만으로 출연자의 성별을 잘못 판단하는 ‘미스젠더링(misgendering)’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에서 출연자의 허락을 받아서 자막에도 성별을 표시함으로써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예를 들면 폐쇄자막에 ‘남성’을 의미하는 ‘ㄴ’(니은)과 ‘M’을 적었다.

충돌도 있었다. 문제가 된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히 꺼진 전등과 그것을 둘러싼 천장이었다. 감독은 화면해설에서 이를 강조하고 싶었고, 나는 그 주변에 존재하는 부분까지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화면에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면 다 설명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었고, 감독은 그 원칙을 위해 천장과 전등만 남기고 화면을 자르길 제안했다. 논의 끝에 우리는 화면해설의 타이밍과 열거하는 순서, 속도를 조정했고, 주변 요소에 대한 화면해설은 동시에 나오게 했다. 작품 자체가 실험적이니까 접근성 요소도 실험적으로 활용하자는 우리의 합의는 많은 선택지를 남겨두었고, 그 안에서 적절한 것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소리가 없는 구간을 화면해설이 들어갈 수 있는 ‘비대사 구간’으로 보았고, 감독은 그 구간을 그 자체로 미적 효과를 지닌 ‘정적’으로 보았다. 나는 화면해설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고, 연출은 정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적의 효과를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시간에는 분명 영상이 나온다. 시간이 충분하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반영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작품은 20분 내외였다. 접근성 작업은 치열한 논쟁의 반복이었다.

  • 밝은 공간의 흰색 벽에 정육각형 모양의 거울 세 개가 제각기 다른 위치에 걸려 있고, 같은 사람의 옆 모습이 세 개의 거울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반사되고 있다. 폐쇄자막은 [메아리 치는 작은 타악기 소리]

    사진설명: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폐쇄자막이 적혀 있다.

  • 어두운 빛의 직물이나 흐릿한 회색 털실, 아니면 완전히 검은 면이 제각기 다른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자막은 (ㄴ) 내가 만나는 내 주변 애들은 다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애들 (M) People around me are all men who like men

    사진설명: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 공식 스틸컷.
    자막에는 ‘남성’을 의미하는 ‘ㄴ’과 ‘M’이 적혀 있다.

안희제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주로 질병과 장애, 그리고 그 경계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몸이 말이 될 때』 등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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