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모두 다르지만,”
이다음의 말은 매번 바뀌었다. “유후” “감사” “뿌뿌뿌” “야호” “화이팅” “함께 즐겨보~아~요~ 짜릿하다!”
다음의 말은 실은 무엇이든 괜찮았다. ‘모두가 다르다’라는 앞 문장과 그 연결어미인 ‘-지만’을 이어받지 않는, 역접이 성립하지 않는 말이어도 괜찮았다. 문법을 파괴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다만, 절대 지울 수 없는 말, 두고두고 상기해야 하는 말, 모두 다른 몸을 이해하기 위하여 갖은 타협과 교섭이 일어나는 곳임에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
플랜Q와 극단 북새통이 기획하여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한 〈내 얘기 좀 들어봐〉는 발달장애가 있는 성인 참여자를 모집하여 진행하는 ‘연극 만들기’ 워크숍이다. 7월 10일부터 매주 월요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부근에서 함께 만나 다름을 이야기하던 이곳에서, 나는 기록자를 자처하며 여름을 함께 보냈다.
원래 이 글은 기존의 서사들을 의심하게 하는 대안적 서사로서의 ‘자기 서사’를 탐색하는 글로 기획되었다. 기존 서사 작법 행위에서는 곧잘 배제되었던 이들이 어떻게 ‘자기의’ 이야기를 개발해나갈 수 있을까를 발견해냄으로써, 기존의 연극 제작 및 수행에서의 작가-서사-배우의 영역을 의심해보자는 거창하고 그럴듯한 목표를 세웠었다. 그러나 이 워크숍에 8회차까지 참여한 지금, 내가 무엇을 ‘알아냈다’라고 부풀려 서술하기보다, 그것을 학술·비평 언어로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일보다, 내 옹색한 눈꺼풀을 까뒤집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다름’을 정말로 어떻게 경험해왔는지를, ‘다름을 이해하자’라고 말했던 그 말속에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을 실제 어떻게 체화해왔는지 혹은 하고 있는지를 ‘진행형’으로 술회하는 글이 될 것 같다.
워크숍은 매주 다른 내용으로 진행됐다. 프로그램은 참여자가 자신의 몸과 감각, 그리고 생각에 각자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간단한 게임과 퀴즈, 혹은 움직임으로 구성되었다. 매주 모임 콘셉트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거의 빠뜨리지 않는 순서는 ‘자신의 근황 이야기하기’와 ‘몸풀기 체조’였다. 근황은 새롭지 않아도 괜찮았고, 몸풀기 체조는 꼭 지난 시간의 동작들을 기억해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매번 달라져도, 같은 것이어도 괜찮았다. 나의 일관성을 지켜도, 지키지 못해도 괜찮았다. 아니, ‘지키다’ 자체를 헝클어뜨려 ‘일관성’의 관행을 돌파하는 듯했다.
기록자로 처음 이 모임에 합류한 날, 적잖이 당황했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생경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공간에 자리한 이들은 모두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내게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 7년의 인터뷰 경력이 있었기에, 각기 다른 발성과 언어 습관을 지닌 이들의 입말을 글말로 바꾸는 일에는 꽤 자신 있었다. 최대한 이 모임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던 탓도 있지만, 누군가의 발음과 발성이 내게는 더러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발화 양식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용어였다.
“피플퍼스트, 자조 모임, 인권발바닥행동, 파스, 스트롤…”
둥그렇게 모여 앉아 각자의 근황을 나누는 시간, 단란하고도 긴장 어린 이 시간에서 나는 얼마간 소외감을 느꼈다. 모두가 도란도란 주고받는 단어 중 내가 캐치할 수 있는 단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음이라도 정확하면 비슷한 표현들을 마구 검색해보며 어떻게든 추론해볼 텐데…. 이런 변명을 개발하며 집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 용어들은 몇 회차가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참여자들의 활동 지역이나 단체, 혹은 관심사 등을 ‘조금이라도 알고 난’ 다음이다.
여기서 내 당황스러움을 추려내는 이유는 참여자들의 발성과 발음, 혹은 표현 체계가 얼마나 다른지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름의 교차 장소에서 펼쳐지는, 내가 겪은 무지의 상태들을 드러내고, 동시에 이 무지함에 쉬이 매겨지는 의미값이 무엇인지를 들춰내고 싶은 것이다. 이 생경함은, 내가 ‘그’와 ‘처음’ 마주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에 비롯된 것이 자명하다. ‘그’가 ‘누구라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은 나는 첫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섣부른 판단을 내렸었다. 여기서 잠시, ‘그’라는 단수형 대명사 대신 복수형인 ‘그들’을 쓰고 싶었던 욕망을 자백한다. 내게 들리지 않는 말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그 발화자를 복수형으로 만들려던 내 작문 관습은, 이 들리지 않는 이유와 원인을 자꾸만 장애와 연관 지으려는 게으른 사유와 맞물려 있다. 들리지 않는 단어, 검색되지 않는 단어, 그래서 글말로 옮길 수 없는 단어. 며칠간 이런 열패감 때문에 나는 스스로 이 일에 적격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었다. 그리고 그 다름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서둘러 이 다름에 이름을 붙이려 애썼다.
‘나는 장애 당사자, 장애 활동가가 아니라서 이런가 봐.’
기실 우리는 처음 마주하는 이의 사전 정보를 대개 충분히 알 수가 없다.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된 다른 이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나는 ‘그’를 알아갈 수 있다. 완료형으로서의 앎을 경계하고, 진행형으로서의 앎을 집요하게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앎이 만나는 즉시 일어나는 것, 혹은 완료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의식했던 일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A는 B와 다름’을 차차 알아가는 일이, ‘B는 A가 아니라서’로 서둘러 해명하는 의식의 흐름이었다.
내가 위의 단어들을 알게 된 것은 ‘이후’의 시간이었다. 곱씹음의 시간, 반추의 방향성이 이 단어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용어를 확인했을 때, 그 발음이 무엇을 지시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알지 못할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알지 못하던 그 공백을 ‘중단’의 간극이 아니라 ‘유보’의 흐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사이(pause)의 시간에, 나는 그를 ‘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유보 또한 내 계획이나 의도에는 없던 것이었다.
잘 꿰어내기를 포기하는 일, 이다음 말에는 무슨 말이 와야 올바른 문법을 수행하는 것일까를 지독하게 의식하는 일은, 결국 이 ‘다름들(복수형)’을 깎고 벼려서 반듯한 ‘다름(단수형)’으로 명사화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명사는 간명해서 좋다. 그러나 많은 잔여를 놓친다. ‘다르다’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만으로는 판단하거나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하는 일이 아닐까. 다름을 인식한 뒤 유보는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종결짓지도, 의미값을 매기지도 않는 일. 판단을 무화하고 분석이 무력해지는 이 유보의 순간, 내가 할 일은 나의 다름과 그의 다름을 서로 교환하는 일일 뿐일 테다.
이 글에서는 ‘다름’에 대한 나의 위태로운 이해부터 끌러야 해서, 나와 다름을 주고받았던 이들과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많이 생략되었다. 다음 글에는, 무슨 말이 이어질 수 있을까. 예측도 예고도 서두르지 않겠다. 우리 모두의 다름에는 ‘사이’가 필요하니까.
장기영
읽고 쓴다. 공연·영화·소설·시 등을 보고, ‘봄’을 ‘읽음’으로 꿰어, 이내 ‘씀’으로까지 전개시킨다. 이 행위가 평론 혹은 연구라고는 불리지만, 실은 ‘보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불릴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쓰고-읽고-말하고-듣기를 가르치고 있다.
kalce7@naver.com
사진 제공. 극단 북새통×플랜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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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생경함과 낯선 경험이 이해와 성숙으로 바뀌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 유보의 사이(pause)에서 고민하시는 필자님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따뜻한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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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들 가운데서 느꼈을 언어불통 표현 방식의 차이에서 느꼈을 당호감을 진솔하게 소개한 부분을 읽으며ㅈ깊은ㅈ공감을 갖게 되었죠! 아울러 시간이 흐르며 그분들의 언어, 소통 방식들을 이해하며 쓰게될 평론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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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다름'이라는 이해를 독자들, 특히 장애우(비장애인들이 통상 쓰는 말)들에게는 좀더 세심하게 다가오면서 또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격(사이)를 더 가깝게 하고자하는 마음을 읽으며 따뜻함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자의 그 따스함이 이 사회에도 많이 전해져 꼭 장애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타인들에게 좀더 배려하는 운동으로까지 퍼져 나갔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