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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와 혼자만의 우울장애

이음광장 우울, 어디까지 해 봤니

  • 조개인 작가
  • 등록일 2022-10-12
  • 조회수608

이음광장

‘재발성 우울장애. 현존 정신병적 증상(망상, 환각, 와해된 언어·행동 등)이 없는 중증.’ 난생처음 정신장애인 주거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뗀 진단서의 병명란은 그렇게 운을 뗐다. 우울도 장애도 아는 단어였지만, 한쪽은 애증이 유구했고 한쪽은 조금 생경했다. 긴 세월 극심한 우울증을 앓긴 했는데, 그래서 내가 장애인인 걸까? 어쩐지 자격 미달이면서 자리를 꿰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지원가 수업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의료적 관점에서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는 ‘손상의 지속성’을 기준으로 갈린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DSM-5에 의거해 진단받으면 질환이지만, 그 영향과 후유증으로 장기적으로 생활에, 특히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드문드문 아르바이트를 그것도 길어야 몇 달 한 것 외에는 취업의 문지방조차 밟아본 적 없는, 구인 정보 목록을 보며 끝없는 자괴의 수렁에 빠졌다가 결국은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의 꼬락서니에 번번이 절망의 파김치가 되었던, 그래서 대학 졸업 이후의 10여 년이 남들 눈에는 공백인 나는, 그에 따르면 장애인이 아닐 것도 없었다.

그래, 나는 정신장애인이다! 나에게도 모집단이 생겼다! 초심자의 패기가 들끓었다. 그 기세로 눈에 들어오는 당사자 활동들에 풍덩풍덩 잘도 발을 담갔다. 그러다 불쑥, 미끄러지는 순간이 있었다. 득달같이 또 무슨 교육을 받으러 낯선 곳에 간 날이었다.

“개인 씨는 진단명이 뭐예요?”
“아, 저는 우울이에요.”
“어쩐지! 멀쩡하더라!”
“(……제가요?)”

당사자 동료와 나눈 이 짧은 대화는 토씨 하나 흐려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이따금 멀.쩡.이라는 말만이 분절되어 묘한 위화감의 표면을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 장애인이라기엔 멀쩡한, 비장애인이라기엔 도통 정신을 못 차리는, 복지카드도 죽기 직전 정도는 되어야 나올까 말까 라는, 나는야 우울장애인.

이 무렵 우울증 환자가 드라마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심기가 틀어졌다. 거, 내가 말이야 26년 경력 우울 베테랑인데 어디 한번 보자고. 그렇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정확히는 ‘민선아’라는 캐릭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삐딱하게 팔짱을 끼던 것도 잠시, 금세 속절없이 과거의 내 모습들이 겹쳤다. 선아는 불시에 물을 뚝뚝 흘린다. 외부의 물기에 젖었다기보다는 그의 내부에 고인 물이 임계치를 넘어 밖으로 스며 나온다. 그때마다 세상은 암전되고 시간은 뭉텅 잘려 나간다.

‘우울’에게 ‘나’라는 인간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면 오히려 우울하다는 감정도 생각도 들지 않는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그저 멍하다. 몸은 누워서 꼼짝도 못 하다가 서서히 녹아서 바닥에 스민다. 그렇게 육체와 정신이 액체가 된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드는 찰나에는 본능적으로, 논리적으로, 죽음으로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

어찌어찌 살 마음이 죽을 마음을 미미하게 앞서면 ‘너는 대체 언제까지’라는 소리가 밖에서도 안에서도 울린다. 내 가족은 20년 넘게 죽고 싶어 한 딸이 정신과 약을 3개월씩이나 먹어도 큰 변화가 없자 대체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되냐, 약에 의존하지 말고 의지를 가져라, 같은 말들을 늘어놨다.

선아의 전남편은 그가 7년 동안 나아지려는 의지 없이 아들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고 양육권을 가져간다. 선아의 진실은 필시 달랐을 것이다.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손아귀로 꾸역꾸역 의지든 책임이든 그러모아도,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감각만이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를 스쳤으리라.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어디까지가 병이고 어디까지가 내 의지박약일까? 우울장애인은 끊임없이 자기 의심에 빠진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아 또한 20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죽음 같은 일들을 두고 계속 자신의 책임 소재를 찾는다. …뭐 얼마나 좋은 애비였다고!

첫사랑 ‘동석’이 지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남편의 박정함에 먼저 시원하게 욕을 퍼부었을 때 비로소 선아는 묵혀뒀던 울분을 토한다. 영원히 침묵을 지키는 바다에 흘려보낼 뿐인 일도, 처음엔 쭈뼛대다 몇 번 목이 트이고서야 밀렸던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시설에 들어오기 직전, 내 오랜 상처에 코웃음을 치며 치졸하다고 비꼬는 엄마의 면전에 대고 나는 처음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쌍욕을 했다. 뭐 얼마나 좋은 에미였다고! 놀랍게도, 그러고도 이 세상과 내 인생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종국에 선아는 아들이라는 유일한 빛을 되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한다. 나도 모집단 찾기 같은 것은 좀 그만하기로 했다. 애매모호한 회색의 영역을 유영하는 것도, 시종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 필자의 그림. 어두운 공간에 긴머리 여성이 뒤돌아 서 있다. 여성의 상체는 커다란 얼음덩어리 안에 갇혀 있다.

    우울은 육체와 정신을 액체로 만든다

  • 필자의 그림. 한 여성이 우울과 분노에 뒤덮여 있음을 괴로운 표정과 파란색, 빨간색 물감의 어른거림으로 표현했다.

    우울의 돌덩이를 들어낸 곳엔 용암 같은 분노가 있다

조개인

‘다들 그렇다니까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는 햇병아리 정신장애인 당사자. 아무리 못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는, 유일하게 다짐한 바에 따라 어찌어찌 살고 있다.
milosaya@naver.com
인스타그램 바로가기(링크)

그림. 필자

조개인

조개인 

‘다들 그렇다니까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는 햇병아리 정신장애인 당사자. 아무리 못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는, 유일하게 다짐한 바에 따라 어찌어찌 살고 있다.
milosaya@naver.com

상세내용

이음광장

‘재발성 우울장애. 현존 정신병적 증상(망상, 환각, 와해된 언어·행동 등)이 없는 중증.’ 난생처음 정신장애인 주거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뗀 진단서의 병명란은 그렇게 운을 뗐다. 우울도 장애도 아는 단어였지만, 한쪽은 애증이 유구했고 한쪽은 조금 생경했다. 긴 세월 극심한 우울증을 앓긴 했는데, 그래서 내가 장애인인 걸까? 어쩐지 자격 미달이면서 자리를 꿰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지원가 수업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의료적 관점에서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는 ‘손상의 지속성’을 기준으로 갈린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DSM-5에 의거해 진단받으면 질환이지만, 그 영향과 후유증으로 장기적으로 생활에, 특히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드문드문 아르바이트를 그것도 길어야 몇 달 한 것 외에는 취업의 문지방조차 밟아본 적 없는, 구인 정보 목록을 보며 끝없는 자괴의 수렁에 빠졌다가 결국은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의 꼬락서니에 번번이 절망의 파김치가 되었던, 그래서 대학 졸업 이후의 10여 년이 남들 눈에는 공백인 나는, 그에 따르면 장애인이 아닐 것도 없었다.

그래, 나는 정신장애인이다! 나에게도 모집단이 생겼다! 초심자의 패기가 들끓었다. 그 기세로 눈에 들어오는 당사자 활동들에 풍덩풍덩 잘도 발을 담갔다. 그러다 불쑥, 미끄러지는 순간이 있었다. 득달같이 또 무슨 교육을 받으러 낯선 곳에 간 날이었다.

“개인 씨는 진단명이 뭐예요?”
“아, 저는 우울이에요.”
“어쩐지! 멀쩡하더라!”
“(……제가요?)”

당사자 동료와 나눈 이 짧은 대화는 토씨 하나 흐려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이따금 멀.쩡.이라는 말만이 분절되어 묘한 위화감의 표면을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 장애인이라기엔 멀쩡한, 비장애인이라기엔 도통 정신을 못 차리는, 복지카드도 죽기 직전 정도는 되어야 나올까 말까 라는, 나는야 우울장애인.

이 무렵 우울증 환자가 드라마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심기가 틀어졌다. 거, 내가 말이야 26년 경력 우울 베테랑인데 어디 한번 보자고. 그렇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정확히는 ‘민선아’라는 캐릭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삐딱하게 팔짱을 끼던 것도 잠시, 금세 속절없이 과거의 내 모습들이 겹쳤다. 선아는 불시에 물을 뚝뚝 흘린다. 외부의 물기에 젖었다기보다는 그의 내부에 고인 물이 임계치를 넘어 밖으로 스며 나온다. 그때마다 세상은 암전되고 시간은 뭉텅 잘려 나간다.

‘우울’에게 ‘나’라는 인간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면 오히려 우울하다는 감정도 생각도 들지 않는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그저 멍하다. 몸은 누워서 꼼짝도 못 하다가 서서히 녹아서 바닥에 스민다. 그렇게 육체와 정신이 액체가 된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드는 찰나에는 본능적으로, 논리적으로, 죽음으로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

어찌어찌 살 마음이 죽을 마음을 미미하게 앞서면 ‘너는 대체 언제까지’라는 소리가 밖에서도 안에서도 울린다. 내 가족은 20년 넘게 죽고 싶어 한 딸이 정신과 약을 3개월씩이나 먹어도 큰 변화가 없자 대체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되냐, 약에 의존하지 말고 의지를 가져라, 같은 말들을 늘어놨다.

선아의 전남편은 그가 7년 동안 나아지려는 의지 없이 아들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고 양육권을 가져간다. 선아의 진실은 필시 달랐을 것이다.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손아귀로 꾸역꾸역 의지든 책임이든 그러모아도,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감각만이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를 스쳤으리라.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어디까지가 병이고 어디까지가 내 의지박약일까? 우울장애인은 끊임없이 자기 의심에 빠진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아 또한 20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죽음 같은 일들을 두고 계속 자신의 책임 소재를 찾는다. …뭐 얼마나 좋은 애비였다고!

첫사랑 ‘동석’이 지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남편의 박정함에 먼저 시원하게 욕을 퍼부었을 때 비로소 선아는 묵혀뒀던 울분을 토한다. 영원히 침묵을 지키는 바다에 흘려보낼 뿐인 일도, 처음엔 쭈뼛대다 몇 번 목이 트이고서야 밀렸던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시설에 들어오기 직전, 내 오랜 상처에 코웃음을 치며 치졸하다고 비꼬는 엄마의 면전에 대고 나는 처음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쌍욕을 했다. 뭐 얼마나 좋은 에미였다고! 놀랍게도, 그러고도 이 세상과 내 인생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종국에 선아는 아들이라는 유일한 빛을 되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한다. 나도 모집단 찾기 같은 것은 좀 그만하기로 했다. 애매모호한 회색의 영역을 유영하는 것도, 시종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 필자의 그림. 어두운 공간에 긴머리 여성이 뒤돌아 서 있다. 여성의 상체는 커다란 얼음덩어리 안에 갇혀 있다.

    우울은 육체와 정신을 액체로 만든다

  • 필자의 그림. 한 여성이 우울과 분노에 뒤덮여 있음을 괴로운 표정과 파란색, 빨간색 물감의 어른거림으로 표현했다.

    우울의 돌덩이를 들어낸 곳엔 용암 같은 분노가 있다

조개인

‘다들 그렇다니까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는 햇병아리 정신장애인 당사자. 아무리 못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는, 유일하게 다짐한 바에 따라 어찌어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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