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돌아보면, 한 명 있었다. 국내 미술계에서 신경다양성 관련 설명을 가미한 발표를 하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본인이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건데 몰랐던 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라고 표현해준 사람이. 마치 지금의 세대가 힘들어하는 건 기성세대의 잘못이 크다고 이야기하는, 사회에 관심 많은 기성세대를 예기치 않게 마주친 느낌이었다. 그분은 나랑 같은 세대다. 작업에서도 일상에서도 사회와 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분께 감사하고, 어쩌면 당연한 반응에 감동하고 놀란 내 마음도 여전히 나와 함께한다.
‘개인의 문제’라는 내러티브
코로나19가 터지던 해 마지막에 만든 퍼포먼스 작품 〈마젠타야, 나 집에 가기 전에 뭐 하지?〉는 짧은 내러티브로 시작한다.
“개인의 하루하루가 /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이 어떤지 / 바라보는 관점 나름이라면. / 우리가 바꿀 수 있고 없고를 나눈 뒤 / 바꿀 수 있는 것만 만지고 살아가는 게 / 과연 나은 선택일까?”
한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 생에서 집중하는 곳을, 조심스럽지만 확신을 가지고 고를 수 있게 되고, 그게 우리에게 자율성을 더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종종.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안다. 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것은 외부의 힘, 이해관계, 권력구조 등에 의해 빚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신경다양성에 있어 이 부분이 내 마음을 가장 아리게 했다. 내 친구는 잠이 예기치 않게 자주 찾아오는 신경다양적 뇌 회로가 있는데, 한국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이상하고 게으른 것으로 판단되어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다른 한 친구는 글을 느리게 읽지만 법적 보호가 되지 않는 한국에서 1980년대에 수능으로 소위 일류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많은 성과를 내고 상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띨띨해 보이는데’ 어떻게 성과를 많이 내고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냈을까 하는 말을 여러 동료에게서 들으며 사내 괴롭힘을 당했다. 또 다른 친구는 1970~1980년대에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여성적’으로 감정을 경험하지 않고 수학, 로직 좋아하는 너드(nerd) 같다며 학창 시절에 여자아이들에게 반복적으로 따돌림을 경험해 왔다. 이 셋 모두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다양한 형태의 불안, 우울, 자아존중감 하락 등을 경험했고, 성숙함과 인생 경험으로 나아지는 면이 있는가 하면, 한구석에선 이 마음의 패턴이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은, 표준을 정의하려 하는 외부의 힘, 사회생활에서의 이해관계, 그를 아우르는 권력구조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감각적 체험 그리고 기억이 좌지우지하는 마음의 흐름이다. 상담치료도 요즘에야 비교적 풍부해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한국 정부는 교육과 직장문화에 신경다양성 관련 인식개선 시스템 및 이와 관련한 정신건강 자원을 확보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의 아프게 지나간 세월은 그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권력/힘’의 내러티브로의 전환
여기서 ‘개인의 문제’라는 내러티브에서 ‘권력/힘’의 내러티브로의 전환에 관한 담론을 들이고 싶다. 위에서 이야기한 흐름으로 발생하는, 개개인이 세상에서 신경다양성 관련하여 경험하는 정신건강 문제와 사회생활에서 계속 생기는 허들 같은 ‘장애물’을 개인의 문제라며 경계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래,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사회의 구조를 애초에 디자인할 때 신경다양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 시민이 있을 거라는 고려를 한 사람이 권위 있는 자리에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면 사실 신자유주의에서의 인간상을 더 존경하고 합리화하기 쉽다. 생산성 있고 높은 성취를 이루어 내는 자유시장 체제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 이 인간상과 매칭되지 않는 정도는 외부에서 정의된 생산성을 일궈낼 수 없는 개인의 고민거리가 되곤 한다. 또, 이러한 개인 문제로의 치부는 자본주의에도 이득이다. 개인 문제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결정권자들이 사회나 정부가 재정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될 ‘구조·사회·권위 문제’의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나 정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결정권자들의 책임이 안개에 휩싸여 없어진 것처럼 보이게 되고, 이는 자본 혹은 권력을 독점한 소수에게 다양한 의미에서 ‘경제적’으로 득이 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면서 2020년 당시 나를 포함한 나의 세상에 불신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자연사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세상에게 장기간 궁금했다. 그런 마주봄과 손잡음의 물음에서 시작된 것이 〈마젠타야, 나 집에 가기 전에 뭐 하지?〉 퍼포먼스다. 당시 만들면서도, 사회와 한 사람의 타고남 사이의 미스매치, 혹은 세상과 한 사람의 존재 상태 사이의 미스매치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안지 않고 스스로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생각은 여전히 내 옆 공기 중에 있다.
내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내 삶에 적용해 보았을 때, 이런 인문학적·법적으로 알게 되는 게 생기고 사유하고 트라우마를 돌볼 시간을 가지면서 내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작용하고 바뀌고 다르게 보이기 ― 혹은 다르게 볼 수 있게 되기 ― 시작했다. 그 시기에 가장 힘든 고비 몇 번을 넘고 만든 조각작품이 〈돌아갈 수 없는 기원 Origins of No Return〉이다.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사회의 선호와의 미스매치를 인지하면, 스스로 더더욱 진실한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시간 혹은 시공간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라고 작품설명에 썼던 것 같다. 크리틱 시간에 이 작품을 발표할 때 마치 위층에서 축하하는 듯한 연주 소리가 들려서 다 같이 소름 돋았던 기억이 나 웃음이 나온다. 공적으로는 시간과 내러티브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돌아보니 내 초상화였던 것 같다. 아마도 첫 번째 초상화.
존재 방식, 생존과 생명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내러티브에서 탈피하고 ‘그리고’로 넘어간 나의 삶은 제법 달라졌다. 어떤 사람에겐, 혹은 빠른 발전으로 가난과 위험에서 벗어나야 했던 한국 역사의 유산을 여러 방면으로 경험하는 한국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내러티브는 당연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극복해내야지’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더 잘해야지’ 등 무언가를 뛰어넘는 극복을 멋있는 것으로 상위로 바라보는 건 어쩌면 개인의 문제, 책임, 영역으로 보는 시선과 제법 비슷하지 않나 싶다. 개인의 극복….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부정·긍정의 개념으로 판단하고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부정·긍정 언어 너머의 계속 이어지는 삶의 지평선을 타고 살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상태 혹은 생명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존재 방식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회에 당연히 여겨지곤 하는 극복/개인 문제 내러티브에서 멀어져야 살아갈 수 있었던 ― 나를 포함한 ― 사람들이 본인의 정체성이 없는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 폭력을 경험하고 숨쉬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 옹호해야 숨 쉴 수 있는 생존을 이야기한 작품이 있다. 〈자기 옹호의 존재론적 정당성〉이다. 정체성과 한 사람의 삶, 존재 방식이 오해받거나 위협받을 때마다 스스로 옹호하고 변호하고 보호해야만 했던 삶도 있고, 그 역시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렇지만, 이 작품을 만들고 2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개인이 혼자서 지치도록 스스로 변호하고 옹호하게 만드는, 그런 세상으로 초점을 옮긴다. 세상 너, 그러면 안 된다고. 조금 더 생명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달라고. 글머리에 이야기한 인도적인 공감을 표현해주었던 동료작가처럼, 세상 너도 손잡아 달라고.
마젠타
‘서사 형성 불능/무능’을 알아가기 위해 컴퓨터공학과 극예술을 공부하다가 현재 대학에서 법, 인지과학 등 다른 분야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마젠타’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마젠타는 신경다양성과 연관된 모든 사람을 투영하여 보여주기에 다수이자 익명이다. 몇몇 전시와 퍼포먼스에 참여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몇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가능해서 종종 지인들의 작품을 위해 번역 작업을 맡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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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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