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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다양성과 예술③

이음광장 거의 다 왔어!

  • 마젠타 미술작가
  • 등록일 2024-02-14
  • 조회수1208

이음광장

어린 시절, “전생에 우리는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였을 거야”라고 이야기 해주던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신경다양성에 대해 잘 모르고 이해가 다다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곤 했다. 나는 10대 마지막쯤부터 현재까지 다방면으로 신경다양성이 무엇인지 꿰려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에 대해 무지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그 상처와 괴리감이 몸에 쌓여 건강에 영향을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상처와 사랑을 동시에 받는 관계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그중 다수는 관계가 끊겼고, 소수는 서로를 알아가며 천천히 친구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신경다양성과 인지적·지각적 차이

신경다양성은 궁극적으로 인지적·지각적 차이(perceptual differences)이며 동시에 넓은 범위에서 인지적 차이에 포함된다. 난독증적 뇌 회로가 구성되어 있다는 건, 글자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인지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에서 뇌의 구성을 시스템적으로 보고 뇌와 몸의 연결 관련한 연구가 진행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자폐스펙트럼, ADHD, 혹은 기면증이 있으면 ‘장애’로 판명받는 특징뿐만 아니라 개인이 세상, 타인, 자신을 경험하는 게 인지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지의 출발점이 다른데 고유한 인지체계를 지닌 개인이 다른 고유한 인지체계를 지닌 타인을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가,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거에 양가감정이 들게 했던, 아프지만 소중했던 인간관계를 다시 짚어보면, 신경다양성 관련 임상적 진단명과 무관하게, 자신이 속한 문화·시대에 따라, 개인 혹은 집단이 인식할 수 있는 게 다르다는 게 보인다. 약 500년 전만 해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집단 학살하기도 했고, 약 10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선 중국인, 아시아인을 배제하는 차별적 법이 입법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고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극소수였다. 동시대로 돌아와도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한, 자신과 다른 젠더의 관점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이는 장애 유무, 장애 유형, 인종, 민족, 문화, 트라우마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신경다양성 관련 인간관계 상처를 열고 들어가 보면, 인지적 차이에 대한 궁극적 질문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 한계선(World Limit)〉은 그렇게 시작된 오디오 프로젝트(혹은 현대미술 비평적 디자인 인터뷰)이다. 나는 ‘인지적 차이’를 내 앞에 두고 물었다: “나는 생에서 진정한 상호적 관계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가? 누군가가 나를, 나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가?” 이 물음을 신경다양성, 상호성, 그리고 문화 차이를 통해 알아가고자 한국에 있는 친구 한 명과 영국에 있는 친구 한 명을 각각 인터뷰했다. 두 친구와 진솔하게 두 시간가량 이야기하고 나니, 배경 탓이든 타고남이든, 각자 언어를 쓰는 방식,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감정·사랑·우정을 느끼는 방식,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고유하게 다르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다.

넓은 의미의 ‘타고남 혹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태어나 첫 숨을 들이켤 때 이미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지의 차이를 결정하는 신경다양성, 부모·가족, 속한 집단·문화, 시대, 사회경제적 지위, 애정, 자연환경 상태 등. 나는 인터뷰 내용을 최대한 왜곡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 안의 ‘대사’(문장)를 이용하여 각 인물의 대본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인터뷰한 두 친구에게 바꿔 전달했다. 두 친구는 타인의 대사를 한국어로, 영어로 연기했다. 역할 바꿈을 통해 그들은 타인의 관점을 더 세세히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을까? 그 음성 녹음 파일로 만든 3분 14초의 오디오 작품이 〈세계 한계선〉이다. 이 창작 과정을 통해 ‘관점’이라는 아이디어, 큰 그림에서의 ‘신경다양성’, 그리고 미시적 그림에서의 ‘상호성, 존중, 사랑이 있는 인간관계’를 통한 정의 실현을 이야기했다.

고정관념의 생성 과정 들여다보기

장애예술 담론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문제화할 때, 기관·구조적 영역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초점을 약간 돌려, 〈세계 한계선〉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역에서 문제해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덧붙여, 인터뷰하며 문화마다 ‘다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다. 한국은 비교적 평준화 사회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튀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한 사람을 볼 때 그렇게 ‘튀게’ 변칙으로 인식되는 것을 그가 가진 다른 모습과 이어 일관성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욕망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킨다. 타인에 대한 일관성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많이 다른 모습’과 ‘그냥 보통인 모습’을 정신적으로 바느질하는 경우가 생기며 고정관념·편견·대상화가 생성되는 것 같다.

신경다양성으로 예를 들면,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사람은 알고리즘적 로직이 특출나게 강한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감정지능 혹은 정서지능의 성장이 늦어지곤 한다. 자폐스펙트럼이 없는 사람이 이런 다름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감정 없는 컴퓨터’ ‘고집 센 천재’ 같은 고정관념과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정도에 따라, 고정관념은 폭력이 되기에 충분해진다. 보는 사람 기준으로 한 사람을 ‘덜 인간적이게’ 대상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생성되는 시기를 넘어가기 위해선, 타인 속 여러 모습을 일관성 있게 묘사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보다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친절함 섞인 약간의 놀람을 통해 ‘이해’하는 방향이 동시적으로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이런 식으로 고정관념이 생긴다면, 인종 관련해서는 다른 생김새와 가치관이 이런 식으로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인종 담론, 인지의 차이와 이어진다.

〈세계 한계선〉을 만들고 2개월 뒤, 이런 고정관념 생성 과정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무의식에서 잔잔한 물살이 되었다. 한 사람을 떠올리거나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신체·행동을 자동적으로 연결하지 않을 방법이 있으려나 궁금했다. 그래서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각자 사용하는 물건들을 예술적으로 기록(document)하는 프로젝트를 작년 여름에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이 필수적으로 갖고 다니는 물건들을 통해 한 사람의 고유한 일상과 패턴을 들여다보는 렌즈, 관점을 만들고 싶었다. 예를 들면, 나는 소리에 민감해 불필요한 주파수 대역을 걸러주는 귀마개를 항상 갖고 다닌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이 빛과 소리에 민감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에게 필수가 되어버린 조그마한 물건 여럿을 사진으로 기록함으로써 내 몸, 말, 행위 없이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거다. 쉬운 설명을 위해 내 물건들을 예시로 들었지만,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필수품을 알아가고, 사진 기법으로 기록하여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 현재도 작업을 하고 있다. 아, 작품 이름은 〈속력(Tempo)〉이다.

중요한 상대방과 함께 머무르기

마지막으로 〈세 개의 젓가락(Three Chopsticks)〉이라는 작품은 2개 한 쌍이 아닌 3개 한 쌍의 젓가락과 머무르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3개의 젓가락으로 콩, 팥, 동전 같은 것을 집어 2개의 그릇에 담는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는 미션이 담긴 초대 메시지를 열 명에게 보냈다. 초대할 사람 리스트를 작성하고 수정하며 최종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데에만 3주가 걸렸다. 신경다양성, 인종, 젠더, 문화 관련 차별을 교차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런 삶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도대체 누구와의 관계에서 안전함을 느꼈는지 자신에게 솔직히 고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은 나에게 누가 ‘중요한 상대방’인지 진솔하게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대 리스트에 계속해서 머문 사람들에게 이메일과 카톡으로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1~2주 동안 나의 ‘중요한 상대방’들이 보내주는 비디오를 받으면서 많이 웃었다. ‘3개의 젓가락’에 대한 해석이 창의적이고 웃기기도 했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참여해 주는 게 정말 고마워서 웃음이 나왔다.

비디오는 거의 편집하지 않고,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순서를 매겨 이어 붙였다. 최종본은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내 몸 어딘가에 비추고 싶었다. 이 ‘중요한 상대방’들이 ‘나’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과 경험을 몸에 비추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상 속 사람들은 2개 대신 3개의 젓가락을 이용해 콩 같은 것을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웃었고, 좌절했으며, 즐겼고, 한숨 쉬었고, 계속했으며, 그만두거나, 재시도했다. 내가 경험한 교차적 차별·폭력·편견을 알고 있거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2개가 아닌 3개의 젓가락과 함께 머무르는 모습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준다.

3개의 젓가락 아이디어는 교차적 차별로 복합외상후트라우마장애(CPTSD) 증상 중 관절통과 같은 신체화 증상이 심해지던 무렵, 우연히 머릿속에 떠올랐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아픈 출발인데, 3개의 젓가락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과 출발 이후의 과정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정말 다양하다. 이런 흥미롭고 의미 있는 변환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신경다양성 관련 차별·폭력·편견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신경다양성 멜랑콜리아’와 함께 머무르는 다양한 방식과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고 싶었다.

안전하고 다정한 세계를 기다리며

앞서 이야기한, 신경다양성 관련 가까운 인간관계에서의 좌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를 작품의 오디오를 통해 상상해보았다. 친밀감·애정, 상호성, 의사소통 경험을 과연 재구축할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 오래 남은, 다른 사람이 해준 말 몇 문장을 오디오북 앱의 다양한 목소리로 읽고, 그 말소리들의 상호작용을 창작했다. 퍼포먼스를 시작할 때, 퍼포머가 신체 동작을 변경할 때마다 음운이 들린다.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마치 서로에게 대답하듯이 함께 조합되어 들린다. 때로는 망설이거나 말을 더듬는 것처럼 들리며, 각각 다른 각도에서 소리가 나온다. 그러다가 점차 더 명확하게, 그리고 의사소통하는 것으로 들린다. 희망과 상호성을 통해 의사소통에서 인간관계의 좌표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 ‘나’는 ‘A’라고 말할 것이고, ‘너’는 ‘B’라고 대답할 거다. 이번에는 ‘나’가 ‘A′’라고 말했다가, ‘너’가 ‘B’라고 똑같이 대답할 수도 있지만, 네가 ‘B#’이라고 할 때, 우리는 점차 의사소통 좌표를 전환(shift)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가족, 친구, 혹은 커뮤니티 내 신경다양성적·인식적·문화적·가치관적 차이를 횡단하여 의사소통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잃었다 다시 얻는 파라다이스처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의 좌절과 구조적 차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삶은 ‘한’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소설가 박경리는 “한(恨)은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장애 담론, 장애예술의 스펙트럼이 북반구(the global north)에서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시점에, 한국의 장애 담론과 신경다양성 담론이 더 넓은 장에서 희망과 생, 상실·잃음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양상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아프지만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가 아닐까. 개인과 집단이 마음으로 원하는 그런 안전하고 다정한 세계가 도래할지, 도래한다면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재에 나타날지, 전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여기저기서 일상을 지내고 있을 다양한 신경다양인에게 전하고 싶다.

“무엇을 위해 너무 늦었고, 누구를 위해 너무 늦었나요? Too late for what, too late for whom?” - 랍비이자 학자 줄리아 워츠 벨소(Julia Watts Belser)
“거의 다 왔어! Almost there!” - 나의 미술사 교수 니코 비카리오(Niko Vicario)

  • 펜랜드 공예학교 여름 워크샵 사진 작업장 전경. 각종 장비가 벽을 따라 놓여 있고, 책상 위에 다양한 오브제들이 펼쳐져 있다.

  • 〈세계 한계선(World Limit)〉, 오디오 파일, 3분 14초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AI 기능을 활용해 인터뷰를 기록했다.
    오디오 듣기

  • 〈속력(Tempo)〉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사용하는 물건들을 기록했다. 포장용 에어캡, 귀마개, 고무공, 손톱깍기 등이 있다.

  • 〈세 개의 젓가락(Three Chopsticks)〉, 영상, 11분 23초
    영상 캡처. 작가의 발에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영상 보기

마젠타

‘서사 형성 불능/무능’을 알아가기 위해 컴퓨터공학과 극예술을 공부하다가 현재 대학에서 법, 인지과학 등 다른 분야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마젠타’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마젠타는 신경다양성과 연관된 모든 사람을 투영하여 보여주기에 다수이자 익명이다. 몇몇 전시와 퍼포먼스에 참여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몇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가능해서 종종 지인들의 작품을 위해 번역 작업을 맡기도 한다.
magenta_atnegam@naver.com
▸블로그 magenta_atnegam
▸인스타그램 @010101______stringh_____101010

사진 제공.필자

마젠타

마젠타 

‘서사 형성 불능/무능’을 알아가기 위해 컴퓨터공학과 극예술을 공부하다가 현재 대학에서 법, 인지과학 등 다른 분야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마젠타’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마젠타는 신경다양성과 연관된 모든 사람을 투영하여 보여주기에 다수이자 익명이다. 몇몇 전시와 퍼포먼스에 참여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몇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가능해서 종종 지인들의 작품을 위해 번역 작업을 맡기도 한다.
magenta_atnegam@naver.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ttps://blog.naver.com/magenta_atnegam

상세내용

이음광장

어린 시절, “전생에 우리는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였을 거야”라고 이야기 해주던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신경다양성에 대해 잘 모르고 이해가 다다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곤 했다. 나는 10대 마지막쯤부터 현재까지 다방면으로 신경다양성이 무엇인지 꿰려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에 대해 무지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그 상처와 괴리감이 몸에 쌓여 건강에 영향을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상처와 사랑을 동시에 받는 관계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그중 다수는 관계가 끊겼고, 소수는 서로를 알아가며 천천히 친구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신경다양성과 인지적·지각적 차이

신경다양성은 궁극적으로 인지적·지각적 차이(perceptual differences)이며 동시에 넓은 범위에서 인지적 차이에 포함된다. 난독증적 뇌 회로가 구성되어 있다는 건, 글자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인지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에서 뇌의 구성을 시스템적으로 보고 뇌와 몸의 연결 관련한 연구가 진행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자폐스펙트럼, ADHD, 혹은 기면증이 있으면 ‘장애’로 판명받는 특징뿐만 아니라 개인이 세상, 타인, 자신을 경험하는 게 인지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지의 출발점이 다른데 고유한 인지체계를 지닌 개인이 다른 고유한 인지체계를 지닌 타인을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가,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거에 양가감정이 들게 했던, 아프지만 소중했던 인간관계를 다시 짚어보면, 신경다양성 관련 임상적 진단명과 무관하게, 자신이 속한 문화·시대에 따라, 개인 혹은 집단이 인식할 수 있는 게 다르다는 게 보인다. 약 500년 전만 해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집단 학살하기도 했고, 약 10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선 중국인, 아시아인을 배제하는 차별적 법이 입법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고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극소수였다. 동시대로 돌아와도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한, 자신과 다른 젠더의 관점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이는 장애 유무, 장애 유형, 인종, 민족, 문화, 트라우마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신경다양성 관련 인간관계 상처를 열고 들어가 보면, 인지적 차이에 대한 궁극적 질문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 한계선(World Limit)〉은 그렇게 시작된 오디오 프로젝트(혹은 현대미술 비평적 디자인 인터뷰)이다. 나는 ‘인지적 차이’를 내 앞에 두고 물었다: “나는 생에서 진정한 상호적 관계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가? 누군가가 나를, 나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가?” 이 물음을 신경다양성, 상호성, 그리고 문화 차이를 통해 알아가고자 한국에 있는 친구 한 명과 영국에 있는 친구 한 명을 각각 인터뷰했다. 두 친구와 진솔하게 두 시간가량 이야기하고 나니, 배경 탓이든 타고남이든, 각자 언어를 쓰는 방식,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감정·사랑·우정을 느끼는 방식,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고유하게 다르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다.

넓은 의미의 ‘타고남 혹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태어나 첫 숨을 들이켤 때 이미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지의 차이를 결정하는 신경다양성, 부모·가족, 속한 집단·문화, 시대, 사회경제적 지위, 애정, 자연환경 상태 등. 나는 인터뷰 내용을 최대한 왜곡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 안의 ‘대사’(문장)를 이용하여 각 인물의 대본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인터뷰한 두 친구에게 바꿔 전달했다. 두 친구는 타인의 대사를 한국어로, 영어로 연기했다. 역할 바꿈을 통해 그들은 타인의 관점을 더 세세히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을까? 그 음성 녹음 파일로 만든 3분 14초의 오디오 작품이 〈세계 한계선〉이다. 이 창작 과정을 통해 ‘관점’이라는 아이디어, 큰 그림에서의 ‘신경다양성’, 그리고 미시적 그림에서의 ‘상호성, 존중, 사랑이 있는 인간관계’를 통한 정의 실현을 이야기했다.

고정관념의 생성 과정 들여다보기

장애예술 담론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문제화할 때, 기관·구조적 영역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초점을 약간 돌려, 〈세계 한계선〉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역에서 문제해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덧붙여, 인터뷰하며 문화마다 ‘다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다. 한국은 비교적 평준화 사회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튀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한 사람을 볼 때 그렇게 ‘튀게’ 변칙으로 인식되는 것을 그가 가진 다른 모습과 이어 일관성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욕망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킨다. 타인에 대한 일관성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많이 다른 모습’과 ‘그냥 보통인 모습’을 정신적으로 바느질하는 경우가 생기며 고정관념·편견·대상화가 생성되는 것 같다.

신경다양성으로 예를 들면,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사람은 알고리즘적 로직이 특출나게 강한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감정지능 혹은 정서지능의 성장이 늦어지곤 한다. 자폐스펙트럼이 없는 사람이 이런 다름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감정 없는 컴퓨터’ ‘고집 센 천재’ 같은 고정관념과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정도에 따라, 고정관념은 폭력이 되기에 충분해진다. 보는 사람 기준으로 한 사람을 ‘덜 인간적이게’ 대상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생성되는 시기를 넘어가기 위해선, 타인 속 여러 모습을 일관성 있게 묘사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보다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친절함 섞인 약간의 놀람을 통해 ‘이해’하는 방향이 동시적으로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이런 식으로 고정관념이 생긴다면, 인종 관련해서는 다른 생김새와 가치관이 이런 식으로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인종 담론, 인지의 차이와 이어진다.

〈세계 한계선〉을 만들고 2개월 뒤, 이런 고정관념 생성 과정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무의식에서 잔잔한 물살이 되었다. 한 사람을 떠올리거나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신체·행동을 자동적으로 연결하지 않을 방법이 있으려나 궁금했다. 그래서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각자 사용하는 물건들을 예술적으로 기록(document)하는 프로젝트를 작년 여름에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이 필수적으로 갖고 다니는 물건들을 통해 한 사람의 고유한 일상과 패턴을 들여다보는 렌즈, 관점을 만들고 싶었다. 예를 들면, 나는 소리에 민감해 불필요한 주파수 대역을 걸러주는 귀마개를 항상 갖고 다닌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이 빛과 소리에 민감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에게 필수가 되어버린 조그마한 물건 여럿을 사진으로 기록함으로써 내 몸, 말, 행위 없이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거다. 쉬운 설명을 위해 내 물건들을 예시로 들었지만,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필수품을 알아가고, 사진 기법으로 기록하여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 현재도 작업을 하고 있다. 아, 작품 이름은 〈속력(Tempo)〉이다.

중요한 상대방과 함께 머무르기

마지막으로 〈세 개의 젓가락(Three Chopsticks)〉이라는 작품은 2개 한 쌍이 아닌 3개 한 쌍의 젓가락과 머무르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3개의 젓가락으로 콩, 팥, 동전 같은 것을 집어 2개의 그릇에 담는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는 미션이 담긴 초대 메시지를 열 명에게 보냈다. 초대할 사람 리스트를 작성하고 수정하며 최종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데에만 3주가 걸렸다. 신경다양성, 인종, 젠더, 문화 관련 차별을 교차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런 삶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도대체 누구와의 관계에서 안전함을 느꼈는지 자신에게 솔직히 고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은 나에게 누가 ‘중요한 상대방’인지 진솔하게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대 리스트에 계속해서 머문 사람들에게 이메일과 카톡으로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1~2주 동안 나의 ‘중요한 상대방’들이 보내주는 비디오를 받으면서 많이 웃었다. ‘3개의 젓가락’에 대한 해석이 창의적이고 웃기기도 했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참여해 주는 게 정말 고마워서 웃음이 나왔다.

비디오는 거의 편집하지 않고,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순서를 매겨 이어 붙였다. 최종본은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내 몸 어딘가에 비추고 싶었다. 이 ‘중요한 상대방’들이 ‘나’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과 경험을 몸에 비추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상 속 사람들은 2개 대신 3개의 젓가락을 이용해 콩 같은 것을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웃었고, 좌절했으며, 즐겼고, 한숨 쉬었고, 계속했으며, 그만두거나, 재시도했다. 내가 경험한 교차적 차별·폭력·편견을 알고 있거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2개가 아닌 3개의 젓가락과 함께 머무르는 모습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준다.

3개의 젓가락 아이디어는 교차적 차별로 복합외상후트라우마장애(CPTSD) 증상 중 관절통과 같은 신체화 증상이 심해지던 무렵, 우연히 머릿속에 떠올랐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아픈 출발인데, 3개의 젓가락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과 출발 이후의 과정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정말 다양하다. 이런 흥미롭고 의미 있는 변환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신경다양성 관련 차별·폭력·편견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신경다양성 멜랑콜리아’와 함께 머무르는 다양한 방식과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고 싶었다.

안전하고 다정한 세계를 기다리며

앞서 이야기한, 신경다양성 관련 가까운 인간관계에서의 좌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를 작품의 오디오를 통해 상상해보았다. 친밀감·애정, 상호성, 의사소통 경험을 과연 재구축할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 오래 남은, 다른 사람이 해준 말 몇 문장을 오디오북 앱의 다양한 목소리로 읽고, 그 말소리들의 상호작용을 창작했다. 퍼포먼스를 시작할 때, 퍼포머가 신체 동작을 변경할 때마다 음운이 들린다.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마치 서로에게 대답하듯이 함께 조합되어 들린다. 때로는 망설이거나 말을 더듬는 것처럼 들리며, 각각 다른 각도에서 소리가 나온다. 그러다가 점차 더 명확하게, 그리고 의사소통하는 것으로 들린다. 희망과 상호성을 통해 의사소통에서 인간관계의 좌표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 ‘나’는 ‘A’라고 말할 것이고, ‘너’는 ‘B’라고 대답할 거다. 이번에는 ‘나’가 ‘A′’라고 말했다가, ‘너’가 ‘B’라고 똑같이 대답할 수도 있지만, 네가 ‘B#’이라고 할 때, 우리는 점차 의사소통 좌표를 전환(shift)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가족, 친구, 혹은 커뮤니티 내 신경다양성적·인식적·문화적·가치관적 차이를 횡단하여 의사소통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잃었다 다시 얻는 파라다이스처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의 좌절과 구조적 차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삶은 ‘한’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소설가 박경리는 “한(恨)은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장애 담론, 장애예술의 스펙트럼이 북반구(the global north)에서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시점에, 한국의 장애 담론과 신경다양성 담론이 더 넓은 장에서 희망과 생, 상실·잃음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양상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아프지만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가 아닐까. 개인과 집단이 마음으로 원하는 그런 안전하고 다정한 세계가 도래할지, 도래한다면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재에 나타날지, 전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여기저기서 일상을 지내고 있을 다양한 신경다양인에게 전하고 싶다.

“무엇을 위해 너무 늦었고, 누구를 위해 너무 늦었나요? Too late for what, too late for whom?” - 랍비이자 학자 줄리아 워츠 벨소(Julia Watts Belser)
“거의 다 왔어! Almost there!” - 나의 미술사 교수 니코 비카리오(Niko Vicario)

  • 펜랜드 공예학교 여름 워크샵 사진 작업장 전경. 각종 장비가 벽을 따라 놓여 있고, 책상 위에 다양한 오브제들이 펼쳐져 있다.

  • 〈세계 한계선(World Limit)〉, 오디오 파일, 3분 14초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AI 기능을 활용해 인터뷰를 기록했다.
    오디오 듣기

  • 〈속력(Tempo)〉 신경다양성 관련해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사용하는 물건들을 기록했다. 포장용 에어캡, 귀마개, 고무공, 손톱깍기 등이 있다.

  • 〈세 개의 젓가락(Three Chopsticks)〉, 영상, 11분 23초
    영상 캡처. 작가의 발에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영상 보기

마젠타

‘서사 형성 불능/무능’을 알아가기 위해 컴퓨터공학과 극예술을 공부하다가 현재 대학에서 법, 인지과학 등 다른 분야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마젠타’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마젠타는 신경다양성과 연관된 모든 사람을 투영하여 보여주기에 다수이자 익명이다. 몇몇 전시와 퍼포먼스에 참여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몇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가능해서 종종 지인들의 작품을 위해 번역 작업을 맡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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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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