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예술가의 여행 레시피’는 장애예술가에게 쉼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장소, 뜻밖의 장소나 우연히 발견한 장소, 찾아가는 맛이 나는 곳을 취향과 꿀팁을 담아 전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마감을 서두르던 교정 작업이 슬슬 끝나간다. 이번 주만 해도 붙잡고 있는 작업이 600매를 넘어가고 있다. 비타민제 빈 병과 인공눈물 빈 포장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달력을 보니 오늘 마감 후에는 3일의 여유가 있다. 잠시 컴퓨터 화면에서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려 기차 예매 앱을 연다. 늘 타고 다니던 시간의 기차표를 예매한다. 적당한 숙소도 이틀 예약한다. 그리고 서둘러 일을 마무리한다.
기차에 오르자 숨이 좀 트인다. 부산행 9시 15분.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머리가 꽉 차고 몸이 무겁고 눈이 아프면 난 부산에 간다. 그것도 콕 집어 해운대에 간다.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잡아 한 이틀 바다만 보고 온다. 몸 상태에 따라 동백섬의 데크길을 한 바퀴 돌거나 옛날 기찻길 옆으로 새로 생긴 산책길을 따라 청사포 혹은 송정까지 걷기도 한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접근하기 좋은 시립미술관에 가거나 오래된 사찰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주로 그저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온다.
물론 즐겨 찾는 다른 곳도 있지만, 부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좀 더 잦다. 한국에서는 운전 안 하는 장애인이 혼자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다. 내가 친구들처럼 운전할 수 있다면 선택지가 많아졌을 테지만. 부산에 가장 자주 가는 것은, 다른 곳보다 대중교통으로 바다에 접근하기 쉽다는 게 큰 이유다. 해운대까지는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다. 일반버스는 너무 돌아가서 주로 직행버스를 타는데, 얼마 전부터 직행버스의 높은 계단으로 올라타고 내리기가 약간 힘들다. 40대 후반이 되면서 걸음은 엉망이 되었고, 그래서 전보다 몸과 마음이 편한 곳 위주로 여행한다.
장애여성 혼자 국내 여행을 하는 건 뻔뻔함을 동반해야 한다.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관광지의 맛집이나 택시, 시장 혹은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이 있다. 일본 여행을 혼자 다닐 때 느끼는 눈빛과는 좀 달랐지만,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나에겐 50년 가까운 내공의 세월이 있으니, 눈빛쯤이야 ‘반사!’할 수 있다. 그래도 내가 보행이 불안해 넘어지거나 말이 안 나와 고생하면 싫은 내색 없이 도움의 손길을 주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식당에 가면 구석 자리를 주거나, 술은 안 내주려고 하는 업주도 있어 마음 상하지만 말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3시간 반 정도 지나 부산 동백역에 내렸다. 조금 걸어 나가니 바닷냄새가 바람결에 날아온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는 ‘영화의 거리’가 펼쳐지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방파제 사이로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바닷가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마음은 벌써 신났다.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멀어서 10분쯤 그냥 방파제를 따라 걷기만 했다.
해운대가 좋은 건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경사로가 두세 군데 있다는 거다. 언젠가 군산 바닷가에 갔을 때 아무리 봐도 중간중간 난간도 없는 간이계단만 있어 당황했었다. 결국 처음 본 낯선 사람의 손에 의지했다. 돌아온 후 행정기관에 민원을 보내긴 했지만, 검토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적어도 유명 관광지에는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만들어놨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니 메인 거리가 보인다. 배가 고프다. 좋아하는 돼지국밥을 맛있게 먹고 싶어서 아침에 커피만 한잔 마시고 나왔다. 올 때마다 들르는 식당에 들어갔더니 “오셨어요?” 한다. 이 집을 좋아한 건 가게에 들어올 때 발에 걸리는 게 없어서다. 턱에 걸리거나 계단이 가로막지 않아서 좋다. 푸짐한 국밥 한 그릇에 부추와 마늘, 그리고 새우젓을 조금 넣고 같이 먹으니 애써 여기까지 걸어오길 잘한 것 같다. 안면 있는 손님이라고 요구르트도 두 개나 챙겨주신다.
숙소를 찾아 짐을 놓고 나온다. 3시가 조금 넘었다. 올 때만 해도 오늘은 그냥 쉬어야지 했지만, 역시 가만히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좀 걷다 오자, 청사포까지 갔다 오자 하는 마음이 든다. 올 때는 버스를 타지 뭐. 길을 건너는데 단체관광을 온 아이들이 지하에 있는 수족관으로 들어간다. 이 수족관도 제법 크다. 전에 조카들과 같이 왔었는데 애들보다 내가 더 좋아했던 장소다. 규모가 있는 곳이라 이동하는 루트도 나쁘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이곳 수족관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
미포에 들어서서 산책길을 걷는다. 급할 게 없으니 한 발 한 발. 가끔 스카이캡슐로 불리는 관광 모노레일이 머리 위로 지나간다. 해변열차도 짧은 간격으로 지나다닌다. 돌아올 때는 비싸더라도 저걸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면 마을로 들어가서 걸어도 괜찮겠다. 내일은 달맞이고개에 있는 카페에 갈까? 시장에 가서 해물칼국수를 먹을까? 길을 잃으면 지도를 보지, 뭐. 날씨 좋고 길 좋고 바닷냄새 좋고. 하늘로 다니는 스카이캡슐도 귀엽고. 이곳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피로가 싹 풀린다. 그래, 기차 타고 멀리 온 보람 있다. 서울에 힙한 곳도 많지만, 그리고 약간 식상한 느낌의 장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기 부산 해운대는 영원한 나의 ‘힙지’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
해운대해수욕장은 경사로, 촉지음성안내판, 장애인 전용 주차장과 휠체어 이동을 위한 넓은 보행통로, 장애인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휠체어를 대여할 수 있다.
해운대 해변열차와 스카이캡슐은 전동휠체어 진입은 안 되고 수동휠체어만 가능하다. 해변열차는 줄 설 때 안내원에게 말하면 수동휠체어 접근을 위한 이동형 경사로를 설치해 준다. 스카이캡슐은 엘리베이터가 있어 수동휠체어로 대기실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캡슐 몸체가 좁아 휠체어는 접어두고 좌석에 앉아야 한다.
이희연
편집자. 책을 만들고 가끔 글을 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글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sarafina95@naver.com
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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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 가면 자연과 함께 예술가의 창작욕구를 복돋아주는 여러 전시물들과 공간이 있어서 저도 자주 찾아가고는 합니다. 특히 골목 구석구석 가내수공업 식당들이 많아서 좋은것 같네요. 단지 한끼 음식이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서비스 해주시는 사장님들 덕분에 찾을때마다 깊은 인상 받고는 옵니다.다른곳에서는 접할수 없는 특별한 음식과 인상적인 인테리어등 예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음식과 식재 료 이야기, 그리고 하나의 예술공간과 같은 다양한 음식점 이야기들도 이음온라인에서 다루어주시면좋겠다는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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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저도 해운대에 다시 가고 싶어져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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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이 국내에서 여행을 하려면 뻔뻔해져야 한단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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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칠때 힐링이 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운거 같아요~ 삶에 떠밀려서 지내고 있는 저에게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용기가 부족한거 같아요~ 멀지는 않지만, 가까운 곳이라도 나만의 힐링 장소를 찾아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