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어느 날 나는 SNS에 대표로 사용할 프로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동휠체어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는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나를 잘 나타낼만한 사진을 찾는 중이었고,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휠체어와 함께 찍힌 그 사진이 프로필의 후보로 포착된 것이다. 해상도 좋은 디지털카메라의 표현 능력은 매우 훌륭해서 정확하고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아냈다. 하지만 사진 속 나는 실제 내가 아닌 타인처럼 낯설고 이상했다. 아마 휠체어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장애가 있었지만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기 전에 찍은 사진에는 장애가 드러나는 상징적인 표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불편하게 약간 꺾여있는 다리와 웃음기가 어색한 표정 정도였다.
휠체어를 탄 사진 속 나의 모습은 왜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을까? 휠체어와 함께여서 나의 장애가 더욱 선명해지는 게 창피해서일까? 아니면 휠체어라는 보조기기를 이용하는 나를 쉽게 동일시할 수 없었던 것인가? 그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하다가 접고 뒤이어 더욱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나를 좀 더 인상적으로 표현해 볼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 장의 사진에 표현된 나를 더욱 강렬하고 독특하게 재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주체로서의 자기성찰과 창조적 표현이 예술이라면, 장애인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언제부터인가 복지 현장이나 장애운동판에서 ‘장애’와 ‘예술’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를 마치 연인처럼 붙여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각자 개성이 강한 두 단어는 겉으로 보기에 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마치 부족한 부분을 멋있는 예술이 잘 보충해 줄 것 같고 장애로 인해 사회에서 상처받는 존재를 예술이 치유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오랫동안 문학작품이나 영화, 미술작품에서 표현된 장애는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왜곡되고, 심지어 불행과 공포, 상처의 이미지로 고착화되었다. 예술작품 속에서 장애는 불행한 운명의 상징이거나 ‘보통이 아닌 몸’(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보통이 아닌 몸』, 2015)을 가진 불편한 존재로 묘사된다. 근대가 만들어낸 ‘보편적인 시민’의 모습과는 동떨어지고 전혀 다르며, 세계를 구성하는 현대인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존재인 것이다. 장애는 예술 속에서 두렵고 불행한, 그래서 한없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타자화된다. 문학작품의 장애인 캐릭터는 불행을 상징하는 인물로 재현되고, 영화에서도 장애인은 대부분 불편한 몸을 가진 존재로, 불행한 운명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되곤 한다. 미술작품에서도 장애에 대한 묘사는 불길한 기운을 나타내거나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예술에서 재현된 장애는 사유하고 표현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체 밖에 있는 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근대 이후 사회에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건강하고 젊은 시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근현대 사회에서 장애인과 질병을 앓거나 ‘보통이 아닌 몸’을 가진 사람은 대개 타자로 취급해 거부당하고 차별받아 왔다. 예술작품에서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여 장애에 대한 표현을 거부하고 억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장애에 대한 재현은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미학적 태도가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예술에서의 장애에 대한 재현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기존 예술의 주류화된 규범에서 벗어나 장애 경험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장애를 표현하는 시도가 나타난다. 인권 증진이나 복지제도 구축 등 사회적・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아 예술 속에서 관심받고 재현된 인간상도 변화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성찰과 창작 표현의 결과로 나타난 게 예술이라면, 장애예술도 예술가들의 성찰과 혁신을 통해 시도된 것이다. 이를 장애예술의 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 성과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장애인의 몸을 누구나 드러나는 차이가 있는 몸으로 인식하고,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미를 추구한다는 점이 장애예술의 미학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기존의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 몸에 대한 미학적 재현은 이제 장애를 ‘보통이 아닌 몸’에서 오는 타자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주체성을 부여하고 자신을 새로운 미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례로 석창우는 사고로 두 팔을 잃었기 때문에 의수를 이용하여 서예 작업을 한다. 그는 자신의 몸에 맞는 기법을 개발해 역동적인 ‘수묵 크로키’ 그림에 몰두한다. 그의 작업이 장애미학적 예술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두 손을 대신하는 의수가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붓 터치와 역동적으로 그려지는 질감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의미 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장애를 재현할 때도 장애미학적 표현이 시도된다. 고전적 완벽주의 미학을 거부하고 인간적 삶의 실제를 탐구하는 영국의 현대 미술가 마크 퀸(Marc Quinn)은 장애가 있는 몸의 재현을 통해 존재와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었다. 마크 퀸이 만든 조각품은 신체의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인간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미의 기준을 거부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의 작업은 장애예술의 새로운 미학을 가능하게 만든다.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 전시된 〈임신한 앨리슨 래퍼〉가 그렇고, 서울 아라리오뮤지엄에 소장・전시된 〈키스〉라는 작품도 장애인의 몸을 보여준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예술도 장애를 타자화하거나 왜곡되고 고착화된 재현에서 벗어나 현존하는 실제 주체를 장애예술로 표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장애예술은 현실 세계에 갇혀 억압받는 타자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용기를 전제한다.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사유적이고 적극적인 주체성을 세우고 새로운 미학에 도전할 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예술로의 길이 열릴 것이다. 장애예술, 사람을 혁명적으로 표현하라!
현근식
장애학을 공부하며 장애와 문화예술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쓰고 있다. 십 수년간 장애인 정책 분석 및 모니터링을 해온 경험과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이 글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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