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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장애학으로 장애예술 읽기③ 예술가들이 사는 어느 소행성

  • 현근식 장애학 연구자
  • 등록일 2024-08-14
  • 조회수 341

이음광장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장맛비가 내리다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던 어느 여름날, 떠돌이 여행가 N을 만났다. 오래전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N은 우주 곳곳을 돌며 여러 행성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겪는 갖가지 경험을 글로 쓰는 여행 작가였다. 그는 한 행성에서 육 개월 이상 머물지 않는다는, 나름 여행가로서의 철칙이 있다. 태생이 떠돌이 여행가인 그가 꼭 지키는 약속도 있다. 수년에 한 번씩은 그가 태어난 지구별의 고향 집에 돌아와 나를 비롯한 지인들과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고향 친구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는 N은 어느 여름날 함께 마신 맥주 첫 모금보다 시원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N이 최근 방문했던, 예술가들이 사는 소행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 소행성의 관문인 역에 도착했을 때, N은 무척 놀랐다. 이 소행성에 사는 생명체의 외모가 지구에 사는 우리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눈, 양쪽 귀, 코, 입은 물론이고 두 팔과 두 다리, 심지어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까지 모두 지구인과 똑같았다. 머리 스타일도 지구인과 다르지 않았고, 여러 색과 다양하게 멋을 낸 패션도 디자인 감각이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다채롭고 성스러운 문신을 몸과 다리에 새긴 것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인상 깊었다.

N이 이 행성을 찾은 이유는 우주를 떠돌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예술가가 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우주의 각양각색의 행성을 여행하며 만났던 이마다 작은 별에 사는 독특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명성을 찬양하곤 했다. 어느덧 N은 마음 깊이 예술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곤 했다. 예술가가 말하는 특별한 이야기를 수집하여 글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 행성을 찾아오기 위해 십 년 넘게 노력했던 N은 자신이 생각했던 행성과 행성 사람들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공공장소인 역에서 절절매는 지구인 N을 유심히 지켜보던 행인이 다가와 친절하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번역 앱은 백발이 매력적인 노신사의 질문을 그대로 N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이 행성에 사는 유명한 예술가를 만나러 왔습니다.”
모바일 기기에 설치된 번역 앱은 N을 대신해 노신사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겉모습이 지구인과 같은 행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보았다. 다른 행인들도 이방인의 방문에 빨리 도움을 주기 위해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웅성거리며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열의와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행인들의 정성스러운 관심 덕분에 십 년 동안 만남을 기대해 왔던 예술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행인 중 한 명이 예술가의 친구였던 덕택이다. 행인이 안내하는 대로 뒤따르며, N은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고 한다.

N이 예술가인 그녀를 처음 만날 때의 느낌은 둘 사이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두 존재가 끊어지지 않는 선으로 영원히 이어진 느낌이었다. 첫 만남에 강렬한 인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첫인상이 독특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행가 N은 번역 앱을 작동시킨 뒤 자신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첫 만남을 가슴 설레며 기대했는지를 정성스럽게 말했고, 강렬한 첫인상의 느낌을 전달하려 했다. 끝내 그녀는 N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청각장애가 있었다.

“당신의 심장 소리가 들려!” 그녀는 N의 심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만남의 설렘과 기대, 강렬한 인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심장의 소리는 N의 심장에서 울리는 미세한 진동이 그녀에 전해지는 소리이며, 예민하고 정확한 감각은 그 진동의 차이를 충분히 감지하고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그녀는 자기 심장 또한 떨림에 자유자재로 의미를 실을 수 있어 친구와 가족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듣고 말하는 귀와 입을 통해서 주고받는 대화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대화를 심장의 떨림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마치 가슴을 울리는 음악처럼 심장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영혼을 드러낼 수 있다고도 한다. 다른 존재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를 세심하게 듣고, 자신의 한가운데서 울리는 심장의 떨림으로 의사를 전하는 그녀. 그녀가 심장으로 전한 뜻은 N을 안내해 준 친구의 언어를 통해 N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말소리만 듣던 자신에게,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 준 그녀가 위대한 예술가임이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N은 그녀에게서 또 한 명의 예술가를 소개받았다. 바늘구멍만 한 시야로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시각예술가. 그는 시각장애로 인해 시야가 바늘구멍처럼 좁게 제한되어 있지만 좁은 시야로 거대한 우주의 심연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가 볼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마음이다. 아무리 헤아려 봐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는데도 춤을 추는 무용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가청 범위를 넘어가는 소리로 연주하는 음악가, 보이지 않는 색으로 색칠하는 화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 그 행성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살고 있다. 지구인과 똑같이 생긴 행성인들은 우리와는 달리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 필요한 순간에 도우며 연대하여 살아가고 있다.

떠돌이 여행가의 말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신뢰한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도 훌륭한 예술가들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예술가들은 언젠가 멋지고 훌륭하게 자신을 드러내리라. ‘좋은 예술’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어디에나 존재한다. 열정과 감각만 있다면 어느 곳이나 예술은 꽃을 피운다.

현근식

장애학을 공부하며 장애와 문화예술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쓰고 있다. 십 수년간 장애인 정책 분석 및 모니터링을 해온 경험과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이 글의 원천이 되고 있다.
open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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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11: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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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성에 사는 유명한 예술가를 만나러 왔습니다.”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위안이 되네요. 장애인들의 예술도 예술 그 자체로서 함께 그 으미를 되새기고 향유할 수 있는 취지가 공감됩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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