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농인에게 수어통역이 없는 전시는 미지의 영역이다. 만지고 보고 느끼는 체험전시는 유익하고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농인은 도슨트가 작품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전시에 거의 참여할 수 없다. 보통 도슨트의 진행방식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음성언어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도슨트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기지 않으면 작품에 대한 감상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어쩌다 전시장에 가도 작품을 눈으로 대충 훑듯이 감상하다 끝나버리곤 한다. 마치 한 권의 책을 1분 만에 본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접근성의 미학’이 떨어지는 곳에는 가지 않는 편이다.
관람객과 작품을 연결하는 도슨트의 이야기 중심에는 청인만이 있다. 작품의 제작 시기, 표현기법, 생애, 작품의 의미 등을 설명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그러니 작품 감상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본 청인 관람객의 모습은 헤드폰을 착용한 다음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명받은 모습이었다. 작품을 볼 때 도슨트의 설명을 안 듣는 것과 듣는 것은 차이가 크다. 요즘은 미리 녹음된 오디오 도슨트를 이용하고 있는데, 관람객 100명이면 100명 모두가 헤드셋을 착용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경우도 있다. 청각장애인은 보청기와 인공와우의 한계로 헤드셋을 착용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서 대부분 그냥 입장한다.
유럽을 일주하면서 전시에 대한 접근성을 경험한 적이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영국 수어(BSL) 투어 가이드를 제공한다. 예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대신 비디오 가이드 패드를 무료로 대여받을 수 있었다. 화면에 도슨트가 나와 컬렉션마다 수어해설로 전시 작품을 설명하고 배경 지식을 전달하는 식이었지만, 여러 한계를 느꼈다. 작품 설명도 전체적이 아닌 극소수로 소개하였고, 영국 수어로만 되어있어서 접근성에 한계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도 마찬가지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실제 작품을 보러 갔을 때, 수어통역이나 접근성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어서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클림트 작품에 대한 도슨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청각장애인과 농인에 대한 접근성이 낮다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었다.
반면에 이 두 곳보다 규모가 작은 벨기에왕립미술관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유럽농인연합(EUD, The European Union of the Deaf)의 추천으로 방문한 이곳은 미술관의 미션과 비전이 매우 독특했는데 모든 관람객에게 관람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장애, 문화, 언어의 장벽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미술관에는 휠체어 접근성뿐만 아니라 점자, 수어해설 도슨트,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페셜 투어도 진행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이라고 설명했고 직원이 내게 터치스크린 비디오 패드를 주었다. 전체적으로 UI나 UX 디자인이 간결하고 사용하기 용이했다. 일단 터치해보며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어의 옵션을 미리 만들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벨기에-프랑스 수어(LSFB), 플랑드르 수어(VGT)뿐만 아니라 국제 수어(ISL)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벨기에는 언어를 네 개나 쓰는 나라다 보니 언어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조금 더 열려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일단 국제수어 옵션을 선택한 나는 그 자리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뉴스처럼 형식적으로 배경 지식을 전달하는 딱딱한 통역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예술혼을 담아 표현한 통역이었다. ‘위치를 바꾸다’라는 뜻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쓰는 벨기에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작품 21점을 통역하는 영상을 보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슨트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설움이, 벨기에왕립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통해 청인이 왜 도슨트를 선호하는지 알게 되었다. 벨기에왕립미술관에서 내가 받은 감동을 한국에서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국제수어 영상을 포함해서 말이다.
노선영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으로 글을 쓰고 미디어아트 작가로 활동한다. 저서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고요 속의 대화』 등을 썼고, 《고요 속의 대화(Whisper in Silence)》(2019), 《같은 사람, 다른 감각》(2020), 《고요 속의 대화(Dialogue in Silence)》(2021) 등 미디어아트 체험형 전시를 총괄 진행했다. ‘Festival NADA 2021 : 숨겨진 감각의 축제’(2021), 《헬로미디어아트전 프로젝션 맵핑》(2021)에 미디어아트 작가로 참여했다.
souldea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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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잘 읽었습니다. 벨기에 왕립미술관의 배려가 돋보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