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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와 엄마 사이 어딘가①

이음광장 엄마는 어딨니? 연출이 누구야?

  •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단장
  • 등록일 2023-06-14
  • 조회수1046

이음광장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장애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도, 양육을 하는 엄마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기대받지 않은 미래, 중증의 장애여성 인 덕분이다. 어쩌면 나도 삶에서 노동과 양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여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 대화가 오갈 때면 엄마는 항상 언니를 자랑했다. “우리 큰딸은 너무 착해. 동생도 얼마나 잘 돌봐주는지 몰라” 그런 엄마의 말이 사실은 늘 어디론가 숨고 싶을 만큼 부담스럽고 장애가 있는 동생이 너무나 싫었다고, 언니는… 뒤늦게 고백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부러웠다. 친척들에게 ‘서지원’은 언제나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는 존재, 시설로 보내야 하는 존재, 착한 언니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모든 사람이 상상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상상하지 않았던 결혼과 양육을 하게 되었다. 처음 나와 마주했던 시가 사람들은 환대 대신 연이은 한숨으로 그네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익숙했던 한숨이었다. 그 순간 나의 첫마디는 “저, 아이 낳을 수 있어요”였다. 돌이켜보면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 엄마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쩌면 오기였는지도 모를 양육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임신했을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아이를 키우리라 자기 최면 걸듯이 주문을 외웠고, 태교조차도 나는 나의 장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장애는 불행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과 다를 뿐이고 불편할 뿐이야. 계단 때문에 더 이상 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할 땐 휠체어를 타는 엄마의 문제가 아니야.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 문제야” 읊조렸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엄마를 아이가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며, 장애가 있어서 집에 있고 무능한 엄마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집에선 바닥 생활을 하는 나는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릎으로 서서 다녔고, 언어장애가 있는 나의 말을 아이들이 따라 할까 봐 애써 발음을 또박또박했다. 인권 활동도 좀 더 열심히 했다. 내가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팀장을 하게 된 데는 동료의 제안도 있었지만,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도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려는 선택이기도 했다. 누구도 기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오롯이 완벽한 엄마이고 싶었다. 뻗치는 손가락을 모아서 아이의 옷장에서 옷을 골라 꺼내놓았고 분유도 내가 양을 조절하여 물 온도를 맞추었다. 이유식 재료 또한 모두 유기농으로 내가 골랐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사회가 말하는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노동이 가능하고 언어장애가 없는 비장애여성이 될 수 없었다. 한번은 아이와 둘이 있을 때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이는 열린 문으로 기어서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그 순간 나의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 나는 기어서 아이를 따라 현관 밖 복도로 나갔고, 누가 보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부르는 소리에 나에게 왔고, 우린 함께 기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이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활동지원사께 분노를 토하듯 화를 냈다. 나는 그때 왜 그리 서러웠을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기어서 나가야 했던 나의 모습을 직면했기 때문에 엉뚱하게 활동지원사께 분노를 쏟아낸 건 아닐까…. 장애여성 엄마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육아에는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절대 업어주지 않을 것, 혼낼 때 끼어들지 않을 것,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해보게 할 것” 이 원칙은 장애를 가진 내가 엄마로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고 주체적으로 아이와 관계 맺기 위한 노력이었다. 나는 일상적으로 신변 및 식사 보조 등 돌봄이 필요하지만, 나의 의견과 판단 없이 일방적인 돌봄만 받는다면 그것을 본 아이가 커서 나를 무시할 거란 생각을 항상 했었다. 난 아이를 (도움을 받아) 안아줄 순 있었지만 업어 줄 수는 없다. 만약 활동지원사님이 아이를 업어준다면 나는 업어달라고 보채고 우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혼낼 때 누군가 끼어든다면 아이는 절대 나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특히 나는 언어장애가 있기에 훈육 시간에 더욱 나와 아이 둘만의 관계가 필요하다. 그때부터 활동지원사님과 장애여성 엄마의 눈치 게임이 시작되곤 했다.

활동지원사님은 대부분 50~60대의 중년 여성이고 양육 경험이 있는 분이 많다. 아기 띠와 포대기 중 선택하는 문제, 기저귀 교체 시간, 낮잠 타임 등등. 그 모든 것은 갈등이었다.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건 아이가 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야말로 편견과 비교, 보호 대상이 엉키고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밥을 좋아하지 않아 잘 먹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편견과 차별, 보호의 말이 시작됐다. “엄마가 장애가 있어서 저래, 장애가 있어서 안아주지 못하니 아이가 애정 결핍이야” “일을 해서 아이와 같이 못 있어서 그래” “○○아, 넌 여자니깐 커서 엄마와 동생을 돌봐줘야지, 고생하는 아빠를 도와줘야지” “엄마가 못키우니까, 어쩔 수 없지” 칼날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밥을 먹여주지 말라는 나의 말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때가 되면 다 먹게 돼 있어”라고 말하며 여덟 살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 아이는 판단한다. 더 이상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는 이 집에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기민하게 살핀다.

이것은 비단 장애를 가진 나의 문제만은 아니다. 아이를 오랜 시간 조부모나 아이 돌보미에게 맡겨야 하는 엄마들, 일하는 엄마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나와 활동하는 동료의 경험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돌봄을 모두 수행해야만 ‘엄마’라고 인정받는다. 각자의 상황과 몸은 고려되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의 사회구성원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사회는 언제나 납작하고 단편적으로 나를 구성한다. 휠체어를 타고 말을 할 때마다 침을 흘리는 엄마와 활동가로, 사람들은 정말이지 잘 상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규정지어놓은 ‘정상’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이가 생활하는 어린이집·유치원·학교 행사나 상담이 있을 때 꼭 참여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낯선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딸에게 묻곤 했다. “네 엄마야?” 나는 긴장과 떨림을 감추고, 당당하게 보이려고 삐뚤어진 입을 꾹 다물고 딸의 눈치를 살피기도 한다.

춤추는허리 연극 작품 중 이런 제목이 있다. <여기에 있긴 있는데 여기에 있는 게 안 보여?>(2004).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외출하면 사람들은 물었다. “엄마는 어디 있니?” “저런 몸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워” “아이 아빠가 착하네, 애 아빠가 고생이네” 이런 말들은 무대에 설 때도 듣는다. “저런 몸으로 대사는 어떻게 하지? 대사를 다들 알아들을까?” “아휴, 정말 고생하시네요.” “연출은 대체 어디 갔지?” 2022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빛나는 2>의 현장평가를 나왔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언어장애가 있는 중증장애 배우가 대사 전달이 가능한가요?” 어떻게 관객과 호흡하고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현장평가는 물론 현장의 이슈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지만, 춤추는허리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찾아보고 현장으로 와주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중증의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 것과 같다. 누가 흩뿌려 놓는지 모르는 뾰족한 돌을 매일 밟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비틀거린다. 그럼 아이는 어떨까? 아이 앞에서 인권운동 활동가인 나는 순간순간 몸이 쪼그라든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것은 장애로 인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엄마는 매일 분투하고 실패한다. 정답은 없다. 극복도 없다. 여전히 사회는 나에게 엄마도 노동하는 활동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다양한 역할로 존재하고 싶다. 서지원으로 살고 싶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활동가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고군분투 중이다.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단장이자 배우로 정기공연을 연출하고 출연해왔다.(2010~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 퍼포먼스 <마침, 좋은 삶>으로 참여했고, 장애여성 몸짓 공연 <따로 또 같이>(2011), 웹 독백극 <춤추는 혼잣말>(2020), 연극연습4. <관객연습 - 사람이 하는 일>(2021), 전시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2022), 극단 정기공연 <빛나는>(2019, 2022)에 출연했다.
wdc214@gmail.com
▸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웹페이지

사진 제공.필자

서지원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단장이자 배우로 정기공연을 연출하고 출연해왔다.(2010~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 퍼포먼스 <마침, 좋은 삶>으로 참여했고, 장애여성 몸짓 공연 <따로 또 같이>(2011), 웹 독백극 <춤추는 혼잣말>(2020), 연극연습4. <관객연습 - 사람이 하는 일>(2021), 전시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2022), 극단 정기공연 <빛나는>(2019, 2022)에 출연했다.
wdc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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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장애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도, 양육을 하는 엄마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기대받지 않은 미래, 중증의 장애여성 인 덕분이다. 어쩌면 나도 삶에서 노동과 양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여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 대화가 오갈 때면 엄마는 항상 언니를 자랑했다. “우리 큰딸은 너무 착해. 동생도 얼마나 잘 돌봐주는지 몰라” 그런 엄마의 말이 사실은 늘 어디론가 숨고 싶을 만큼 부담스럽고 장애가 있는 동생이 너무나 싫었다고, 언니는… 뒤늦게 고백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부러웠다. 친척들에게 ‘서지원’은 언제나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는 존재, 시설로 보내야 하는 존재, 착한 언니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모든 사람이 상상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상상하지 않았던 결혼과 양육을 하게 되었다. 처음 나와 마주했던 시가 사람들은 환대 대신 연이은 한숨으로 그네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익숙했던 한숨이었다. 그 순간 나의 첫마디는 “저, 아이 낳을 수 있어요”였다. 돌이켜보면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 엄마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쩌면 오기였는지도 모를 양육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임신했을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아이를 키우리라 자기 최면 걸듯이 주문을 외웠고, 태교조차도 나는 나의 장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장애는 불행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과 다를 뿐이고 불편할 뿐이야. 계단 때문에 더 이상 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할 땐 휠체어를 타는 엄마의 문제가 아니야.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 문제야” 읊조렸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엄마를 아이가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며, 장애가 있어서 집에 있고 무능한 엄마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집에선 바닥 생활을 하는 나는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릎으로 서서 다녔고, 언어장애가 있는 나의 말을 아이들이 따라 할까 봐 애써 발음을 또박또박했다. 인권 활동도 좀 더 열심히 했다. 내가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팀장을 하게 된 데는 동료의 제안도 있었지만,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도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려는 선택이기도 했다. 누구도 기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오롯이 완벽한 엄마이고 싶었다. 뻗치는 손가락을 모아서 아이의 옷장에서 옷을 골라 꺼내놓았고 분유도 내가 양을 조절하여 물 온도를 맞추었다. 이유식 재료 또한 모두 유기농으로 내가 골랐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사회가 말하는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노동이 가능하고 언어장애가 없는 비장애여성이 될 수 없었다. 한번은 아이와 둘이 있을 때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이는 열린 문으로 기어서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그 순간 나의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 나는 기어서 아이를 따라 현관 밖 복도로 나갔고, 누가 보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부르는 소리에 나에게 왔고, 우린 함께 기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이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활동지원사께 분노를 토하듯 화를 냈다. 나는 그때 왜 그리 서러웠을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기어서 나가야 했던 나의 모습을 직면했기 때문에 엉뚱하게 활동지원사께 분노를 쏟아낸 건 아닐까…. 장애여성 엄마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육아에는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절대 업어주지 않을 것, 혼낼 때 끼어들지 않을 것,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해보게 할 것” 이 원칙은 장애를 가진 내가 엄마로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고 주체적으로 아이와 관계 맺기 위한 노력이었다. 나는 일상적으로 신변 및 식사 보조 등 돌봄이 필요하지만, 나의 의견과 판단 없이 일방적인 돌봄만 받는다면 그것을 본 아이가 커서 나를 무시할 거란 생각을 항상 했었다. 난 아이를 (도움을 받아) 안아줄 순 있었지만 업어 줄 수는 없다. 만약 활동지원사님이 아이를 업어준다면 나는 업어달라고 보채고 우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혼낼 때 누군가 끼어든다면 아이는 절대 나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특히 나는 언어장애가 있기에 훈육 시간에 더욱 나와 아이 둘만의 관계가 필요하다. 그때부터 활동지원사님과 장애여성 엄마의 눈치 게임이 시작되곤 했다.

활동지원사님은 대부분 50~60대의 중년 여성이고 양육 경험이 있는 분이 많다. 아기 띠와 포대기 중 선택하는 문제, 기저귀 교체 시간, 낮잠 타임 등등. 그 모든 것은 갈등이었다.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건 아이가 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야말로 편견과 비교, 보호 대상이 엉키고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밥을 좋아하지 않아 잘 먹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편견과 차별, 보호의 말이 시작됐다. “엄마가 장애가 있어서 저래, 장애가 있어서 안아주지 못하니 아이가 애정 결핍이야” “일을 해서 아이와 같이 못 있어서 그래” “○○아, 넌 여자니깐 커서 엄마와 동생을 돌봐줘야지, 고생하는 아빠를 도와줘야지” “엄마가 못키우니까, 어쩔 수 없지” 칼날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밥을 먹여주지 말라는 나의 말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때가 되면 다 먹게 돼 있어”라고 말하며 여덟 살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 아이는 판단한다. 더 이상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는 이 집에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기민하게 살핀다.

이것은 비단 장애를 가진 나의 문제만은 아니다. 아이를 오랜 시간 조부모나 아이 돌보미에게 맡겨야 하는 엄마들, 일하는 엄마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나와 활동하는 동료의 경험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돌봄을 모두 수행해야만 ‘엄마’라고 인정받는다. 각자의 상황과 몸은 고려되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의 사회구성원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사회는 언제나 납작하고 단편적으로 나를 구성한다. 휠체어를 타고 말을 할 때마다 침을 흘리는 엄마와 활동가로, 사람들은 정말이지 잘 상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규정지어놓은 ‘정상’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이가 생활하는 어린이집·유치원·학교 행사나 상담이 있을 때 꼭 참여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낯선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딸에게 묻곤 했다. “네 엄마야?” 나는 긴장과 떨림을 감추고, 당당하게 보이려고 삐뚤어진 입을 꾹 다물고 딸의 눈치를 살피기도 한다.

춤추는허리 연극 작품 중 이런 제목이 있다. <여기에 있긴 있는데 여기에 있는 게 안 보여?>(2004).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외출하면 사람들은 물었다. “엄마는 어디 있니?” “저런 몸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워” “아이 아빠가 착하네, 애 아빠가 고생이네” 이런 말들은 무대에 설 때도 듣는다. “저런 몸으로 대사는 어떻게 하지? 대사를 다들 알아들을까?” “아휴, 정말 고생하시네요.” “연출은 대체 어디 갔지?” 2022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빛나는 2>의 현장평가를 나왔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언어장애가 있는 중증장애 배우가 대사 전달이 가능한가요?” 어떻게 관객과 호흡하고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현장평가는 물론 현장의 이슈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지만, 춤추는허리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찾아보고 현장으로 와주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중증의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 것과 같다. 누가 흩뿌려 놓는지 모르는 뾰족한 돌을 매일 밟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비틀거린다. 그럼 아이는 어떨까? 아이 앞에서 인권운동 활동가인 나는 순간순간 몸이 쪼그라든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것은 장애로 인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엄마는 매일 분투하고 실패한다. 정답은 없다. 극복도 없다. 여전히 사회는 나에게 엄마도 노동하는 활동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다양한 역할로 존재하고 싶다. 서지원으로 살고 싶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활동가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고군분투 중이다.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단장이자 배우로 정기공연을 연출하고 출연해왔다.(2010~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 퍼포먼스 <마침, 좋은 삶>으로 참여했고, 장애여성 몸짓 공연 <따로 또 같이>(2011), 웹 독백극 <춤추는 혼잣말>(2020), 연극연습4. <관객연습 - 사람이 하는 일>(2021), 전시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2022), 극단 정기공연 <빛나는>(2019, 2022)에 출연했다.
wdc214@gmail.com
▸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웹페이지

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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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3 09: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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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엄마는 매일 분투하고 실패한다. 정답은 없다. 극복도 없다. 여전히 사회는 나에게 엄마도 노동하는 활동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다양한 역할로 존재하고 싶다. 서지원으로 살고 싶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활동가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고군분투 중이다." 마지막 문장이 정말 와닿네요. 저도 저의 분투와 실패를 응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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