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대 한쪽에 철봉의 형태로 세워진 키네틱 아트 조형물은 29동 댄스씨어터의 신작 〈炳(밝을 병) 身(몸 신): 넘어서는 의지〉에서 다른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용수들이 이 조형물에 매달리거나 이것의 움직임을 모티브로 하여 춤 동작을 구축해 간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품에 접근하는 데 주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장치이다. ‘형태’라는 말에 이데아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하자면, 이 조형물은 청각장애와 발달장애가 있는 이들이 포함된 무용수들에게 결여라는 점에서 욕망하게 되는 그 무엇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선영 안무가가 인용한 ‘반쪽이 설화’가 말해주듯, 둘로 쪼개져 남겨진 한쪽은 부재하거나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다른 한쪽과 영원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다. 즉, 부족하다거나 모자란다는 관념은 어느 하나의 시점을 가정했을 때의 얘기이며, 이미 모든 게 다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깨우쳐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과연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도달했을까.
다시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움직임을 장착한 무대 조형물로 돌아가 보면,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조형’에 내포된 ‘형’ 혹은 ‘모양’이라는 말은 플라톤적 의미를 띄는 이데아의 어원에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 ‘형태’라는 단어에는 이상성의 측면,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성의 의미까지 가정돼 있다는 것이다. 굳이 이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형태에의 지향이나 형태를 이루려는 의지는 어느 사태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니체는 예술충동의 측면에서 이러한 조형에의 의지를 아폴론적인 것으로 일컫기도 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가상과 명료한 조형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와 함께 도취와 광기, 정념의 세계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예술충동의 다른 한 축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조형물의 상징성과 함께, 빈틈없이 몸을 최대한으로 가동하는 무용수들은 이 양대 축 사이의 존재로서 작용하는 듯 보일 수 있다. 니체도 지적했듯이, 이 두 가지는 분리해서 파악될 수 없으며 갈등하거나 균형점을 찾아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품 제목에서의 ‘병신’ 즉, ‘밝은 몸’이라는 의미는 음영이 짙을수록 눈부심이 강조되듯, 양극의 역동성이 작용하는 몸이라고 생각된다. 따지고 보면 ‘반쪽이’라는 것은 조형성이나 형태의 측면만을 의식한 기울어진 관점에서 기인한 표현이다.
사실 장애인의 춤만큼 눈에 보이는 형태를 뛰어넘는 경지,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가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안무자가 언급한 공옥진의 병신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비틀리고 허물어져 가는 몸일수록 반대급부적인 에너지는 그만큼 더욱 크게 치솟으며 경이감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흘러넘치는 디오니소스적인 과잉과 긍정의 힘, 비극 가운데서도 거기에 휩쓸려서 무너지지 않으며 오히려 먼저 고통받은 자로서 손 내미는 포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장애인의 춤은 아니지만 미메시스적 정동과 파토스를 통해 비장애인인 관객이 되려 구원과 위로를 얻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파리 8대학 무용과 교수이자 평론가인 이자벨 지노는 이러한 포용에 대해, “비장애인의 포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장애인의 포용”이라 말한 바 있다.
이미 여러 다른 작품에서도 만났던 청각장애 무용수 김희화의 춤은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나 온몸이 귀가 되어 놀라운 감응력을 보여주었고, 관계적 차원에서 장애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며 다큐멘터리와 결합을 도모한 협업 작업을 통해 만났던 발달장애 무용수 백지윤의 존재감 또한 이번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 둘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양대 축처럼 보이는데, 조형적 앙상블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전자와 군무진의 대형 안에 속해 있다가도 거기서 빠져나오며 유유히 공간을 누비기도 하는 후자가 대비되면서도 공존의 묘미가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음악 역시 구조화된 유형과 진동이나 사운드가 강조되는 유형을 오갔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비장애 무용수들과 함께하는 소위 ‘칼군무’ 스타일의 안무는 스틸 재질의 기하학적 조형물과 더욱 동화되어 가는 측면이 두드러졌는데, 심지어 극에 달한 운동성으로 인한 몸의 물리적 소진조차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는 장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의 기계와 같아지는 데까지 이르는, 근대적인 극복의 프레임을 떠올리게 한다. 무용 이론가인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앞서 언급한, 힘에의 의지가 발현되는 현장으로서의 몸 개념이 몸을 통해 주체성을 다시 생각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를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서처럼 춤에 나타나는 ‘근대성의 키네틱한 충동’(레페키)이다. 이는 공옥진의 몸과 춤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넘어서는 의지’가 이러한 충동에 동화될수록, 그로츠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주체성을 장애인의 당사자성으로 바꿔서 살펴볼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사실 너무나 탁월한 자질을 갖춘 김희화 무용수의 경우, 외부의 비트나 다른 비장애인 무용수의 움직임과 동질화하는 대신, 자기 몸의 고유한 박동과 리듬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과 대화하고 탐색하는 여정 자체가 이미 춤이며,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용수 각자의 특성과 자질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는 안무가의 성향은, 치밀한 군무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 못지않게, 철봉에 매달리는 백지윤과 비장애 무용수가 함께하는 연대감으로 마지막 장면이 마무리되는 것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성향은 공동체 내 관계성과 당사자성을 다룬 기존의 독자적인 작업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번 작업은 이전에 접했던 것보다는 그러한 특성이 상대적으로 옅어 보였지만, 장애무용의 안무가가 매우 드문 와중에 계속 지켜보게 되는 창작자임은 틀림없다.
炳(밝을 병) 身(몸 신): 넘어서는 의지
29동 댄스씨어터|2023.12.8.~12.9.|강동아트센터 소극장
인간의 육체적인 존재는 불완전한 미완의 존재이며 결핍의 존재임을 뜻한다. 이 작품의 구상은 흉내나 모방이 아니라 온전히 그들이 되었던 예인 ‘공옥진’의 춤과 설화 ‘반쪽이’가 다스린 내면의 호랑이라는 파토스적 에너지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이미 영적으로 완전한, 그러나 아직 미완의 육체적 존재인 너와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느끼는 결핍과 억압된 내면의 실타래 또는 덩어리를 스스로 풀어내고, 그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 의지의 몸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스스로 밝게 빛나는 몸’을 통해, ‘하나의 우주로서 스스로 밝게 빛나는 신’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공연정보 보기 [문화소식]
▸ 29동 댄스씨어터 홈페이지
허명진
무용전문지 [몸] 기자를 거쳐 2003년 무용예술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연예술지 [판] 편집위원, 국립현대무용단 교육&리서치 연구원을 거치면서 무용의 접점을 다변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choreia@hanmail.net
사진 제공.29동 댄스씨어터(촬영. Oframe)
2024년 2월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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