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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예술가의 여행 레시피⑥ 아픔도 그리움도 넉넉히 안아주는 속초 바다

  • 남호섭 배우, 소울씨어터 대표
  • 등록일 2024-11-13
  • 조회수 37

이음광장

‘예술가의 여행 레시피’는 장애예술가에게 쉼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장소, 뜻밖의 장소나 우연히 발견한 장소, 찾아가는 맛이 나는 곳을 취향과 꿀팁을 담아 전합니다.

사랑하는 이음으로부터 여행에 관한 글을 요청을 받고 며칠을 ‘여행’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집어삼켰다. 바로 지금이다! 정확히 글을 써야겠다고 느낀 건. 오늘 아침 바람이 바야흐로 겨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정하는 겨울이 나에게 온 것이다. 여행한다면 바로 속초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안되면 이른 시일 내에 속초로 가라.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찾아라.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인큐베이터 안에 있다가 모친 품에 안겨 이주한 곳이 속초인지라 나에게 속초는 고향과 다름없다. 초・중・고 모두 속초에서 보낸 덕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인 속초를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 진골 중의 진골이라 할 수 있겠다. 나에겐 앞바다가 속초의 푸르른 동해였으며, 뒷산은 울산바위가 금강산인지 알고 눌러앉은 명산 중의 명산 설악산이었다. 척산 온천은 보너스이고 바다와 연결된 호수인 석호를 두 개나 품은 도시다. 푸른 용님이 살고 계시는 청초호와 황룡님이 계시는 영랑호를 가진 속초다.

나의 모친은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시내에 있는 속초문화회관(현 속초문화예술회관) 내에서 작은 커피숍을 운영하셨다. 속초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는 모든 사람, 특히 연극 하는 사람들은 그 커피숍을 거의 합숙소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배가 고프니 라면을 끓여 달라, 여기서 연습을 좀 하겠다, 대기실이 없으니 대기실로 좀 쓰게 해달라 등. 어린 시절의 나에게 연극이, 예술가의 삶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젖어든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속초에서 연극을 했다.

여느 도시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인프라였지만 단 한 가지, 예술가인 나에게 큰 선물은 아바이마을의 바다였다. 작업 속에서 쌓인 나의 잡념, 수많은 사람과 아웅다웅하며 만들어진 상처, 공허함, 불쑥불쑥 올라오는 오만과 욕심. 이런 것들을 버리기 위해 나는 아바이마을을, 그리고 그 바다를 찾았다. 그곳은 어느 날은 엄한 아버지처럼, 어느 날은 포근한 어머니 품처럼 나를 와락 껴안는다. 회초리를 몇 대 얻어맞고 엉엉 울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토닥임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연극을 할 때뿐만 아니라 내 삶에 어떤 고난이나 시험에 들었을 때도, 어린아이가 이 세상이 너무 무서워 아빠 엄마를 찾듯이, 속초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속초는 한자어를 풀이하면 ‘묶을 속(束)’ ‘풀 초(草)’, 풀을 묶었다는 의미다. 속초의 지형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다. 지쳐 누워있는 소가 그 앞에 묶어놓은 풀을 뜯고 다시 힘차게 달려가자는 미래지향적인 이름이다. 그런 속초에 조금은 느낌이 다른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아픔’이다. 청호동에 있는 아바이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곳이다. 해변에 판자촌을 만들어 추위와 배고픔과 바람과 파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움과 싸우며 견뎌냈던 장소이다.

북한에서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을 일컫는 ‘아바이’라는 말에서 따온 그곳. 저쪽에 두고 온 가족, 동무들이 눈에 밟혀 살지도 죽지도 못했던 그곳, 그럼에도 살아보고자 명태잡이 하러 거친 바다에 몸을 던졌던 아바이들과 어마이들의 마을이다. 지금은 많은 것이 발전하고 변했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인 슬픔이다. 아바이마을의 수많은 사연과 슬픔이 조금이라도 공감된다면 아마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시련에 대해 조금은 고개를 숙일지도 모른다. 아바이마을 앞바다에 토해내고 던져버리고 오라. 동해바다는 당신이 무엇을 내던지든 전부 받아줄 것이다.

그리고 다 토해내 버렸다면 서둘러 다시 속을 채워라. 명태회가 올라간 함흥냉면, 싱싱한 회, 시원한 물회, 그것도 아니면 ‘대~게 맛있는 대게!’ 말하자면 입 아픈 먹거리가 너무나 많다. 어딜 가나 맛집이다. 그래도 로컬 맛집을 원한다면 할머니 감자탕을 강력추천한다. 망설이지 말고 가보라. 앞으로 당신 머릿속에는 ‘속초는 감자탕이지! 암! 그렇고말고!’ 하게 될 것이다.

아바이마을은 속초시에서도 시내와 섬처럼 동떨어져 있다. 지금은 시내와 아바이마을을 연결하는 멋진 다리도 만들어져 교통이 꽤 원활해졌다. 속초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과도 거리가 가까워 버스보단 택시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속초는 지역 특성상 여행 스팟이 옹기종기 모여있어서 비교적 택시가 편하고 오히려 저렴하다. 인구 대비 택시 보유량이 전국 최고라는 사실을 예전에 어떤 택시기사님께 들은 바 있다. 아! 속초 사람들 말투가 어쩌면 간첩처럼 들리거나 시비 거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오해하지 말자. 그 어디보다 정이 넘치는 츤데레다. 모쪼록 당신의 속초 여행이 자신과 또 다른 이들의 아픔까지 사랑하게 되는 여행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필자가 긴 야상점퍼와 청바지를 입고 흰지팡이를 짚고 해변 모래사장에서 어두운 밤바다를 향해 서 있다. 멀리 해안가를 따라 불이 켜져 있다.
  • 파란 하늘에 솜털구름이 가득한 해변 모래사장에서 필자가 한 손에 음료 컵을 잡고 마시고 있다.

(왼쪽) 해변에서 밤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필자. (오른쪽) 한낮의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필자
사진 제공. 필자

  • 노을지는 어스름한 시간.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아올린 구조물이 있다. 한 면은 전면 유리로 되어 있고, 내부의 전시공간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길 건너편에는 도심과 산 풍경이다.
  • 집 건물 한편에는 커다란 고무대야와 작은 통들이 쌓여 있고, 건물 벽에는 수묵담채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인과 한복 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짐을 인 여인이 자갈길을 걷고 있다. 뒤로 많은 사람이 따라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왼쪽) 아트플랫폼 갯배. 2016년 마을미술프로젝트로 조성된 아바이마을 최초 문화예술공간이다. (오른쪽)
아바이마을 골목길 벽화
사진 출처 : 아바이마을 홈페이지

[알아두면 좋은 정보]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속초시 청호동에 형성된 아바이마을은 실향민들의 삶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서 온 실향민이 많다. 식당가 골목에 함흥냉면과 오징어순대, 아바이순대국 등 북한의 향토 음식점과 카페가 늘어서 있다. 2020 열린관광지로 선정된 아바이마을은 장애인용 주차구역이 설치되어 있고 주차장 인근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다. 엘리베이터, 촉지음성안내판 등을 조성하여 여행을 즐기기 편리하다. 속초시는 2023년 ‘열린 관광지’ 7개 코스 중 하나인 ‘속초스토리 코스’로 아바이 벽화거리→설악·금강대교 전망대→아바이마을→갯배→청년몰을 소개하고 있다.

남호섭

속초에서 극단 소울씨어터를 이끌며 배우, 연출가, 기획자로 활동한다. 2004년 연극 〈날 보러 와요〉로 최연소 우수연기상을 받아 단국대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했고, 2013년 미쟝셴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16년 〈카운터포인트〉로 대한민국연극제 금상 수상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주요 출연작으로 〈만주전선〉 〈그날 그날에〉 〈아카시아 흰꽃은 바람에 날리고〉 등이 있다. 2020년에는 〈햄릿〉을 바탕으로 관객체험형 공연인 〈블라인드 씨어터〉를 제작·연출했다. 2018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남호섭 배우의 삶과 연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초승달의 집〉(김재영 감독)으로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otong07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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