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시선
6월이 되면 나는 종종 강릉 경포호수를 떠올린다. 햇살이 조금씩 짙어지고 연꽃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계절, 초록빛 잎들이 호수 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하면 마음 한편에서 오래된 기억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과 잔잔한 호수의 윤슬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20년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휠체어 타고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경포호수와 경포해변을 소개한다. 끝없이 펼쳐진 동해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호수, 그리고 휠체어로도 천천히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산책길까지.
하지만 경포는 내게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남아 있는 장소가 아니다. 웃음이 있고, 땀이 있고, 조금은 무모했던 청춘이 있고, 지금도 떠올리면 배를 잡고 웃게 되는 사건 하나가 남아 있는 곳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07년 무렵, 전동 휠체어를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KTX가 강릉까지 달리지 않았고, 장애인콜택시도 흔하지 않았다. ‘이동권’이라는 말보다 이동의 불편을 더 자주 경험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객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렸다. 기차는 느렸지만 이상하게도 설렘은 더 컸다. 그건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릉역에 도착한 뒤에도 경포해변까지는 약 6km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도로 사정도 모른 채 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지만,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직접 달려 바다를 향했다. 그 시절의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여행이었으며, 모험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마주한 동해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 짭조름한 바닷바람… 그리고 해송림 사이를 지나오는 솔향기. 파도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마치 방전된 배터리가 다시 충전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금도 힘들 때면 바다가 떠오른다.
경포호수도 마찬가지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연꽃이 수면을 수놓는다. 가을이면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겨울이면 철새들이 찾아와 고요한 풍경을 완성한다. 같은 장소인데도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경포를 좋아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경포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벚꽃이 만개한 경포호수
그날 우리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네 명이 함께 여행 중이었다. 경포해변 근처 솔밭 데크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앞에는 일행 한 명이 먼저 가고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내 뒤쪽에서는 언니 두 명이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솔향기가 짙게 풍기던 오후였다. 언니들이 잘 오고 있나 확인하려고 정말 잠깐 고개를 돌린 것이다. 단 1초, 그 짧은 순간, 휠체어 바퀴가 데크 가장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쿵!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휠체어째 데크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시야는 갑자기 낮아졌고 눈앞에는 모래와 솔잎이 가득했다. 앞서가던 내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언니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석미 어디 갔지?” “방금 여기 있었는데?” 한참을 찾던 언니들에게 내가 외쳤다.
“언니! 나 여기 있어!” 언니들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데크 아래에서 휠체어째 모래와 솔잎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이 번져 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나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나를 발견한 언니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한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웃음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육중한 전동 휠체어를 다시 세울 수도 없었고, 데크 위로 끌어올릴 방법도 없었다. 결국 112에 전화했다. 잠시 후 경찰관들이 도착했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데크 아래 떨어져 있는 나와 휠체어를 보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솔잎과 모래 위에 떨어져서 다행히 안 다쳤어요.”
경찰관들은 조심스럽게 휠체어를 들어 올리고, 나를 안아서 다시 휠체어에 태워줬다. 그렇게 구조 아닌 구조를 받고 다시 여행을 이어갔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함께 여행했던 언니들과 한참을 웃는다.
누군가는 내게 묻는다.
“여행 다니면서 좋은 일만 있었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요. 여행하다 보면 사건·사고가 꼭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생긴다. 길이 막히기도 하고, 뜻밖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불편함 자체가 아니다. 그 순간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나를 도와주었던 경찰관들처럼 예상하지 못한 소중한 만남도 있다. 그리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기에 얻게 된 새로운 경험들이 있다.
나는 지금도 여행을 떠난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는 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는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묻지만, 나는 여행이 힘들어서 포기해야 할 이유보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면 되고, 문턱이 있으면 방법을 찾으면 된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당신도 갈 수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어려움마저 웃으며 추억하게 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다음 여행을 계획한다.
경포해변 옆 데크가 깔린 솔밭과 벚꽃나무길
경포해변 포토존
[알아두면 좋은 정보]
경포호수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시내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유천(楡川) 등의 작은 하천이 흘러든다. 호반 서쪽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경포대는 경포호를 배경으로 한 관동8경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경포호는 호수 주위의 오래된 소나무숲과 벚나무가 유명하며, 해안사주는 경포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경포호수 주변 곳곳에 장애인 주차장과 장애인 화장실이 있다.
- 주소 : 강원 강릉시 경포로 365
- 경포호수 홈페이지
- 강릉무장애관광센터 홈페이지 경포호수
- 강릉무장애관광센터 전화 033)640-4531
경포해변
경포호 앞에 자리하고, 경포해수욕장이라고도 불린다. 모래사장 총면적은 144,000m², 길이 1.8km, 폭 80m로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중앙광장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고, 인근에 급속충전기도 있다. 경포관광안내센터에서 열린관광지 리플렛과 점자 리플렛을 받을 수 있고, 수동휠체어를 대여할 수 있다.
- 주소 : 강원 강릉시 창해로 514(안현동)
- 경포해변 홈페이지
숙박
- 스카이베이 경포호텔 : 장애인 객실 사전예약 필요(강원 강릉시 해안로 476, 전화 0507-1441-8903)
- 세인트 존스 : 장애인 객실 사전예약 필요, 반려동물 동반 가능(강원 강릉시 창해로 307, 전화 033-660-9000)
※강릉 광역장애인 콜택시 : 전화 1577-2014(강릉역 1번 게이트 이용)

하석미
장애 인식개선 강사이자 여행작가, 문화접근성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내외를 여행하며 무장애 환경과 문화적 권리를 알리고, 여행 정보를 공유해 장애인의 이동권 확대에 힘쓰고 있다. 현재 한국무장애여행연구센터 대표로서 방송, 강연, 집필 활동을 통해 모두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chanmee07@naver.com
사진 제공.필자
2026년 6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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