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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한영현 창작자와 편지쓰기

이음광장 밝은 음성의 방

  • 밝은방 창작그룹
  • 등록일 2020-10-27
  • 조회수749

그녀에게는 문득 작은 종이를 건넨다.
손바닥만큼 작은, 그래서 결코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을 자그마한 종이다.
그녀가 붓을 쥔 손을 잠시 멈출 때, 또는 혼자만의 즐거운 생각으로 가만히 웃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의 상상 속으로 멀리, 짐작도 할 수 없이 멀리 나아가고 있을 때, 그 상상을 깨지 않을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작은 종이 하나를 건넨다.

“영현씨, 편지 한번 써볼까요.”

그리고 기다린다.
한 시간. 또는 하루.
일주일. 또는 한 달.
기다리지 않는다.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까마득히 잊었을 무렵, 내가 나만의 상상 속으로 멀리, 돌이킬 수 없이 멀리 파고들고 있을 때 그녀는 그 상상을 깨지 않는 자그마한 음성으로 나를 부르며 작은 종이 하나를 내민다.

  • 한영현 <라체원에게>, 2020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써 내려간 글자들.

고쳐 쓴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흔적들.
정직하게 찍힌 마침표들.
단순하지만, 발신인의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는 소박한 문장들.
오로지 수신인의 안부를 묻고, 행복을 빌어주려는 의지로만 가득한 밝은 음성의 공간.

이 공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어둡다고 느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어두웠음을 발견한다. 손바닥만 한 편지 속에 형성된 음성의 공간이 너무나 밝아서, 편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미세한 빈틈도 없이 환하게 밝아져서, 아아 어두웠구나, 또다시 어두워지고 말았었구나, 매번 깨닫게 된다.

한영현 <최종일에게>, 2019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펼쳐진 음성의 공간은,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실제 음성과 닮았고(그녀는 밝게 속삭인다), 또한 그녀가 그리는 그림과도 닮았다. 풀잎과 꽃, 작은 화병과 그릇, 작은 동물들이 가지런히 배열된 풍경을 그리는 한영현 창작자. 그녀가 편지 속에서 발화하는 그 밝음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도 강렬히 발화하고, 그녀의 그림 앞에서 그녀의 편지를 읽다 보면 편지 속 음성이 그림 속 작은 동물, 식물이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한영현 <꽃무늬 화병>, 종이에 수채 및 색연필, 240x320mm, 2019

(이를테면 저 무수한 꽃송이들은 말하는 것 같다: 행복하세요. 잘 지내세요. 내일 되면 잘 되실 겁니다.)

한영현 <숲속의 버섯집>, 종이에 수채 및 색연필, 370x520mm, 2019

(작은 버섯들은 속삭이는 것 같다: 근사해요. 잘하신 것 같습니다. 대단해요. 행복하세요.)

한영현 창작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작은 종이를 건넨 건 지난여름, 정확히 8월 12일이다. 내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거리두기 완화로 잠시 재개되었던 밝은방 워크숍이 광화문집회 이후 다시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얼마 뒤 워크숍 자체가 아예 사라지게 되면서 그날이 한영현 창작자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작은 종이를 건네받은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쓸 편지의 수신인을 미리 말해주었다. 워크숍을 하다 쉬는 시간에 나가면 늘 커피를 타주는 선생님, 항상 검은 옷을 입는 그 선생님에게 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보석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 편지 또한 눈에 선하다. 아직 누구도 읽지 않은, 반이 접힌 채로 책상 한편에 놓여 있을 그녀의 편지. 그 편지가 너무 오랜 시간 닫혀있지 않기를 바란다. 밝은 음성의 방이 너무 머지않은 시일 내에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밝은방

밝은방 

밝은방은 미술을 좋아하거나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작업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의 이름입니다. 지난 10년간 아르브뤼(Art Brut)와 에이블아트(Able-art) 분야에서 각종 예술워크숍, 전시, 출판물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김효나와 김인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brightworkroom.modoo.at
brightworkroom@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rightworkroom.modoo.at

밝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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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workroom@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rightworkroom.modoo.at

상세내용

그녀에게는 문득 작은 종이를 건넨다.
손바닥만큼 작은, 그래서 결코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을 자그마한 종이다.
그녀가 붓을 쥔 손을 잠시 멈출 때, 또는 혼자만의 즐거운 생각으로 가만히 웃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의 상상 속으로 멀리, 짐작도 할 수 없이 멀리 나아가고 있을 때, 그 상상을 깨지 않을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작은 종이 하나를 건넨다.

“영현씨, 편지 한번 써볼까요.”

그리고 기다린다.
한 시간. 또는 하루.
일주일. 또는 한 달.
기다리지 않는다.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까마득히 잊었을 무렵, 내가 나만의 상상 속으로 멀리, 돌이킬 수 없이 멀리 파고들고 있을 때 그녀는 그 상상을 깨지 않는 자그마한 음성으로 나를 부르며 작은 종이 하나를 내민다.

  • 한영현 <라체원에게>, 2020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써 내려간 글자들.

고쳐 쓴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흔적들.
정직하게 찍힌 마침표들.
단순하지만, 발신인의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는 소박한 문장들.
오로지 수신인의 안부를 묻고, 행복을 빌어주려는 의지로만 가득한 밝은 음성의 공간.

이 공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어둡다고 느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어두웠음을 발견한다. 손바닥만 한 편지 속에 형성된 음성의 공간이 너무나 밝아서, 편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미세한 빈틈도 없이 환하게 밝아져서, 아아 어두웠구나, 또다시 어두워지고 말았었구나, 매번 깨닫게 된다.

한영현 <최종일에게>, 2019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펼쳐진 음성의 공간은,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실제 음성과 닮았고(그녀는 밝게 속삭인다), 또한 그녀가 그리는 그림과도 닮았다. 풀잎과 꽃, 작은 화병과 그릇, 작은 동물들이 가지런히 배열된 풍경을 그리는 한영현 창작자. 그녀가 편지 속에서 발화하는 그 밝음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도 강렬히 발화하고, 그녀의 그림 앞에서 그녀의 편지를 읽다 보면 편지 속 음성이 그림 속 작은 동물, 식물이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한영현 <꽃무늬 화병>, 종이에 수채 및 색연필, 240x320mm, 2019

(이를테면 저 무수한 꽃송이들은 말하는 것 같다: 행복하세요. 잘 지내세요. 내일 되면 잘 되실 겁니다.)

한영현 <숲속의 버섯집>, 종이에 수채 및 색연필, 370x520mm, 2019

(작은 버섯들은 속삭이는 것 같다: 근사해요. 잘하신 것 같습니다. 대단해요. 행복하세요.)

한영현 창작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작은 종이를 건넨 건 지난여름, 정확히 8월 12일이다. 내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거리두기 완화로 잠시 재개되었던 밝은방 워크숍이 광화문집회 이후 다시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얼마 뒤 워크숍 자체가 아예 사라지게 되면서 그날이 한영현 창작자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작은 종이를 건네받은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쓸 편지의 수신인을 미리 말해주었다. 워크숍을 하다 쉬는 시간에 나가면 늘 커피를 타주는 선생님, 항상 검은 옷을 입는 그 선생님에게 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보석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 편지 또한 눈에 선하다. 아직 누구도 읽지 않은, 반이 접힌 채로 책상 한편에 놓여 있을 그녀의 편지. 그 편지가 너무 오랜 시간 닫혀있지 않기를 바란다. 밝은 음성의 방이 너무 머지않은 시일 내에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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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방은 미술을 좋아하거나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작업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의 이름입니다. 지난 10년간 아르브뤼(Art Brut)와 에이블아트(Able-art) 분야에서 각종 예술워크숍, 전시, 출판물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김효나와 김인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brightworkroom.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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