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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창작자의 마음 그림

이음광장 마음

  • 밝은방 창작그룹
  • 등록일 2021-02-17
  • 조회수934

2008년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와 교류하고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무수한 창작세계와 작품을 만났다. 보는 즉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개성 넘치고 작품의 완성도가 뛰어난 그림도 적지 않게 만나봤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 김현우, <초록, 슬프고 슬프다>, 캔버스에 유채, 33.4×24.2cm, 2020

무엇이 그토록 슬펐을까? 이 작품의 제목은 <초록, 슬프고 슬프다>이다. 이 작품을 나는 최근 창작자의 작품집을 제작하며 발견하였다. 눈부신 색채와 에너지를 발산하며 경쾌한 리듬으로 율동하는 김현우 창작자 특유의 ‘픽셀 드로잉’ 사이에 이 슬픈 그림이 하나 끼어 있었다. 어두운 먹구름과도 같은 청록색 바탕 위를 빠른 속도로 휘젓고 가르는 굵은 선. 작품을 맞닥뜨리는 순간, 이 선들은 무언가 큰 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작품 아카이빙을 하면서 보니, 창작자는 삶의 어느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고통’을 주제로 작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는 주로 입원을 하였고, 힘든 수술을 치러내야 했다는 사실도.

  • 이호석, <부정과 혼란>, 종이에 펜과 수채, 20×20cm, 2020

이 작은 드로잉의 제목은 <부정과 혼란>이다. 이호석 창작자와는 지난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호석 창작자는 연필이나 펜으로 깊은 숲이나 자연의 풍경을 몹시 세밀하게 펼쳐내는 작업을 하는데, 이날은 창작자가 작업을 끌어갈 에너지가 충분치 않아 보였기에 내가 조금 다른 주제를 제안하였다. “마음, 지금의 마음을 그려볼까?” 그리고 마음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작은 종이를 주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해도 좋고 망쳐도 좋으니 현재의 마음을 그려보라고 했다. 창작자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얼마 뒤 느린 속도로, 그러나 멈춤 없이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설명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가슴 속에 물과 불처럼 대립하는 두 개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혼란스러워요.” 그림을 그리기 전보다는 훨씬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 김치형, <기쁨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7x12cm, 2018
    포스터 이미지

  • 김치형, <행복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3x11cm, 2018

  • 김치형, <불행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6x12cm, 2018

김치형 창작자는 서로 다른 종을 합성하거나 생물과 무생물을 합성하여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들이 등장하는 세계를 그린다. 이를테면 해바라기와 햄스터 이빨, 문어의 촉수를 합성하여 ‘거대 해바라기’라는 캐릭터를 만들거나, 와사비와 간장을 먹고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초밥 동물’을 창조하는 식이다. 어느 날은 ‘기쁨’ ‘행복’과 같은 감정 또는 추상적 상태와 곤충을 결합하여 위와 같은 벌레군단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불행해 보이는 ‘불행벌레’였다. 이 벌레를 누가 이렇게 불행에 빠뜨렸냐고 묻자 창작자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불행벌레는 자기 스스로 불행을 먹고 사는 벌레예요. 불행이 주식이기 때문에 우울과 상실감에 늘 시달려요.”

  • 김현우, <두려움>, 27x19.5cm, 종이에 마카, 2016

마지막은 다시 김현우 창작자의 그림 <두려움>이다. 벌써 6년 전 그림으로, 그것을 처음 본 그때 그 순간부터 이 ‘두려움’은 내 가슴 속에 줄곧 남아있었다. 마음에 두려움이 떠오를 때마다 이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이 두려움을 보기 전에는 두려움은 내게 이러한 형상은 아니었다. 지금도 오직 이러한 형상만은 아니지만, 두려움의 천 가지 형상 중 하나가 이것이 되었다. 삭막한 마음 위에 쏟아져 내리는 작은 조각들. 강렬한 빛을 발하여 눈을 뗄 수 없는 저 무수한 조각들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가슴 속에 형형색색의 작은 조각이 쏟아져 내리고, 쏟아져 내리고, 끝없이 쏟아져 내리면 나는 알아차리곤 한다. 두렵구나. 나는 지금 두려운 거구나. 그리고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 작은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런 다음 뒤돌아선다.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이 그림에서 멀어진다. ‘두려움’에서 멀어진다. 앞으로 몇 번이고 또다시 코앞에 두려움을 마주하겠지만, 이 ‘두려움’이 있기에 나는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다. 한 장의 소박한 그림은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긴 시간을 살아낸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밝은방

밝은방 

밝은방은 미술을 좋아하거나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작업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의 이름입니다. 지난 10년간 아르브뤼(Art Brut)와 에이블아트(Able-art) 분야에서 각종 예술워크숍, 전시, 출판물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김효나와 김인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brightworkroom@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rightworkroom.modoo.at

밝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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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방은 미술을 좋아하거나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작업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의 이름입니다. 지난 10년간 아르브뤼(Art Brut)와 에이블아트(Able-art) 분야에서 각종 예술워크숍, 전시, 출판물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김효나와 김인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brightworkroom.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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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2008년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와 교류하고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무수한 창작세계와 작품을 만났다. 보는 즉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개성 넘치고 작품의 완성도가 뛰어난 그림도 적지 않게 만나봤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 김현우, <초록, 슬프고 슬프다>, 캔버스에 유채, 33.4×24.2cm, 2020

무엇이 그토록 슬펐을까? 이 작품의 제목은 <초록, 슬프고 슬프다>이다. 이 작품을 나는 최근 창작자의 작품집을 제작하며 발견하였다. 눈부신 색채와 에너지를 발산하며 경쾌한 리듬으로 율동하는 김현우 창작자 특유의 ‘픽셀 드로잉’ 사이에 이 슬픈 그림이 하나 끼어 있었다. 어두운 먹구름과도 같은 청록색 바탕 위를 빠른 속도로 휘젓고 가르는 굵은 선. 작품을 맞닥뜨리는 순간, 이 선들은 무언가 큰 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작품 아카이빙을 하면서 보니, 창작자는 삶의 어느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고통’을 주제로 작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는 주로 입원을 하였고, 힘든 수술을 치러내야 했다는 사실도.

  • 이호석, <부정과 혼란>, 종이에 펜과 수채, 20×20cm, 2020

이 작은 드로잉의 제목은 <부정과 혼란>이다. 이호석 창작자와는 지난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호석 창작자는 연필이나 펜으로 깊은 숲이나 자연의 풍경을 몹시 세밀하게 펼쳐내는 작업을 하는데, 이날은 창작자가 작업을 끌어갈 에너지가 충분치 않아 보였기에 내가 조금 다른 주제를 제안하였다. “마음, 지금의 마음을 그려볼까?” 그리고 마음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작은 종이를 주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해도 좋고 망쳐도 좋으니 현재의 마음을 그려보라고 했다. 창작자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얼마 뒤 느린 속도로, 그러나 멈춤 없이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설명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가슴 속에 물과 불처럼 대립하는 두 개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혼란스러워요.” 그림을 그리기 전보다는 훨씬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 김치형, <기쁨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7x12cm, 2018
    포스터 이미지

  • 김치형, <행복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3x11cm, 2018

  • 김치형, <불행벌레>, 종이에 펜과 마카, 16x12cm, 2018

김치형 창작자는 서로 다른 종을 합성하거나 생물과 무생물을 합성하여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들이 등장하는 세계를 그린다. 이를테면 해바라기와 햄스터 이빨, 문어의 촉수를 합성하여 ‘거대 해바라기’라는 캐릭터를 만들거나, 와사비와 간장을 먹고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초밥 동물’을 창조하는 식이다. 어느 날은 ‘기쁨’ ‘행복’과 같은 감정 또는 추상적 상태와 곤충을 결합하여 위와 같은 벌레군단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불행해 보이는 ‘불행벌레’였다. 이 벌레를 누가 이렇게 불행에 빠뜨렸냐고 묻자 창작자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불행벌레는 자기 스스로 불행을 먹고 사는 벌레예요. 불행이 주식이기 때문에 우울과 상실감에 늘 시달려요.”

  • 김현우, <두려움>, 27x19.5cm, 종이에 마카, 2016

마지막은 다시 김현우 창작자의 그림 <두려움>이다. 벌써 6년 전 그림으로, 그것을 처음 본 그때 그 순간부터 이 ‘두려움’은 내 가슴 속에 줄곧 남아있었다. 마음에 두려움이 떠오를 때마다 이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이 두려움을 보기 전에는 두려움은 내게 이러한 형상은 아니었다. 지금도 오직 이러한 형상만은 아니지만, 두려움의 천 가지 형상 중 하나가 이것이 되었다. 삭막한 마음 위에 쏟아져 내리는 작은 조각들. 강렬한 빛을 발하여 눈을 뗄 수 없는 저 무수한 조각들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가슴 속에 형형색색의 작은 조각이 쏟아져 내리고, 쏟아져 내리고, 끝없이 쏟아져 내리면 나는 알아차리곤 한다. 두렵구나. 나는 지금 두려운 거구나. 그리고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 작은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런 다음 뒤돌아선다.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이 그림에서 멀어진다. ‘두려움’에서 멀어진다. 앞으로 몇 번이고 또다시 코앞에 두려움을 마주하겠지만, 이 ‘두려움’이 있기에 나는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다. 한 장의 소박한 그림은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긴 시간을 살아낸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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