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은 힘이 있다. 때로는 서로 다른 힘들을 한데 모으기도 한다.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만큼이나, 이야기 바깥으로 이끄는 소설이 있다. 그래서 독자는 두 시공간을 오가야 할 때가 있다. 정확히 임솔아의 단편소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학과지성사, 2021)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는 ‘공간’과 ‘표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집을 구하고 웃음을 익혀나가는 여성 작가 ‘나’의 삶을 담아낸 소설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간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나’의 삶을 뒤흔든다. 처음 마련한 “내 집”은 많은 가구를 들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만, ‘나’의 생활만큼은 보호해주지 못한다. 천장 곳곳에선 비가 새고,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이나 빠르게 지어진 옆 건물은 조망권과 일조권을 ‘나’로부터 회수해간다. 이렇게 ‘나’의 생활은 흔들린다. 요동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꿋꿋하게 간직해온 ‘나’의 자긍심 역시 점차 사그라든다. 자긍심은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즉 “인간이 품은 진실”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문학이 ‘나’에게 일러준 것이었다. 이때 반짝이는 내면의 빛과 반대되는 것이 다름 아닌 ‘표정’이다.
이를테면 웃음이 있다. 어떤 웃음은 “화살”과도 같아서 타인을 아프게 만든다. 일찍이 ‘나’는 누군가에게 무안함과 상처를 떠안기는 그 유해한 태도를, 비뚤어진 마음을 과장된 겉모습으로 포장하는 그 모순된 표정을 거부해왔다. ‘나’의 자긍심은 문학을 읽고 쓰는 일과 더불어, 이처럼 “무표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싹트고 씩씩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나’는 이 “무표정”을 끝내 잃어버린다. 언젠가부터 ‘나’는 웃기 시작한다. 새집의 하자를 보상받기 위한 보험금을 과잉 청구하기로 할 때, 인테리어 업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미역국에 화학조미료를 넣을 때, 집을 보러 온 사람에게 누수를 감추고 매매계약을 체결할 때, ‘나’는 웃는다. 어느새 ‘나’는 “누군가를 낚았다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된다. ‘나’의 이 웃음들은 문학의 문법과 “무표정”만으로는 결코 자신을 오롯이 지킬 수 없는 ‘현실’의 엄혹함을 비춘다. 잇따라 ‘공간/새집’과 ‘표정/웃음’ 역시 자본과 권력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름으로 모습을 바꿔 출현한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엔 또 다른 소설 밖 현실이 교차해있다. 이에 공간과 표정은 다시금 탈바꿈한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바로 ‘나’의 몸이다. 비록 ‘나’는 타인과 자신을 속이면서 웃음을 학습하지만, “잘려나간 발가락”만큼은 숨기지 않는다. 샌들을 신고 밖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목욕탕에 다니며 ‘일상’을 산다. 그럴 적마다 ‘나’의 몸엔 돌연 온갖 시선과 행동이 쏟아진다. 발을 보자마자 곧바로 얼굴을 확인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쳐다보는 사람, 잘 걷고 있음에도 부축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대단한 드라마”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뭉클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모두 ‘나’의 일상을 ‘구경거리’로 치환하는 끈질긴 표정들이다.
현실의 지반을 단번에 바꾸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차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좀처럼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은 ‘나’에겐 따가운 시선을 겨누지도, 섣부르게 다가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샌들을 신은 날의 ‘나’는 ‘장애인’으로 “취급”되지만, 운동화를 신을 적엔 ‘비장애인’으로 여겨진다.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은 이렇게나 자의적이다. 아울러 이들 명명은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기에 더없이 일방적이다. 그렇다면 언뜻 엉성한 것 같지만 ‘나’를 강하게 구속하는 시선들, 몸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표정들의 구체적인 이름은 무엇일까. 만일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비장애 중심주의(ableism)일 것이다.
한편 웃음들이 더 남아있다. 장애인 등록증 발급 기준을 설명할 수 없어 당황해하며 웃는 의사를 향해, ‘나’는 따라 웃는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사람이 ‘나’의 발을 들여다보다가 어김없이 얼굴을 올려다볼 때, ‘나’는 또 웃음을 터뜨린다. 이 두 웃음은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화살”이 아니다. ‘나’의 몸을 규정하면서도 정작 도맡아야 할 책임만큼은 회피하는 누군가에게, 한결같이 예측 가능한 비좁은 상상력으로만 일관하는 누군가에게, 반성을 요청하는 ‘심문’이다. 이때 누군가‘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공간도 심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심문의 웃음은 속임수의 웃음들보다 앞선다. 소설이 그리는 ‘나’의 첫 웃음이기도 하다. 자긍심을 허물어뜨리는 세계는 어떤 몸, “손상되어버린 신체 부위”를 가진 몸엔 이토록 빨리 당도한다.
앞서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엔 힘이 있음을 말했다. 독자를 소설 밖 현실의 시공간으로 옮겨놓음을 이야기했다. 사실 소설은 샌들과 운동화를 한 차례만 언급한다. ‘나’의 손상된 몸을 서술하는 장면 역시 매우 짧다. 그렇기에 특별하고, 독자를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샌들과 운동화의 세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까닭은, 무엇보다 소설이 한 명의 독자인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2022년의 한국 사회를 생각해본다. 샌들과 운동화는 각각 그 자체로 존중받고 있는지, 이들이 딛고 있는 땅은 과연 안전한지를 자문해본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름답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품은 진실”이 아닐까. 이 진실을 모두 함께 나누고 몸들의 차이를 차별로 얽매지 않는 곳은, 적어도 지금 이곳보다는 어둡지 않을 테다. 무척 밝은 세계일 것이다.
이지훈
대학원에서 한국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를 재현하는 소설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중요성과 문제성을 고민한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다. 이곳에서 비상근 신입 교사로 활동하면서 큰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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