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어렸을 때 사람들이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나는 집에서 강아지처럼 네발로 빠르게 기어다니고 토끼처럼 무릎으로 걸으면서 이동하는데 왜 문밖 사람들은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닐까…. 나는 지금 똑바로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내 언니의 말만 알아들을까….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전화통화를 할 때면 언니의 말은 한 번에 알아듣고 내 말은 두 번 세 번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 이해도 안 되고 짜증만 났다. 어렸을 때 언어치료를 받았지만, 내게 언어장애가 있어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 언니 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은 언어장애가 있어서였을까? 언어장애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첫 번째 좌절
내가 처음 중증장애인으로 언어장애를 갖고 있다고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은 중학교 때다. 내가 다녔던 삼육재활원 (시설)학교는 한 반에 여자아이가 한두 명 있고 남자아이가 열 명 안팎이었다. 그래서 반장은 남자가 맡고 부반장은 여자가 하곤 했다. 중학교 교실에 여자는 나와 전학을 온 아이 둘뿐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전학을 온 애가 아닌 내가 부반장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 학교를 6년 다닌 내가 아니라 이제 막 전학을 온 그 애가 부반장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인지도 모른 채 엄청 화가 났다. 그렇게 분하고 섭섭한 마음을 품고 선생님이 있는 교무실로 달려가 물었다.
“왜 제가 부반장이 아닌 거죠? ○○은 이제 막 전학 왔는데 왜 부반장이 된 거죠? 선생님이 투표수를 잘못 맞춰보신 거 아닌가요?” 나의 쏟아지는 질문에 선생님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넌 너무 중증이라 반장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도 없고, ○○은 언어장애가 없잖아.” 선생님이 미안해하며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줬던 기억이 있다. 그날 집에 가서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른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 상대가 없는 라이벌 게임을 했었다.
언어소통의 기술
2011년 춤추는허리의 팀장이 되었다. 팀장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도 많아졌다. 회의도 진행해야 하고 외부 일정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에겐 모든 것이 생소한 일이었다. 그중에는 언어장애로 인한 어려움도 한몫 차지했다. 춤추는허리는 공연할 때 자막을 사용하는데, 이는 단지 언어장애 때문이 아니라 무대장치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 당시 연출과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연출은 “자막을 하게 되면 공연이 방해된다”라고 주장했다. 연출이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대사의 많은 비중을 언어장애가 덜 심한 배우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공연의 완성도’라는 명목으로 내부적으로 배우들 간에 치열한 눈치 보기와 역동이 작용해서 서로서로 경계하기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내적갈등도, 배우들 간의 역동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나의 언어장애 문제에 더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장애가 문제가 될 수도 있구나.’ 중학교 때의 경험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날 밤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과음하면서 언어장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연출을 맡으면서 외부 스태프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도 중요한 과제였다. ‘언어장애는 무엇일까? 비언어장애인처럼 아무 장치 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 언어장애가 있는 연출과의 소통은 외부 스태프들에게도 도전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나만의 소통방식이 필요했다. 10년 넘게 함께 활동했던 활동가가 고민을 함께하며 여러 각도로 제안해 주면서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언어장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한 번 더 물어봐달라는 당부를 하고, 동시통역, 자막통역, 핸드폰 통역 등의 소통방식을 찾았다. 외부 스태프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한 번 더 물어봐달라고 하고, 비대면으로 소통할 때는 문자소통으로 작업하고 있다. 조명 같은 경우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본에 체크해서 이야기 나누는 방식을 찾기도 했다.
소통의 방식은 분명하게 찾았지만, 그 외에 고민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언어장애 자체가 고민이었다면, 여러 형태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의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을 어떤 관점으로 담아서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의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계속해야 하는 이유
나는 언어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항상 나를 차별한다고 생각했고 차별을 당한다고 말해왔다. 정말 나는 차별을 당하기만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거나 차별했던 경험은 없을까? 나는 당당하게 차별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설명하기 쉬운 방법으로 차별을 당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내가 얼마나 음성(구어)소통에만 익숙한 사람이었는지 인식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연극으로 무대에 서면서 “몸으로 말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왔고, 비장애인 활동가에게 “음성(구어)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라도 몸으로 표현한다. 그것을 잘 봐야 한다”라고 말해왔다. 이런 말들을 왜 나 스스로에겐 적용하지 않았을까? 나는 음성(구어)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과 연극놀이를 할 때 어려웠고 불안했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어쩔 땐 내 생각대로 그들의 표현을 판단하기도 했다. 이렇듯 차별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
사실 최근 들어 나의 말이 내 생각이나 기분을 표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반복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렇다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래서 때론 방어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애써 웃으면서 ‘잘해보겠다’고 허공에 대고 외치곤 했다. 말이란 것은 너무 정확해서 그 사람의 생각대로 입으로 몸으로 나온다. 아무리 멋진 문장이나 단어를 사용해도 그 사람의 생각이 아니면 그 말은 공허하고 허공으로 날아간다. 이건 장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언어장애는 내가 매 순간 직면해야 하지만, 가끔 아닌 자주 언어장애를 이용해 불리한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려고 할 때도 있다. 여전히 나의 말 정도는 가볍게 무시되거나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나는 더 많은 장애여성의 이야기가 사회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나의 동료가 나의 경험을 궁금해하고 나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어주는 관계를 맺고 싶다. 소통이야말로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대에서 더 많은 언어장애가 흘러넘치면 좋겠다. 나에게 무대란 공간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춤추는허리 단장이자 배우로 정기공연을 연출하고 출연해왔다(2010~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18에 퍼포먼스 <마침, 좋은삶>으로 참여했고, 장애여성몸짓공연 <따로또같이>(2011), 웹 독백극 <춤추는 혼잣말>(2020), 연극연습4. <관객연습 - 사람이 하는 일>(2021), 전시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2022), 극단 정기공연 <빛나는>(2019, 2022)에 출연했다.
wdc214@gmail.com
▸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웹페이지
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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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무대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