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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통해 살펴본 장애예술 비평의 방향

이슈 포용이 아닌 전복의 논리를 구축하기

  • 이상헌 춤 비평가
  • 등록일 2023-06-14
  • 조회수706

이슈

예술비평은 작품 구성과 기교에 관한 분석, 창작 현장의 동향 파악, 예술의 역사적 탐구와 비판적 통찰을 통해 과거를 거쳐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질문에 관한 답을 제시하면서 도래할 미래를 예감하는 역할을 해왔다. 장애예술 비평의 역할도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 장애예술 비평은 독자적인 지형을 형성했다기보다 준비 단계로, 장애예술이 던진 질문과 비평 내부에서 발생한 질문에 직면해 있는 상태이다. 장애예술은 ‘장애’와 제도권(비장애) 예술의 관계에 관해 지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제도권 예술을 향한 질문인 동시에 장애예술 비평에 대한 추궁이기도 하다. 근본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에 제도권이 선택한 대답 중 대표적인 것이 ‘포용적 예술’이다. 포용적 예술이란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집단의 창작 활동과 이와 관련한 미학적 전략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회적 배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대두됐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포용’이란 말에는 여전히 배제가 포함되어 있다. ‘포용’을 지향한다는 말은 아직 제도권 예술이 장애예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장애를 포함한 소수집단의 예술과 제도권 예술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포용적 예술’이 실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제도권 예술의 위계에 안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지금의 장애예술 비평이 자기 어법을 직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예술 간의 위계를 암묵적으로나마 인정하고, ‘포용’에 지나친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위계에서 상위인 제도권의 논리와 어법을 기준으로 비평하다 보면 장애예술의 지향점과 가치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장애예술 비평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도권이 만든 위계를 전복할 논리를 구축하는 것, ‘몫 없는 이들의 몫’(자크 랑시에르)을 찾는 과정의 출발 말이다.

위계를 전복할 논리

무용에서 장애 무용은 애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지금은 무용과 장애가 어울리지 못하는 개념으로 인식하지만, 원래 무용은 몸 상태를 규정하지 않았다. 무용이 특별히 훈련된 사람의 전유물이 된 것은 모더니즘이 주류가 되면서이다. 미국의 무용평론가 존 마틴(John Martin)은 무용이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정체성은 움직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모던댄스를 규정하는 간단하고 확실한 개념이다. 모던댄스가 움직임 자체를 탐구해 형식적인 순수성을 확보하면서 무대는 그들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역이 되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포스트모던 댄스 운동을 주도한 저드슨 그룹(Judson Group)은 모던댄스가 춤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일상 동작에 주목하고, 모든 일상적 움직임이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Trio A>(1968)는 포스트모던 댄스의 상징적인 작품인데, 이를 한 번 더 뒤집은 시도가 ‘김원영×프로젝트 이인(최기섭, 라시내)’의 <무용수–되기>이다. 이 공연은 장애예술 전반과 제도권 무용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장애예술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무용에서 말하는 ‘일상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캐물었다. 김원영이 휠체어에서 벗어나 바닥을 기는 장면은 이본 라이너가 일상적 움직임이라고 보여준 걷기, 뛰기가 장애인에게는 일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으로 거대 서사와 중심의 해체를 추구한 포스트모던 댄스도 장애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원영은 자신의 작업이 ‘정상성’이 아니라 ‘비정상’ 안으로 곧장 뛰어드는 일에 더 가깝다는 진술로 장애예술의 지향점이 제도권 예술을 향한 덧없는 구애가 아니라 ‘정상’이라는 기준을 흔드는 일이라고 알려준다. 장애예술 비평은 김원영의 작업이 보여준 장애예술만의 지향점을 확연하게 짚어내는 과정이다.

기준을 흔드는 일

비평 내부의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은 장애예술 비평의 지형 구축을 위한 선행 조건이 될 수 있다. 질문은 ‘장애예술 비평과 제도권 비평의 층위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이고, 답은 장애와 장애예술을 이해하는 것과 장애인 당사자주의적 시각을 갖추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제도권 예술과 비평은 장애를 이해해야 하고, 장애예술 비평은 일정 부분 당사자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당사자주의 개념에 관한 많은 논란은 차치하고, 장애예술 비평에서 필요한 당사자주의는 장애인만이 겪는 사회적·정치적 차별과 배제, 억압과 폭력의 경험을 체화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장애인만 당사자주의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배제와 억압, 차별을 드러내는 모든 예술적 시도가 당사자주의에 근거한다. 당사자주의는 장애예술 비평이 제도권 비평의 어법을 사용하는 현실에서 유용하다. 특히 메타 비평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메타 비평은 2차 비평이다. 1차 비평이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2차 비평인 메타 비평은 1차 비평의 문제점과 편향, 비평가의 이데올로기와 행태에 관해 비판적·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비평의 한 종류이다. 메타 비평이 가능하게 하려면 1차 비평이 활발하게 생산되어야 하며, 비평가는 논쟁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창작 그룹과 비평 그룹이 함께 토론하는 집단이 많이 생겨야 한다. 비평과 창작이 서로의 어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평은 겉돌고 창작은 비평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실제로 제도권에서 비평이 창작자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로 스스로 권력화한다는 이유로 창작자가 비평을 믿지 않고 반목하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주의를 매개로 창작과 비평이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장애예술 비평은 독자적인 지형을 구축하고 제도권 비평과 비교 층위를 가늠할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의 공진화

여전히 장애인은 배제됨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는 ‘호모 사케르’(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학계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로 분주하다. 휴머니즘(인간 중심주의)을 넘어선, 인간과 동물, 기술적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공진화하는 기술-생태적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한 번도 휴머니즘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사회는 휴머니즘 너머를 생각하고 있다. 장애예술 비평은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다려 주는 사회는 없다는 현실을 새겨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주의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 장애예술 비평은 창작자가 작품으로 마침표를 찍은 지점에서 다시 행간을 읽고, 은유를 해석하며, 위계 안에서 주저하는 지점을 뚜렷이 밝히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제도권 예술과 비평 그리고 장애인의 잠재성을 박탈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는 시도 속에서도 잠재성을 복원할 수 있다.

이상헌

지체장애인. 춤 비평가. 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 필진, 부산문화회관 월간지 [예술의 초대] 편집위원, 민주주의사회연구소 학술지 [성찰과 전망] 편집위원장, 부산시립무용단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2 부산 장애예술인 활동 실태조사」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했다.
lsanghe@hanmail.net

썸네일 사진.김원영×프로젝트 이인 <무용수-되기>(2021) (출처. 박성혜,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존재로 드러내는 몸", 웹진이음, 2022년1월26일.)

2023년 6월 (42호)

상세내용

이슈

예술비평은 작품 구성과 기교에 관한 분석, 창작 현장의 동향 파악, 예술의 역사적 탐구와 비판적 통찰을 통해 과거를 거쳐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질문에 관한 답을 제시하면서 도래할 미래를 예감하는 역할을 해왔다. 장애예술 비평의 역할도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 장애예술 비평은 독자적인 지형을 형성했다기보다 준비 단계로, 장애예술이 던진 질문과 비평 내부에서 발생한 질문에 직면해 있는 상태이다. 장애예술은 ‘장애’와 제도권(비장애) 예술의 관계에 관해 지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제도권 예술을 향한 질문인 동시에 장애예술 비평에 대한 추궁이기도 하다. 근본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에 제도권이 선택한 대답 중 대표적인 것이 ‘포용적 예술’이다. 포용적 예술이란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집단의 창작 활동과 이와 관련한 미학적 전략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회적 배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대두됐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포용’이란 말에는 여전히 배제가 포함되어 있다. ‘포용’을 지향한다는 말은 아직 제도권 예술이 장애예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장애를 포함한 소수집단의 예술과 제도권 예술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포용적 예술’이 실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제도권 예술의 위계에 안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지금의 장애예술 비평이 자기 어법을 직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예술 간의 위계를 암묵적으로나마 인정하고, ‘포용’에 지나친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위계에서 상위인 제도권의 논리와 어법을 기준으로 비평하다 보면 장애예술의 지향점과 가치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장애예술 비평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도권이 만든 위계를 전복할 논리를 구축하는 것, ‘몫 없는 이들의 몫’(자크 랑시에르)을 찾는 과정의 출발 말이다.

위계를 전복할 논리

무용에서 장애 무용은 애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지금은 무용과 장애가 어울리지 못하는 개념으로 인식하지만, 원래 무용은 몸 상태를 규정하지 않았다. 무용이 특별히 훈련된 사람의 전유물이 된 것은 모더니즘이 주류가 되면서이다. 미국의 무용평론가 존 마틴(John Martin)은 무용이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정체성은 움직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모던댄스를 규정하는 간단하고 확실한 개념이다. 모던댄스가 움직임 자체를 탐구해 형식적인 순수성을 확보하면서 무대는 그들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역이 되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포스트모던 댄스 운동을 주도한 저드슨 그룹(Judson Group)은 모던댄스가 춤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일상 동작에 주목하고, 모든 일상적 움직임이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Trio A>(1968)는 포스트모던 댄스의 상징적인 작품인데, 이를 한 번 더 뒤집은 시도가 ‘김원영×프로젝트 이인(최기섭, 라시내)’의 <무용수–되기>이다. 이 공연은 장애예술 전반과 제도권 무용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장애예술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무용에서 말하는 ‘일상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캐물었다. 김원영이 휠체어에서 벗어나 바닥을 기는 장면은 이본 라이너가 일상적 움직임이라고 보여준 걷기, 뛰기가 장애인에게는 일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으로 거대 서사와 중심의 해체를 추구한 포스트모던 댄스도 장애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원영은 자신의 작업이 ‘정상성’이 아니라 ‘비정상’ 안으로 곧장 뛰어드는 일에 더 가깝다는 진술로 장애예술의 지향점이 제도권 예술을 향한 덧없는 구애가 아니라 ‘정상’이라는 기준을 흔드는 일이라고 알려준다. 장애예술 비평은 김원영의 작업이 보여준 장애예술만의 지향점을 확연하게 짚어내는 과정이다.

기준을 흔드는 일

비평 내부의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은 장애예술 비평의 지형 구축을 위한 선행 조건이 될 수 있다. 질문은 ‘장애예술 비평과 제도권 비평의 층위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이고, 답은 장애와 장애예술을 이해하는 것과 장애인 당사자주의적 시각을 갖추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제도권 예술과 비평은 장애를 이해해야 하고, 장애예술 비평은 일정 부분 당사자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당사자주의 개념에 관한 많은 논란은 차치하고, 장애예술 비평에서 필요한 당사자주의는 장애인만이 겪는 사회적·정치적 차별과 배제, 억압과 폭력의 경험을 체화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장애인만 당사자주의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배제와 억압, 차별을 드러내는 모든 예술적 시도가 당사자주의에 근거한다. 당사자주의는 장애예술 비평이 제도권 비평의 어법을 사용하는 현실에서 유용하다. 특히 메타 비평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메타 비평은 2차 비평이다. 1차 비평이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2차 비평인 메타 비평은 1차 비평의 문제점과 편향, 비평가의 이데올로기와 행태에 관해 비판적·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비평의 한 종류이다. 메타 비평이 가능하게 하려면 1차 비평이 활발하게 생산되어야 하며, 비평가는 논쟁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창작 그룹과 비평 그룹이 함께 토론하는 집단이 많이 생겨야 한다. 비평과 창작이 서로의 어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평은 겉돌고 창작은 비평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실제로 제도권에서 비평이 창작자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로 스스로 권력화한다는 이유로 창작자가 비평을 믿지 않고 반목하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주의를 매개로 창작과 비평이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장애예술 비평은 독자적인 지형을 구축하고 제도권 비평과 비교 층위를 가늠할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의 공진화

여전히 장애인은 배제됨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는 ‘호모 사케르’(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학계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로 분주하다. 휴머니즘(인간 중심주의)을 넘어선, 인간과 동물, 기술적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공진화하는 기술-생태적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한 번도 휴머니즘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사회는 휴머니즘 너머를 생각하고 있다. 장애예술 비평은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다려 주는 사회는 없다는 현실을 새겨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주의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 장애예술 비평은 창작자가 작품으로 마침표를 찍은 지점에서 다시 행간을 읽고, 은유를 해석하며, 위계 안에서 주저하는 지점을 뚜렷이 밝히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제도권 예술과 비평 그리고 장애인의 잠재성을 박탈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는 시도 속에서도 잠재성을 복원할 수 있다.

이상헌

지체장애인. 춤 비평가. 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 필진, 부산문화회관 월간지 [예술의 초대] 편집위원, 민주주의사회연구소 학술지 [성찰과 전망] 편집위원장, 부산시립무용단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2 부산 장애예술인 활동 실태조사」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했다.
lsanghe@hanmail.net

썸네일 사진.김원영×프로젝트 이인 <무용수-되기>(2021) (출처. 박성혜,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존재로 드러내는 몸", 웹진이음, 2022년1월26일.)

2023년 6월 (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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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16: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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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무용 비평의 관점을 명확한 언어로 짚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무용에서 장애 무용은 애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말씀을 곰곰히 새겨봅니다. 장애예술 비평이 활발해지려면 무엇보다 장애예술 현장을 부지런히 살피고 다양한 비평 언어를 찾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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