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예술가의 여행 레시피’는 장애예술가에게 쉼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장소, 뜻밖의 장소나 우연히 발견한 장소, 찾아가는 맛이 나는 곳을 취향과 꿀팁을 담아 전합니다.
나에게는 9살 차이 나는 형과 이제 공무원직을 은퇴하고 남은 노후를 즐기시는 부모님이 있다. 24살 때, 대학교에서 밤샘 작업으로 인해 집에 잘 가지 않아 혼자 살기를 결심하고 독립해 나왔다. 들리지 않는다는 단 하나, 나에게는 불편하지 않지만 남들에게는 불편했던 이유로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혼자 살기에 적응하면서 하나씩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내 주변이 작게 느껴졌다.
나는 장애인 복지 할인으로 KTX 승차권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2~3개월에 한 번씩 기차역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서 저녁만 먹고 다시 돌아왔고, 지금은 익숙해져 1박2일, 2박3일 등 숙박을 하며 국내의 매력을 찾아가고 있다. 나는 계획을 세우면 하루가 망해버리는 징크스가 있어서, 기차 예매가 완료되면 모든 걸 가는 기차 안에서 해결하였다.
여행 가기 하루 전, 친한 친구와 근처에서 맥주를 마셨고 살짝 취기가 올라 가게 안에 있던 다트를 장난삼아 던진 곳이 포항이었다. 나는 기차 예매를 하고 잠이 들었고, ‘내가 오늘 포항에 가는구나’ 또한 당일 울리는 알람 소리에야 깨달았다. 당일 환불은 안 될 테니 급하게 가방에 모든 짐을 넣고 슬리퍼를 신고 서울역으로 향하였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고 포항 역시 하루 종일 비 소식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숙소를 잡았고, ‘일출 필수’라는 내용에 꼭 일출 보기에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지만, 다행히 미리 맞춰둔 도착 전 진동 알람에 깰 수 있었다. 이미 안내 전광판에는 “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수어 배경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포항역 앞에서 펜션 사장님을 기다렸다. 미리 특이사항에 “청각장애인이고 남자입니다.”라고 적어두어서 사장님은 전화가 아닌 도착 메시지와 함께 차 번호를 찍어서 보내주셨다. 사장님은 나를 위해 아주 큰 소리로 이야기하시는 것으로 보였지만, 아쉽게도 나는 사장님의 움직이는 입 모양을 보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사장님은 무엇인가 나에게 질문하고 열정을 다해 이야기하셨다. 나중에 펜션 사장님 부인이 카톡으로 알려주시길, 맛집을 소개해 주셨던 거라고 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너무 멋있는 바다와 바람을 마주할 수 있었지만, 비가 와서 오래 구경하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정리하고 우산을 챙겨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께 근처 밥 먹을 수 있는 곳을 추천받아 큰 전복이 들어간 해물탕을 먹었다.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는 맛이겠지만 확실히 바다가 느껴지는 맛과 해산물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가장 좋았던 건 맛이 아닌 바로 옆에서 통창으로 볼 수 있는 바다였다.
비가 왔지만 포항에 왔다는 걸 즐기고 싶어 택시를 타고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낸 볼만한 곳들을 구경하였다. 사진도 찍고 실시간으로 답해주는 DM으로 나는 또 다른 맛집들을 갈 수 있었다. 혼자 대게를 먹기에는 무리여서 포장주문했고, 포장을 기다리며 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사장님은 대게를 손질하며 나를 자주 쳐다보았고, 그런 반응에 익숙한 나는 ‘수어를 보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나에게 포장된 음식을 건네주기까지 계속 웃었다.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고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 했다.
대게가 담긴 스티로폼 상자에 예쁘게 빨간 리본을 매준 사장님은 나에게 상자를 건네며 조금은 어색하게 그리고 천천히 수어로 “감사하다”라고 인사해 주셨다. 나는 놀라 “수어를 아시네요?”라고 물어보았고, 사장님은 자기 여동생이 나와 같은 청각장애인이라고 하셨다. 최근 여동생이 결혼했는데 내가 영상통화한 내용 중 장난스럽게 주고받은 이야기가 마치 동생을 보는 듯했다고 한다. 나의 기분 나쁨은 신기함과 반가움으로 바뀌었고, 사장님은 안에 서비스를 넣었으니 다음에 꼭 놀러 오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도착하면 꼭 엄청난 리뷰를 작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써 해는 다 저물어 어두워졌고 나에게는 익숙한 적막감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서울의 밤과 바다가 있는 지방의 밤은 너무 다른 것 같다. 서울은 밤이 찾아와도 달이 없어도 밝은 거리였는데, 여기는 정말 칠흑처럼 어두웠다. 바다를 보기 위해 선택한 통창은 검은 물감이 칠해진 듯했고, 이 창으로 꼭 일출을 봐야지 다시 다짐하였다. 미리 구매한 복분자주와 손질된 대게를 꺼내서 먹기 시작했고 사장님이 서비스로 준 대게 딱지 밥과 라면까지 빠르게 흡입하였다. 손에 묻은 국물도 아까워 입으로 마무리하였고, 잠이 와도 내일이면 끝날 시간이 아쉬워 옥상으로 향하였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다가 있어서 원래 이런 건지 바람이 엄청났지만, 함께 불어오는 바다의 향이 너무나도 좋았다.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라고 했지만, 역시 혼자 느낄 수 있는 이 잠깐의 감정과 시간이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대게집 사장님과 대화를 하다 최근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부모님이 떠올라 사진을 찍어 가족 톡방에 보내주었고, 답장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사라진 숫자 1을 보며 잠잘 준비를 하였다. 일출 시각에 맞춰 알람을 5분 단위로 10개씩 만들었고 새로운 침대에서는 어디에 핸드폰을 넣어야 진동을 느낄 수 있는지 베개 높낮이를 확인하였다. 처음에는 손에 쥐었는데 뒤척이다 떨어지면 어쩌지 싶어 다시 뒤통수 아래 베개 밑에 넣었다. 새벽도 아침도 아닌 대낮 같은 느낌에 나는 눈을 떴다. 역시나 나는 실패하였고 커튼을 열어 여전히 먹구름이 껴 있는 바다를 감상하였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
호리존 풀빌라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일출로328번길 30-1
엘리베이터는 있지만, 경사로는 없다. 실내 현관에서 방바닥까지는 턱이 있고, 수영장은 계단으로 이동해야 하므로 휠체어 접근은 불가능하다. 이동을 돕겠다는 주인장의 의지는 높다.
포항 죽도시장 한신수산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도시장1길 37-1
포항 죽도시장은 장애인 전용주차장, 장애인화장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2023년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우수등급). 주변에는 휠체어와 유아차 이용 가능한 산책로가 있다.
정예교
그림을 전공했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어 지도를 한다. 2021년 연극 〈천만 개의 도시〉로 데뷔해, 〈나인 프리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 이름〉(2022), 〈The Wanderers 2023〉, 〈두 개의 시선〉(2023), 〈어느 관리의 죽음〉 수어 낭독 쇼케이스 등에 출연했다. 단편영화 〈샴페인〉, 〈정적〉, 드라마 〈열혈사제2〉 등이 있다. 드라마 〈커튼콜〉, 〈킬러들의 수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수어 지도를 하고 있다.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선정 2024 배리어프리영화 관객홍보대사이다.
jyegy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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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변에서 포항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네요. 아직 한번도 못가본 곳인데, 글을 읽으며 포항 앞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 여행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이야기가 재밌네요. 그림으로 담아주신 바다 풍경도 멋져요! 그림으로 담아보는 여행의 기록, 꼭 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