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뜨거운 여름밤이었다. 미국의 수어문학가이자 수어예술가인 이안 산본(Ian Sanborn)의 작품을 접한 이들은 소리의 세계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상관없이 자기의 심장을 두드리는 시언어의 태동을 느꼈다. 농인인 이안 산본은 세상을 귀로 사는 ‘청인’과 세상을 눈으로 사는 ‘농인’ 모두에게 함께 즐기고 감격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더위 속으로 삼삼오오 사라지는 이들의 뒷모습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날개처럼 자라고 있었다. 수어문학의 밤! 여름 휴가철에 맞물린 이 행사에 찾아온 이들은 어떤 목마름을 안고 왔을까?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 내는 최고의 정수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가장 숭고하고도 호사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즈음, 나는 한 편의 시 한 편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여름 내내 익히고 만들어갔던 ‘VV 수어 스토리텔링 공동창작 워크숍’ 참여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수어민들레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함께 수어문학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안 산본 수어예술가를 초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이안 산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수어문학의 밤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는데, ‘VV 스토리텔링 공동창작 워크숍’과 수어문학의 밤을 분주히 준비하던 수어민들레로부터 예상치 못한 요청을 받았다. 결국 워크숍 수어통역사의 일원이 되어 근 한 달여 주말마다 혜화역을 오가게 되었고, 덕분에 함께 배우고 성장해가는 참여자들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모든 한국인이 시문학에 능통하거나 위대한 시문학을 창작할 수는 없듯이, 한국수어 원어민인 농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수어문학에 능한 것은 아니기에, 워크숍에 참여한 청인과 농인 모두 낯설고 떨리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청인 참여자들은 배우로 활동하는 분들이어서 그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술적 표현에 대한 내공이 있었고, 농인 참여자들에게는 원어민으로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수어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감각이 있었다. 이 두 집단이 시각언어가 펼쳐지는 시공간을 공유하며 동화되고,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표현되는 작품을 구상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은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두 세계의 조우와 화합 그 자체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어문학에 대한 이론을 강의하고 워크숍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있는 곳은 수어민들레가 유일하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수어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특수한 문화적 위치, 정확히는 ‘문화적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농인 공동체를 들여다보면, 시각 중심의 농문화‧예술인 수어문학 대신 청인들의 귀와 눈에 찰떡궁합인 수어노래가 유독 기형적으로 발전하여 농사회의 문화와 예술을 잠식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어노래는 농인의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소리와 상관없이 고유의 리듬과 운율과 심상을 가장 풍부한 시각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수어문학의 존재를 알리는 일에 오랫동안 동참해 왔고, 수어문학이 울창한 숲으로 자라는 한국 농사회의 모습을 목마르게 기다려왔다. 이번 워크숍을 보며 지난 수년간 수어문학이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애써온 수어민들레의 노력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고 있는 느낌을 받아 매 순간 안도하고 감동하며 이 여름을 지나온 것 같다.
모두가 위대한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모두가 가슴 한쪽에 시어(詩語)를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으며, 수줍은 그 시어를 꺼내어 보거나 혹은 나누고 싶은 열망을 품고 산다. 우리가 습득하게 된 언어가 무엇이든, 음성언어이든 시각언어이든, 어떤 언중(言衆)을 가진 언어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문학, 그중에서도 시문학은 해당 언중 모두가 누리고 표현하고 나누어야 하는 가장 멋지고 고귀한 인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번 워크숍을 통해 우리 사회에 소개된 ‘시각적 토착문학(VV, Visual Vernacular)’은 순수한 수어시 장르는 아니다. 수어문학 혹은 수어예술 장르 하나하나에 문화적 위치를 부여한다면, 마임과 수어시는 그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으며, 이 두 장르가 맞닿아있는 지점에서 발달한 특수한 형식의 양식이 VV이다. 이러한 낯선 영역을 깊이 있는 지식으로 쉽게 설명해준 변강석 수어민들레 대표, 참여자들의 공동창작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작품 하나하나에 경이로울 만큼 멋진 조언을 열정적으로 해준 이안 산본 수어예술가, 그리고 새끼오리처럼 그 과정을 다 따라온 참여자들!
그렇게 뜨겁고 아름다운 시간이 다 가고, 이안 산본 수어예술가는 남산의 타워 꼭대기에 자기 눈을 닮은 잠자리 한 마리를 올려놓는 아름다운 작품 〈잠자리〉로 한국에서의 서정과 때 이른 그리움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떠났으며, 수어민들레도 수어문학의 씨앗을 가득 품고 그다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봄과 같은 존재, 바로 ‘이음’! 아름답지만 힘없는 수어문학을 봄날의 대지처럼 품어 수어문학의 홀씨를 멀리멀리 날아가게 해준 ‘이음’이란 이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문화를 이해하는 힘, 문화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힘이 농사회와 닿아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여름밤이었다.
[이:음 예술창작 아카데미] 'VV 수어 스토리텔링 공동창작 워크숍’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4.6.29.~7.27|이음센터
접근성이 하나의 예술로 작품 속에 함께 있는 교육과정을 위해 수어 기초교육과 수어를 기반으로 한 장애·비장애 예술가 공동창작 워크숍으로, 수어민들레와 (사)한국연극배우협회에서 공동주관했다. 청인 배우 대상의 기초 한국수어 교육과정, 청인과 농인 아트스트가 함께한 VV 공동창작 워크숍으로 구성되었다. 수어문학의 수어표현 방식과 형태를 습득하고 공동창작 워크숍을 거쳐 창작영상을 제작해 향후 전시할 예정이다.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홈페이지 워크숍 정보
김유미
대학에 입학하면서 한국수어에 입문해 농사회와 함께하고 있는 청인이다. 한국농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MBC문화방송 수어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영혼에 닿은 언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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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024년 9월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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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로 예술을 한다니 대단한거 같아요~ 시각적으로 더욱 뛰어난 예술이 되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