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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좌담] 장애예술 비평의 역할 모호한 빈틈을 읽으면 “이야깃거리는 많다”

  • 김민조·남웅·최선영 
  • 등록일 2024-09-25
  • 조회수 371

이슈

장애예술에서 비평은 어떻게 작동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을까? 장애예술을 이야기하고 해석할 때 쓰는 언어는 풍부한가? 장애예술에서 비평의 역할을 무엇인지, 비평이 확장되고 비평 언어가 풍부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 나눠본다.

개요

  • 일시2024년 9월 4일 오전 10시

  • 장소모두예술극장 연습실1

  • 참석자 김민조 연극평론가
    남웅 미술평론가
    최선영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문화예술기획자

  • 세 사람이 작은 원형탁자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다.

    왼쪽부터 김민조 연극평론가, 최선영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남웅 미술평론가

최선영장애예술 분야에서 비평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하기 어려운데, 비평가로서 각자 경험을 나눠주시면 의미 있을 것 같다. 나는 미술 회화 작업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부터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현재 기획, 예술교육,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과 작업했던 경험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오늘 진행을 맡은 동시에 한 명의 참여자로 장애예술 비평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김민조연극계 미투 운동이 있었던 2018년부터 주로 연극 공연을 보고 비평이나 칼럼을 썼다. 당시에 일어났던 연극계의 지각 변동을 마주하면서 비평 활동을 하게 됐다. ‘연극비평집단 시선’에서 매달 월간지를 발간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페미니즘 연극을 비롯해 퀴어 연극, 장애 연극, 그리고 최근 포스트휴먼 연극 등 다양한 물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그 물결의 흐름이 어떻게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다.

남웅2011년부터 미술 비평을 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퀴어 작가들이 부상하고 당사자성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많았다. 그 당시 나는 퀴어로서만이 아니라 맥락과 관계성, 배경을 읽으려고 하다 보니 인권운동과 함께 조망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당사자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 어떻게 연결하고 깨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같이한다. 장애예술을 전문으로 공부하거나 비평작업을 많이 해보지 않은지라 이번 좌담은 다른 제안보다도 수락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나의 비평 활동에 어떤 부분이 부족한가를 확인해 보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장애예술을 만난 순간

최선영최근 장애예술과 관련해 관심 있게 본 작품이나 작업이 있나? 관심 있게 봤다는 것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질문이 많이 남아서일 수도 있고,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 된 작품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민조열거하자면 너무 많아서 어떤 작업을 얘기할지 고민했는데, 연대 창작자로 함께하고 있는 ‘미친존재감’이라는 정신장애인 연극단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이 단체는 재작년에 결성되어 3년째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장애 연극이든 퀴어 연극이든, 탈극장・탈연극 담론과 교차하는 부분이 있다. 아시겠지만, 극장이라는 곳이 굉장히 장애 친화적이지 못하고 과잉 표준화된 공간이고, 사람들을 꼼짝없이 탈출도 못하게 두어 시간 동안 가둬놓는 곳이다. 미친존재감은 그 공간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곤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기존 블랙박스 극장은 정신장애 연극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더욱이 극장은 관객과 퍼포머를 분리하기 때문에 관계 맺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첫해에는 극장을 나와서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집과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서 손님들을 초대하고 말 걸기를 시도한 작업으로부터 시작했다. 작년에는 그 작업을 확장해서 〈미친식당〉 시리즈를 진행했고, 올해는 폐쇄병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

남웅사실 근래에 장애예술, 장애미술을 표방한 작업과 전시를 많이 못 봤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장애 관점으로 연결할 만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시가 아니라 연극이다. 구자혜 연출의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더라〉라는 작품인데, ‘색자’라는 1세대 트랜스젠더 여성이 모노드라마처럼 자기 생애를 쭉 얘기한다. 전문 연극배우가 아니다 보니 갑자기 말을 잊어버리는 등 실수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면 연출이 무대 한편에서 프롬프터 역할을 맡아 말을 던져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출이 보조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배우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준 거다. 1970~80년대 황색 잡지에나 나올 법한 사진들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출현한 순간으로 인식하면서 ‘드러냄’을 상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의 얘기를 이런 식으로도 보여줄 수 있고, 그 안에서도 그냥 ‘나’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어떤 관계가 생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에는 자신이 일하는 트랜스 바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이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단순히 무대만 보는 게 아니라 잘 몰랐던 새로운 관객들, 이들 사이의 연결성까지도 보게 됐던 게 흥미로웠다. 그런 점에 꼭 퀴어 관점이 아니더라도 무대 문턱이나 장애의 언어로 의미를 살필 것도 많겠다고 생각했다. 꼭 미술이나 연극 비평의 지평이 아니라 경계와 그 바깥의 커뮤니티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해서 얘기해 볼 수 있고, 돌봄이나 노화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조저도 그 작품을 ‘미친존재감’ 멤버들과 함께 봤다. 그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을 거다. 말씀하신 대로 색자 님이 대사를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걸 힘들게 암기하는 방식이나 퍼포머가 볼 수 있는 자막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무대 위에 연출가가 프롬프터로 등장해 색자 님과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게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영비평할 때 보는 범위가 생각보다 더 넓은 것 같다. 나는 자기 작업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작업할 때 흥미로웠다. 언어화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이 계속 포착될 때, 그 과정 안에서 그의 행위나 작업 결과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들. 장애인이 자신의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기능하기를 바라는 욕망도 확인하고 있는데, 그런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제 삶의 어려움까지도 같이 보인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서 계속 글쓰기를 하게 됐던 것 같다. 두 분 역시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로움보다 그것을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성, 발표하는 현장이 달라질 필요나 시도의 사회적 의미까지 같이 보고자 하는 의지나 관심이 느껴지는데, 비평할 때 무엇에 집중하려고 하나?

김민조연극에서 ‘표준’이라 여기는, 대사를 암기하는 기술을 이와 얽혀있는 노화, 장애, 퀴어와 같은 키워드를 통해 내파하고 변형하는 실험들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단순히 “연극은 억압적이다” “극장을 폐지하라”와 같은 주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연극이라고 불린 무언가가 쌓아온 유산이나 내부에서 성숙해 온 경험들이 어떻게 퀴어나 장애,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는지, 어떻게 재활용해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도들을 본다. 하지만 성공적인 경우가 아직 충분하지 않고, 미온적이거나 오히려 제2의 억압을 생산하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술비평을 할 때 내가 관심 있는 키워드들이 연극이라는 딱딱한 박스를 어떻게 절개하고 변형시키고 있는지를 관찰하고자 하고, 진짜 기발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찾을 때 재밌는 것 같다.

남웅내가 작품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계속 나 자신을 의심하면서 쓰게 된다. 비평하는 사람은 동시대성을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게 되잖나. 동시대의 감각은 뭘까, 꼭 학제의 담론만은 아닐 것 같다. 너무 많은 설명이 있는 만큼 편파적일 수 있지만, 지금의 정세나 미디어 환경을 직접 경험하면서 체득한다는 점에는 공통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감각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어떤 지점에서는 비평이 좀 과감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본래 의미와 방향이 다르더라도 작품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비평해 내기 위해서는 일단 밀어붙인다. 그렇다고 너무 내 페이스로 글을 쓰면 자족적인 문장으로만 남기가 쉬워서 나중에 읽을 때 재미도 없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누가 읽는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요즘에는 퇴고할 때 개념어들을 어떻게 풀어서 쓸 수 있을지에 집중하고 있다. 무작정 모든 단어를 다 풀어 쓸 수는 없더라도 전략적으로 풀어내는 글에 대해서 고민하며 써보고 있다.

한 편의 비평문이 나오기까지

최선영나는 개별 작업에 대한 글보다는 어떤 사업이나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그와 관련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도 아르코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전반에 관해 글을 썼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면 이걸 ‘비평’이라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실제 미술관은 비평이 아닌 리뷰를 요청한 것이기도 했다.) 비평가도 각자의 방식이 있을 것 같고 장르 특성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장애 특성에 따라 비평의 접근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가와 작업에 대해서 글쓰기를 하려면 일단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발달장애인 작가의 경우 자세한 내용에 대한 대화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취합해야 하는 데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정말 유의미한지, 동의하는 내용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고 끊임없이 추측하며 글을 써야 한다. 비평을 의뢰받고 관계 맺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글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남웅작가나 기획자들에게 비평 글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물어본다. 나는 SNS를 하지 않아서 연락을 취하려면 어느 정도 검색의 노력이 필요한데, 개인적으로는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꼭 나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필자에 대한 리서치는 글을 의뢰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진행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대부분 작가들은 비평가나 글 쓰는 사람들을 잘 모른다. 많이 알아야 하는 게 필수 조건도 아니고, 보통은 전시기획자나 기관이 가진 인력 풀에서 필자들을 소개해 준다. 그렇게 추천받아 만나더라도 서로의 작업을 탐색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글을 쓰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비평가의 협상력이 필요하다. 작가의 의중이나 작품을 제대로 가져가면서 내가 어디까지 나의 문장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를 협상하는 과정이 있다. 하지만 이건 작가가 자기 작업을 설명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고, 그것조차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 전시를 처음 하는 사람이거나 작가와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때는 비평가의 책임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작업에 따라서는 비평가가 작가나 작품의 의도와 다르게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전시나 작업에서 어떤 것을 독자에게 전달할지 고려하면서 쓰는 경우인데, 작업 의존도가 낮아지고 비평가에게 자율성이 많아지는 만큼 책임감이 더 필요해진다. 그러려면 작업을 더 치밀하게 읽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기본적으로는 작업을 치밀하게 읽고 묘사하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이 글에 전부 담기지 않더라도 시각예술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건 충실함이 필요하다. 내가 정말 읽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빈틈과 무지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밝히자고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그렇게 초안을 써서 작가에게 주면 대부분은 수락하거나 다소간 피드백을 주고받지만, 공격적으로 응답하는 경우도 있다. 작업에 실존을 담거나 의도와 완전히 다른 글이 나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작업에 대해 비평이 아닌 설명을 원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기대에 어긋나는 글일 수 있는 거다. 결국 비평은 협상의 연속이다. 내가 여기에서 어디까지 양보할지, 혹은 어디에서 가드를 올리고 작가와 싸워야 하는지. 글을 다 쓰고 나서도 이게 끝나는 건 아니다.

최선영작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보다 제삼자가 봤을 때 중요하게 얘기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더 강하게 보일 수도 있고 더 중요한 다른 것이 보이기도 할 것 같다. 그럴 때 얘기가 많이 오가게 되는 건가?

남웅미술에는 작가의 의도가 형식으로 드러날 때가 있잖나. 작가나 의뢰인이 사실관계가 틀렸다고 오류를 짚어주면 양보한다. 하지만 내가 전달자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니까. 작가가 의도 자체를 드러내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작가의 의견을 고려하면서 나의 문장으로 풀어낼지, 비평가의 주도권이 발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한 페미니즘 작가의 작품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여성의 몸과 행위들을 거칠게 그리는 작가였다. 나는 그것이 어떤 지점에서는 지금 사회의 성별 위계적인 분위기 안에서 나타나는 방어 기술일 수도 있다고 썼는데, ‘방어’라는 표현을 못마땅해했다.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표현이라고 느낀 거다. 그런데 이것도 어떤 지점에서는 이분법적이라고 보인다. 모든 게 항상 방어적일 수만도 없고 모든 게 항상 공격적이거나 급진적일 수만도 없지 않나. 이런 이중성에 대해서 ‘이것이 방어적이면서도 정말 급진적이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의 문장을 세공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작가와 대화하거나 토론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누가 온전히 설득한다는 기대 외에도 내가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깨우치거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더 섬세하게 설명해 내도록 한다는 효능이 있다. 글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분명 협업의 지점이 있다. 설령 그것이 아름답지 않아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최선영비평가가 전달자 역할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매우 공감된다.

김민조나는 비평 활동을 동인지 형태의 비평 그룹에서 시작했다. 멤버 다섯 명이 매달 스스로 기획하고 어떤 것을 쓰고 싶은지 각자 알아서 정하고 쓰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보고 싶은 공연에 관해 쓰는 글이 많아졌다. 그게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청탁해 오는 글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글을 써서 공연팀에 보상 없이 주기도 하고, 운 좋게 플랫폼을 찾아서 매칭 받아 싣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글을 써도 공연팀과 글에 대해 함께 대화 나누는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는 않다. 비평하는 사람들은 외롭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하는 일이다 보니 글을 쓰는 노동자들은 다들 외로울 수밖에 없는데, 피드백을 못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글을 쓰기 전에 창작자를 만나 어떤 식으로 비평을 쓰려고 하는지 이야기 나눈 뒤 쓰기도 한다.

  • 남웅 미술평론가

  • 김민조 연극평론가

  • 최선영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변화하는 비평의 역할

최선영사회의 변화나 예술 신에서 언어의 필요성이 달라질 때 비평의 역할도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장애인의 표현 행위를 깊게 들여다본 경험과 시간은 길지 않은데, 비평 언어는 당장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비장애인 중심의 비평 언어가 그대로 옮겨와 축적되기도 한다. 장애예술 신에서 비평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혹은 정말 필요한지에 관한 논의가 이제야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대적으로 비평의 역할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비평을 통해서 어떤 것을 기대하나?

남웅김민조 평론가처럼 동인지에서 시작해서 플랫폼을 두고 활동하는 건 좋은 방식이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다 보면 적지 않은 글이 묻힌다. 인쇄 잡지 글은 온라인에 공유·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기관에서 청탁받은 글도 도록에 들어가 서가에 꽂히면 끝이다. 비평이 유통되고 확산하면서 서로 인용하고 주석도 달아주고 싸워야 재미있는 건데, 힘들여 썼는데 글 자체가 유통이 안 되니 재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청탁받지 않아도 그냥 쓴다는 말에 공감한다. 쓰고 싶은 글이 청탁받은 작업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어떤 것에 관심 있는지를 계속 살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작품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서 사회적 시사점을 짚고, 동시대성에 대해 질문하며,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비평의 역할을 얘기하면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공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글 쓰는 사람들도 동료의 글을 잘 안 보잖나. 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인 독자가 정말 필요하고, 그 안에서 글을 읽고 싸우거나 피드백을 주면서 어떤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선순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로 활동하는 단체인 행성인의 웹진에서 글을 쓰며 비평 훈련을 했다. 처음에 독자들이 내 글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너무 어렵다고 얘기할 때 살짝 빈정상하면서도 계속 글을 썼다.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이 뭘까 생각하고 채찍질과 당근을 받으면서 글을 썼던 경험이 곱지는 않았지만 소중하다. 나의 독자가 누구인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쓰면서도 문장을 다시 보도록 만드는 것 같다.

김민조연극은 공연예술로서의 특수성 때문에 오랫동안 비평이 기록과 증언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한국퀴어연극아카이브(KQTA)’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데, 과거 연극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실물을 볼 방법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다. 이처럼 연극은 기본으로 사라질 운명을 갖고 있어서 보통 비평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기록과 묘사가 어느 정도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기호적인 분석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고유한 몸을 가지고 들어간 ‘나’라는 관객이 그 연극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기술하는 것도 연극과 만나는 좋은 길이어서, 암암리에 일인칭 비평이 증언의 역할을 해왔던 것 같다. 이게 과해서, 연극 비평은 영화나 문학 비평에 비해 수준이 높지 못하다는 비판이나 자성도 있었다.
2018년 이후 연극계 내의 지각 변동을 견인한 창작자들도 ‘기록’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런 연극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은 고맙지만, 창작자들의 노력을 받아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뭔가 더 나은 창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줄거리 소개하다가 끝나버리니까 만족할 수 없는 거다. 비평가가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돌려줄 것인지를 창작자나 관객이 많이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떤 관점에서 전환적으로 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전에 봤던 영역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오는 포인트를 잡아내서 그것 위주로 쓰기도 했다.

시간성과 개별성

최선영장애예술 신에서도 누가 어떤 신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등 묘사나 기록이 필요한데,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결과 중심으로 쓴 비평도 많다. 비평 이전에 기록이 필요한데, 기록 언어가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비평이 일면 증언과 기록의 역할이라는 말에도 공감된다. 장애예술과 관련한 비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것 같다. 어떤 부분은 예상과 다르다거나 달라질 필요를 느끼는 지점도 있을 것 같다. ‘다름’이 요구된다고 느낀 경험이나 장애예술 비평에서 고민되는 것이 있나?

김민조아무래도 시간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연극비평가들이 가장 약한 분야가 의외로 ‘연기’다. 연극 비평을 보면 연기에 관한 얘기가 많지 않다. 플롯이나 주제, 공간, 조명 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정작 핵심에 있는 배우의 연기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고 또 잘 모른다. 그래서 배우들이 요새 그것에 관해 문제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연기 비평을 할 수 있으려면 연기를 알아야 하잖나. 이걸 모르는 상태로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연기를 본다거나 상품화된 결과만 봐서는 그 언어가 구축될 수 없다. 이게 비평에서 합법적으로 연기에 관해 발언하지 않을 수 있는 카드 같은 것이 됐다. 사실 몇 년 동안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떠올랐다가 갑자기 퇴조해 버린 말이 ‘과정’이다. 과정을 기록하고 참관하고 함께 경험해 봐야 언어도 나올 수 있다. 나 역시 연기를 비평하지 못한 이유는 연기 과정에 함께하여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나의 언어를 벼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체감하고 반성한다.
이걸 더 크게 맞닥뜨리게 되는 게 바로 장애 연극인 것 같다. ‘장애인 당사자의 연기’에 관해 잘 모른다. 이분법적이지만, 신체장애적인 측면과 정신장애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신체적 움직임이 다르잖나. 그랬을 때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은, 비장애인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신체의 움직임과 지금 연기하고 있는 장애 당사자가 자신의 몸과 관계 맺으면서 움직이는 방식은 매우 다르며, 그 두 세계가 서로 교차하거나 교행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이러한 과정을 들여다본 경험이 없다는 걸 뼈아프게 느낀다.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와 함께하면서 연습 과정을 볼 기회가 많은데, 그러면서 장애 시간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 중심 언어로는 ‘지연’ ‘가속’ ‘반복’ ‘이탈’ 같은 다양한 시간적 흐름이 있다. 조현정동장애 당사자가 대사를 말하다가 갑자기 멈춘다면, 환청이나 환시의 개입이라는, 나는 전혀 보지 못하는 어떤 대상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인 건데, 나의 눈에는 그저 ‘지연’으로 느껴지는 거다. 또 뇌병변장애 당사자의 지연은 내적으로 매우 다른 과정을 거치고 있어서 각각 시간성이 다르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배워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최선영장애 관련 얘기를 하다 보면 장애 유형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도 개별성이 있기 때문에 쪼개서 살펴봐야 하고 장애 유형별로 보편화해서 언어를 축적할 수 없는 것도 비평의 어려움으로 느껴진다.

김민조사실 장애예술 비평이 열어주는 가장 좋은 부분 중 하나가 ‘개별성’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은 항상 전형화해왔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비장애 연극에서의 배우는 그냥 ‘배우’다. 배우의 연기라는 전형화된 기술에 관해 얘기하면 되니 그 배우의 고유성이나 세계에 대해서는 주의를 잘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장애배우와 장애예술 창작과정을 함께하다 보면, 같은 사람인데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는 걸 느낀다. 오늘은 환청과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다음날은 또 싸우는 거다. 같은 조현정동장애 당사자인데 어떤 사람은 지각을 많이 한다. 두세 시간 단위로 늦는다. 반대로 어떤 이는 절대 지각을 안 한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오후 연습인데 아침 일찍부터 나오는 거다. 각자 너무 다르고 병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성이 너무 중요하다 보니, 오히려 더 무한한 지대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남웅너무 재미있고 중요한 얘기다. 누가 작업을 수행하는지를 살펴야 하고, 그가 만드는 리듬에 비평도 영향을 받는다. 비평을 하다 보면 그냥 글만 쓰게 되지 않는 상황이 있다. 비평 작업을 하게 된 작가가 장애를 키워드로 작업할 때, 그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고 어떤 방식으로 심상을 만들어 표현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리게 된다. 그것이 직접적인 대화의 자리에서는 서로 간의 좁은 시야에 개입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장애예술’을 딱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퀴어 예술을 생각할 때 비슷하게 떠오르는 기시감이 있다. 장애예술이 ‘장애 당사자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장애 관점으로 접근하는 예술’을 얘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장애인’이 등록 장애인인지 사회적 장애를 얘기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장애의 특수성과 개별성이 너무 확실한데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어”라고 뭉뚱그리는 ‘쿨함’이 갖는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고 당사자성이나 개별성으로만 얘기하기에는 장애의 특수성이 깨나가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장애 당사자든 퀴어 당사자든, 당사자로서 고민하는 지점을 염두에 두면서 비평 글을 쓴다.
한편 미술 신에서도 “장애를 이긴 예술혼”이라든지 “장애인으로서 창조적인 감각을 발휘했다”라는 식의 통념적인 표현들로 사회적 소수자들의 예술을 가두기를 반복한다. 이런 부분에서 비평은 비판적으로 개입하기가 어중간한 상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장애 작가의 작품을 비평할 때 장애를 갖고 있는 이의 감각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것이 작가만의 특수한 감각이라고 하기에는 주변 환경이나 관계가 영향을 미친다. 장애를 가진 몸뿐 아니라, 자신이 장애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지도 중요하게 살필 부분인 것 같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작품을 어디까지 읽어야 다 읽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고민된다.

최선영그 고민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줄 수 있을까?

남웅나의 물음표를 건드리는 것들이 있는데, 무지를 무릅쓰고 편하게 질문해보겠다. 발달장애인들의 그림은 왜 이렇게 알록달록함이 강조되는 걸까? 이것이 이들의 특수성일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취향에 프레임이 씌워져 있는 걸까? 아니면 많은 표현 중에도 그러한 작업이 선별되어 보이는 것일까? 이 선별은 누가 하는 것인가. 그 과정이나 맥락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얘기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왜 발달장애인 예술 작품은 대부분 복지기관이나 서비스로 제공되는지, 화이트 큐브나 미술관이 아닌 기관 건물 로비나 청와대 같은 곳에서 전시가 진행되는지, 왜 보도기사는 예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다양성으로만 설명하기에는 과연 이들의 작업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야기한 비평이 있는지, 무지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서 질문을 남기고 싶었다. 장애인 투쟁에서 “우리를 복지와 시혜, 연민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구호가 이런 것과 연결된다는 심증이 있다.

시도가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추동하기

최선영장애예술에서는 특히 기존의 장애와 관련한 담론이 복지나 특수교육, 의학계 언어가 많다 보니 그 언어를 어느 정도 학습해야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언어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며 모색해야 또 다른 언어를 찾을 수 있다는 어려움이 계속 발생하는 것 같다. 동시에 언어의 강력함 때문에 부담도 크지 않을까 싶다. 기존 비평과 다른 지점이 필요하고 이 강력함을 많이 활용하고 싶은 개인적 욕구가 있다. 결국 개개인의 움직임으로 또 다른 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비평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계속 글을 쓰도록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각자의 ‘쓰기’를 일으킬까?

남웅장애예술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릴 경우 ‘접근성’을 계속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중요한 화두이지만 함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도나 환경을 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작품이나 전시 자체보다 접근성을 먼저 생각하는 게 비평의 문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접근성은 접근성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분리해서 가져가는 경우가 많이 보이지만, 접근성 역시 얼마든지 예술의 형식이나 소재로 가져올 수 있다. 일종의 메타비평에 기반한 작업일 텐데, 접근성 자체를 예술 형식으로 삼는 작가들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 같다. 극단 춤추는허리의 공연이나 김은설 미술작가가 청각장애인의 감각으로 작업한 작품이 그렇다. 김은설 작가의 작업은 마네킹 사이에 AI 번역기 같은 것을 놓고 서로 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관객이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 청각장애인이 입의 움직임을 보기 위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거리를 갑자기 좁히는 환경에 대해서 역제안하는 형태가 재미있다.
이 과정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것이 포장임을 폭로하는 작업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것이 관객으로선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고. 최근 노들섬 노들갤러리에서 했던 《위험 재앙! 그것이 바로 우리다》라는 전시가 기억에 남는다. 전시 자체보다는 참여한 작가들의 기록이 재밌었다. “소통이 너무 힘들었다” “정말 두 번은 못 할 거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도 어떻게든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결과물을 냈다. 보이는 과정에 대해서 ‘이랬어야 하는’ 과정과 이들이 ‘실제로 보여준’ 과정, 그리고 결과물 사이의 간극이 인상적이었고, 이런 지점에 대해서 비평이 치밀하게 읽으면 좋겠다.

김민조나에게 연극은 ‘번듯한’ 예술이 아니다. 얼기설기 엮은 티가 나고 조금 궁한 티도 나서, ‘핸드메이드’라는 생각이 들 때 재미있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원래 별로 정해진 게 없어서 만들어 놓고 연극이라고 우기면 되는 ‘잡스러운’ 장르라는 점을 제일 좋아한다.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와 작업할 때는 하루하루가 변수로 가득 찬다. 절대 정해진 일정대로 연습할 수 없다. 더 자주 쉬어야 하고, 더 빨리 끝내게 되거나 갑자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대단히 많은 변수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었다. 공연을 만들 때도 계획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수가 발생하는지에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다 같이 몸을 비틀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인 거다. 이게 내가 연극을 좋아했던 이유였음을 환기해 준다. 장애 연극에서 그런 순간들이 포착될 때가 있다. 오히려 성공적인 번듯한 그림보다도 실패한 티가 나지만, 어떻게든 잘 수습해서 이 장면이 나왔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 되고, 그때 ‘그것에 대해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말을 찾고 있는데, 아직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최선영결국 비평에도 개인적 의지나 가치관, 경험 혹은 문제의식이 중요한 것 같다.

김민조그렇다. 앞서 한 이야기와 반대되는 말인데, 한 장애 당사자 배우가 연극을 잘하고 싶은데 맨날 장애 연극은 ‘실패’ ‘아마추어’ 같은 키워드로 엮인다고 하더라. 예술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고 ‘연극 같은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애 연극을 보면 연극을 이탈하고 싶으면서도 연극으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포착될 때가 있다. 특히 당사자 연극이 성행하는 건 연극이나 극장이 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맥락이 있다. 광장이 없을 때는 극장이 부득이하게 광장의 역할을 대리해야 했다. 세월호, 미투 때도 그랬고, 트랜스젠더들의 잇따른 죽음이 있었을 때도 극장은 분향소였다. 선언과 애도가 이루어졌기에 극장은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연대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면 그전처럼 할 수는 없다.
비평가의 안이함 중 하나는, 할 말이 없을 때 사회적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글을 마치는 것이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더 갈 수 있는데, 다들 당사자가 “여기까지만 말하고 싶다”라고 하는 지점에서 멈춘다. 그런 부분은 예술 신의 성장이나 더 많은 경험의 축적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미학적 시도를 역으로 제안할 수 있는지, 당사자들이 경험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너무 조심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과정 내에서 시도하지 못해서 멈췄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발견될 때가 있지 않은지. 이럴 때 다시 한번 미적 비평이 가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 실패만 보지 말자고 생각한다.

남웅동감한다. 과감한 발언을 이어가는 것 같지만, 퀴어 이론도 실패를 너무 많이 예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패와 부정성은 지금의 환경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그 애착들이 실패나 주변화에 대한 자체적인 명분으로 순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전에 HIV/AIDS 운동을 하면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감염인 활동가에게 잘하지 못해도 좋고 실패해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냐는 반문이었다. 어떤 갈급의 상황이 보였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도 다 인프라가 있는 거잖나. 서구의 퀴어 이론에서 얘기한 실패의 예시와 한국 사회나 제3국에서 이야기하는 사례는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다시 한번 비판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조잘 보면 사실 실패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안전의 과잉이고, 한편으로는 실패의 과잉인 듯싶다.

최선영당사자들도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힘들게 밀고 나갈 필요도 권리도 있는 것 같다. 더 나아갈 여지가 있는데 “참여만 해도 의미 있고 예술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때 예술이 두루뭉술하게 사용되기도 하더라. 장애 당사자를 포함한 예술가 각자의 노력도 필요한 것 같다. 예술이 모호하고 넓기만 한 토대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 많이 배웠다. 어려운 주제임에도 솔직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 커다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김민조 연극평론가, 최선영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남웅 미술평론가가 나란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김민조

프리랜서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내게 연극은 너머를 가르치는 학교다. <다른 부영> <러브 앤 인포메이션> <경계를 위한 시뮬레이션> 등의 공연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기도 했다. 원고의뢰는 환영하고 공연초대권은 사절합니다.
wingmn1k@gmail.com

남웅

미술평론을 비롯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인권운동을 한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 적을 두고 활동한다. 행성인 웹진을 발행하고 있다.
0123tem@hanmail.net

최선영

2007년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개별성 중심의 활동을 기획 및 연구하고 있다. 2022년부터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voslss@hanmail.net

정리.박희연 프로젝트 궁리 에디터 teph__y@naver.com
사진.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2024년 10월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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