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연 재밌게 보셨나요?”
우리는 연극, 영화 등을 ‘보러’ 간다. 연극을 들으러 가거나 만지러 간다고 하지 않는다. 공연을 볼 때 단순히 시각적인 것 외에도 극장의 모든 요소가 우리로 하여금 공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그중 단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시각이다. 인물의 의상과 소품, 무대디자인까지 많은 것이 시각적인 요소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연극을 ‘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는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극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음성화면해설을 제공하지만, 이는 단순히 시각정보를 설명하는 부가적인 장치일 뿐이다. ‘보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한 연극 〈기억들의 무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시각적인 제약 없이 공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시각을 최소화하여 다른 감각에 집중하며 보는 연극을 만든 것이다.
기억을 감각한다, 감각을 기억한다
〈기억들의 무덤〉은 인간 P가 이상한 생명체 Q를 통해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려다 모든 기억을 잃으면서 시작된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P가 타인의 기억을 통해 자신을 찾아나가는 청소년극이다. P와 Q의 여정을 함께 감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 모습을 탐구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와 가치를 지각하고 발견하게 된다.
감각하는 연극에 ‘기억’이라는 소재가 더해지니 하나로 관통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우리는 오감과 함께 체험할 때 더 강렬한 기억을 남기곤 한다. 어린 시절의 노랫소리, 비에 젖은 흙냄새 등 기억 속에 존재하는 감각들은 나를 어느 순간의 기억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감각을 위한 장치들이 나를 더 연극 속에 몰입하게 하였다. 내용과 연출이 시너지를 얻는 순간이었다.
보는 연극이 아닌 감각하는 연극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면 무대와의 경계가 없는 관객석으로 안내된다. 무대 중앙을 둘러싼 관객석은 네 귀퉁이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고 배우들은 무대 중앙뿐만 아니라 객석 바깥면까지 무대 공간으로 활용한다. 관객이 단순히 무대를 바라보는 형식이 아니라 무대 내부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무대 안에 객석을 둠으로써 좀 더 공연을 즐기기 좋은 공간이 된다. 연극을 관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연극 안에서 어떠한 촉감과 소리, 냄새를 가까이 좇으면서 직접 느끼고 감각하며 장면을 받아들이게 된다.
공연 시작 전 “공연 중 언제든 눈을 감고 공연을 즐겨”보라고 안내한다.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반가운 멘트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나마 눈을 감고 모두가 동일한 상황에서 장면을 느껴볼 기회이니 말이다. 눈을 감고도 배우들의 움직임, 촉감, 분위기 등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다양한 감각을 위한 장치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극이 시작되면 관객석 앞에 흰 천을 드리워 시각을 제한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다른 감각에 집중하도록 하려는 장치이다. 희뿌옇게 차단된 시야에 답답함을 느끼고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눈을 감는 순간, 들리는 소리로 연극을 감각하게 되고 배우의 숨소리, 말투에 담긴 감정, 소품이 만들어내는 소리, 공간을 감싸는 냄새, 관객의 살갗에 와닿는 촉감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오묘한 향기 한줄기와 더불어 암전 상태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다채로웠던 감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오감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오감에서 벗어나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보는 것 또한 중요한 감각이라는 것을 느꼈다.
감각하는 연극의 시도와 확장을 꿈꾸며
나는 이 공연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오히려 이 공연을 통해 감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된 후 귀로 들어오는 감각이 너무 많아 때로는 버겁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익숙해진 탓에 무심코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제작에 참여하면서 주변의 소리와 촉감에 오히려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무형의 무언가를 소리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들려오던 소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소리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각각의 소리로 그려지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내가 느끼는 이 감각들을 통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또한, 이번 기회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음성해설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시각정보를 얼마나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웃는 표정이라고 하더라도 행복한 웃음인지, 비웃는 웃음인지, 슬픈 웃음인지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다르고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관객에게 무대를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까지 상상하게 해야 할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이 고민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만이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고민과 선택들로 음성해설 없이도 관객에게 공연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한 생명체 Q를 설명하기 위해 배우의 몸에 다양한 소리가 나는 물체를 달고 목소리를 늘어뜨리는 등의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Q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아도 관객은 스스로 상상하고 이미지를 그려보면서 공연에 몰입했다. 이처럼 시각적인 정보를 최소화하고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함으로써,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모든 관객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창작진은 시각을 제한한 상태에서도 관객에게 극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결과적으로 시각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동등한 환경에서 보는 연극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배리어프리 연극이 아닐까?
연극 〈기억들의 무덤〉에서는 작품에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을 함께 녹여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2022년 초연 이후 재공연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후각이 더해졌다. 후각이라는 감각의 특성상 공기 중에 퍼지면서 변형이 되기 쉽고 지속성이 있기 때문에 러닝타임 내에 여러 표현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분적으로 후각을 사용하면서 극의 내용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시도가 실험적인 연극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연극 포맷의 확장으로도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던 4D 영화가 점차 확산하는 것처럼, 4D 연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점차 대중화하는 사회를 꿈꿔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감각을 통해 더 풍부하게 연극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기억들의 무덤
비영역공작단|2024.9.12.~9.15.|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시각적 요소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감각으로 즐기는’ 청소년극이다. 시각을 최소화한 무대 위에서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느끼며 연극에 빠져든다. 어느날 잠에서 깬 P는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이상한 생물체 Q와 함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이상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P가 만나게 되는 기억들은 어떤 것이고 누구의 기억들일까.
비영역공작단은 ‘영역과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고자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기억들의 무덤〉은 시각장애 당사자의 자문, 감각에 대한 리서치, 시각장애·비장애 청소년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시각 외의 감각을 탐색하고 밀도 있게 접근했다. (이지민 작·연출, 김다영 백소정 이미라 출연)
서지혜
화학을 전공했다. 3년 전 중도실명이 되었고 현재 서울맹학교에 재학 중이다.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구현하는 연극과 뮤지컬에 매력을 느끼며, 가능하면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고 싶다.
seo940203@naver.com
사진 제공.비영역공작단(사진. 안동식)
2024년 11월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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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극들이 앞으로는 점점 더 많아져서 비장애인의 시각에서만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다 같이 즐길 수 있고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닌 극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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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연극에서 느끼는 연극으로 바뀔 수 도 있군요~ 다른 감각들을 최대한 이끌어내서 연극을 즐길다는 표현이 맞는거 같아요~ 한번 즐겨보고 싶네요~